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 '미인도' 공방] ‘인도의 무희’ 팩트 뒤에 숨겨진 화랑협회의 진실은?
▲국립현대미술관은 4월 '미인도‘를 일반에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사진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사진=위키피디아)
작년 12월 서울중앙지검 형사6부(부장 배용원)는 ‘미인도’를 고 천경자 화백이 그린 진품으로 발표했다. 이에 대해 같은 달 미인도가 감정 결과 진품일 확률이 0.0002%라며 위작이라고 결론내린 프랑스 감정팀 뤼미에르 테크놀로지 다중스펙트럼 광학연구소(이하 ‘뤼미에르’)는 내한해 반박 기자 회견을 가졌고, 화백의 유족 측은 올해 1월 항고했다.
2월 13일 프랑스의 공영방송 채널에선 뤼미에르의 최신 다중 스펙트럼 촬영 장치를 사용한 광학 분석 방법에 대한 소개와 함께 한국의 ‘미인도 사건’을 보도했다. 이 방송에서 뤼미에르 연구소장 장 페니코는 “한국 검찰이 이런 첨단 과학의 결과를 완전히 배제하고 미인도가 진품이라고 발표했다”며, “이 위작 미인도는 한국 정부 기관과 기득권의 막강한 세력에 대항하는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이 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뤼미에르는 또한 3월 17일 이태리 볼로냐 대학에서 열리는 미술품 과학감정 심포지엄에서 '미술품 감정의 최신 과학기술: 천경자의 위작 미인도 케이스를 통해 본 고찰' 주제의 학술 발표를 한다고 밝혔다. 미인도 논란이 국제적 이슈로 심화되는 양상이다.
한편, 미인도를 소장하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이하 ‘국현’)은 2월 27일 “검찰이 과학적 검증과 수사를 통해 미인도는 진품이라는 결론을 발표했고, 미술계에서도 공개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형성되고 있다”며, 4월 과천관에서 미인도를 공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유족 측은 “위작품을 전문가가 아닌 수사기관(검찰)이 진품이라고 판단했다고 해서 미술계 와 대중이 그 판단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고, 검찰의 불기소 결정에 대해서는 현재 서울고검에서 항고가 진행 중인 상태이고 법적절차가 종료된 것이 아니다”라고 대응했다.
더불어 “이런 상황에서 국현이 위작 미인도의 공개를 강행한다면, 저작권 침해 및 사자명예훼손죄로 새로운 고소를 진행할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미술계 한편에선 국현이 전시 흥행 카드로 미인도를 꺼내든 것 아니냐는 의심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하는 상황이다. 고소인인 유족 측과 피고소인 측인 국현의 입장이 팽팽히 맞섬에 따라, 미인도 논란은 더욱 장기화 될 전망인 가운데, 검찰의 발표에 불복한 유족 측 입장은 “과학적 검증 및 수사”라고 주장하는 검찰의 공정성을 의심하고 있다.
▲작년 12월 미인도가 천경자 화백의 진품이라고 발표하는 배용원 부장검사(왼쪽).(사진=연합뉴스)
진품 결론에 초점 맞춘 수사?
검찰은 천 화백의 유족 측이 제기한 현 국현 관장 바르토메우 마리를 포함한 6인에 대한 △허위 공문서 작성 △허위 작성 공문서 행사 △사자명예훼손 △저작권법 위반 혐의에 대해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다만 전 국현 학예실장 정 모 씨에 대해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300만 원 벌금의 약식기소 처분을 내렸을 뿐이다.
유족 측은 검찰이 유족 측이 제기한 피고인들의 혐의에 대해 수사의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애초에 유족 측이 고소한 내용은 허위 공문서 작성과 사자명예훼손 등이지만 검찰은 증거 가치가 우월한 위작 증거(뤼미에르의 미인도 분석 등)를 무시한 채 수사를 진행했고 그 결과, 미인도가 진품이라면서 대부분 피고인들의 혐의를 유야무야로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김재규 집에서 나오면 진품?”
검찰이 불기소 이유서를 통해 밝힌 미인도 소장 경로는, 천 화백이 오 모 대령에게 미인도를 판매했고, 이를 오 모 대령의 아내가 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아내에게 선물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김재규의 유족을 비롯해 표구상, 운반자, 당시 감정위원 등 소장자와 직접 본 사람들이 현재의 미인도와 일치한다고 분명히 진술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중간에 바꿔치기 됐을 가능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유족 측은 오 모 대령에게 간 ‘천 화백의 차녀(현 사건의 고소인 김정희 교수)’를 그린 그림은 A4용지보다 작은 크기(2호)였다고 했고, 오 대령이 생전 진행한 인터뷰에선 그 마저 구입한 적이 없고, 김재규에게 선물한 적도 없다고 밝혔다는 점을 든다. 하지만 현재 공개된 그림은 4호(A4 용지만한) 크기다. 게다가 김재규의 유족 측(동생) 역시 그런 그림이 있었다고 진술한 적은 있으나 그것이 진품라고 얘기한 적은 없으며, 김재규 아내의 진술 역시 검찰에 출석해 직접 확인한 것이 아니라, 진술서만 받아다 제출했다는 것이다. 유족 측은 검찰의 수사 과정이 소장 과정에서의 위작 생산 가능성을 배제한 채, 진작 결론으로 수사의