[김현주의 나홀로 세계여행 - 비로비잔·하바롭스크] 젖과 꿀 안 흘러도 유대인 자치주 비로비잔
(CNB저널 =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3일차 (비로비잔 → 하바롭스크)
정겨운 이름 시베리아
연이틀 이어지는 야간열차 여행을 견뎌낼 수 있을까? 여행을 준비하면서 걱정했지만 다행히 쾌적한 침대열차 덕분에 비로비잔(Birobidzhan)까지 540km, 11시간을 편안히 왔다. 이번에는 카자흐계 청년들이 침대칸 동승자다. 러시아 군인이기도 한 그들도 여지없이 맥주 파티를 열어 나를 환영해 준다. 아침 안개 피어오르는 시베리아 대평원을 달린다. 시베리아는 이제 나에게 친숙한, 정겨운, 아련한 이름이 됐다.
세계 유일의 유대인 자치주
아침 7시 반 열차는 비로비잔에 닿는다. 이 지역에 흐르는 비라강과 비잔강에서 따온 이름이다. 러시아어와 이디시어로 병기된 역명 표기판이 이 도시가 예사롭지 않은 곳임을 말해 준다. 세계 유일의 유대인 자치주(JAR, Jewish Autonomous Region)다.
도시인구 7만 5000명 중 유대인은 이제 4000명(5%)에 불과하지만, 한때는 20만이 넘는 유대인 이주자들로 붐볐던 곳이다. 그래도 이 지역에는 비로비잔 유대인 국립대가 있고, 지역 학교에서도 유대인 전통 과목과 유대어를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유대인 문제의 해결책?
2차 대전 이전이고 이스라엘 건국 이전인 1934년 유대인 자치주가 세워졌을 때, 유대인 문화와 풍습을 마음껏 지킬 수 있는 이곳이 유대인 문제의 궁극적 해결책이 될 것이라는 기대에 러시아는 물론 세계가 주목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돼주기를 기대했으나 녹록치 않았다. 혹독한 기후가 주된 이유였다.
그래도 그나마 적응해낼 수 있었던 것은 이 지역에 거주하던 고려인 덕분이었다. 초기 유대인 이주자들은 그들에게서 척박한 기후와 농업 환경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배웠다. 지금도 러시아에서 가장 품질 좋은 벌꿀이 이 지역에서 나온다고 한다.
▲역앞에 유대인 이주 가족 조형물이 설치됐다. 비로비잔은 도시인구 7만 5000명 중 유대인은 이제 4000명(5%)에 불과하지만, 한때는 20만이 넘는 유대인 이주자들로 붐볐던 곳이다. 사진 = 김현주
▲유대 주일 학교와 도서관, 지역 박물관 등이 계속 이어진다. 사진 = 김현주
가나안 땅이 될 수 없었던 이유
역 광장에는 수레를 끌고 있는 유대인 이주자 가족 조형물이 도시의 성립 역사를 말해 준다. 영화 ‘지붕위의 바이올린(Fiddler on the Roof)’의 한 장면이 생각나게 한다. 거리 곳곳에는 익살스러운 표정의 유대인 악사 동상들이 서 있다. 하바롭스크 행 열차 출발까지 세 시간, 서둘러 도시 탐방에 나선다. 아주 작은 도시지만 잘 가꿔져 있다.
러시아 여느 도시에서든 그랬던 것처럼 승리 광장에서 탐방을 시작한다. 조금 더 가면 시나고그(synagogue, 유대교당), 유대 주일학교와 도서관, 지역 박물관 등을 계속 만난다. 유대인 자치주 성립 70주년을 기념해 들어선 복합시설들이다. 길 건너에는 소박한 러시아 정교회당이 있다. 풀밭에 들어가니 모기와 날벌레가 달려들어 잠시도 견딜 수 없다. 이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canaan) 땅이 될 수 없었던 이유를 금방 확인하다. 혹독한 겨울 추위는 말할 것도 없다.
브라질 남성 가르시아
비로비잔 역으로 돌아오니 아까 도시 탐방을 시작할 때 눈길을 줬던 남성이 아직도 구석 자리에 앉아 있다. 알아보니 가르시아(Tiago Garcia)라는 이름의 브라질 사람이다. 본국에서 약사인데 새로운 직장을 찾는 중에 세계 여행길에 올랐다고 한다. 9개월 전 집을 떠나 인도, 중국, 몽골을 지나 러시아를 여행 중이다. 블라디보스토크행 열차를 타기 위해 오늘 하루 종일 비로비잔 역에서 기다려야 한단다. 그에게 행운을 빌어주며 하바롭스크 행 열차에 오른다.
▲비로비잔 역. 세계 유일의 유대인 자치주 관문이다. 사진 = 김현주
빗장 풀린 러시아 여행
마침 하바롭스크 공항에는 한국 단체 관광객들이 들이닥친다. 이른바 ‘하바-블라디 따라잡기’ 홈쇼핑 패키지 상품 여행자들이다. 좀처럼 한국 단체 관광객들이 오지 않던 이곳에도 드디어 문이 열렸다. 2014년 초 한·러 비자면제 협정 발효 후 2년 반이 지나서야 빗장이 풀린 것이다.
여태까지 다녔던 해외 방문지와 비교하면 극동 러시아는 분명 특별한 곳이다. 해질 무렵, 아무르 강변에서 찬란하게 아름다운 저녁을 즐긴다. 밤공기가 선선해지는 7월 하순, 8월 초순 즈음이면 이곳 사람들은 이미 가을이 오고 있다고 말한다.
4일차 (하바롭스크 → 마가단)
지구상에서 가장 외딴 곳
하바롭스크 출발 두 시간 반, 오로라 항공기는 마가단에 접근한다. 산과 들, 바다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곳이다. 그러나 지구상에서 가장 슬픈 곳, 수만 수십만 명, 온갖 직업과 국적과 인종의 사람들이 끌려 왔고, 그중 더러는 살아나가지 못한 곳이다.
10만 도시, 러시아 마가단 주(Magadanskaya Oblast)의 수도가 덩그마니 서 있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없다. 하바롭스크에서 만났던 지인이 여러 번 되물었다. 마가단에 가는 이유를…. 나는 답변하지 못했다. 그러나 왠지 모를 가슴 설렘은 무엇일까? 이상한 분위기에 휩싸인다. 지구상에서 가장 외딴 곳에 발을 디뎠다면 이유가 될까?
굴락, 시베리아 유형소
마가단은 러시아에서도 가장 변방이다. 외지로 통하는 유일한 도로는 여름철에는 일반 차량으로는 통행이 불가능한 진흙 구덩이로 변한다. 모든 것이 결빙하는 겨울에만 콜리마 하이웨이(Kolyma Highway)를 통해 시베리아 내륙 야쿠츠크(Yakutsk)와 연결된다.
그러니까 마가단은 악명 높은 콜리마 유형소로 통하는 관문인 셈이다. 우리가 시베리아 유형소라고 알고 있는 굴락(Gulag)은 소비에트 시절의 국가 형무소 시스템으로 스탈린 통치부터 사망까지 전국 곳곳에서 운영됐다. 30여 년 운영되는 동안 2500만 명이 강제 수용됐고 그중 500만 명이 유형소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해질 무렵 하바롭스크의 아무르 강변에서 찬란하게 아름다운 저녁을 즐겼다. 사진 = 김현주
▲유대인 악사 동상이 서 있다. 비로비잔에는 유대인 국립대가 있고, 지역 학교에서도 유대인 전통 과목과 유대어를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사진 = 김현주
여름이 오기도 전에 벌써 가을
공항에서 시내까지는 50km, 먼 길이지만 버스가 다닌다. 한국제 쌍용자동차 중고 버스는 낡았지만 부드럽게 잘 달린다. 침엽수림, 버려진 공장, 버려진 마을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 같다.
내가 지금 달리고 있는 도로 또한 ‘로드 오브 본(Road of Bone)’. 시베리아 유형자들의 뼈로 건설됐다는 의미다. 이 단절된 세계에 있는 동안 만큼은 세상사의 근심과도 단절이다. 날씨는 선선하다 못해 춥다. 아직 오지도 않은 여름을 건너뛰어 여기는 벌써 가을이다.
없는 것 없는 변방의 슈퍼마켓
저녁 먹을거리를 사러 슈퍼마켓에 가보고는 깜짝 놀란다. 없는 것이 없다. 도로도 신통치 않은 이 머나먼 변방에 각종 식음료와 음식 재료를 공급하는 일은 보통일이 아닐텐데…. 러시아의 유통 시스템은 선진국 수준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간장, 라면 등 공산품은 물론 김치, 생선전 등 한국 음식도 슈퍼마켓의 한 코너를 차지하고 있으니 그저 놀랄 뿐이다. 쥐죽은 듯 고요한 밤을 맞는다. 갈매기 수백 마리 만이 밤의 적막을 깬다.
(정리 = 김금영 기자)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babsigy@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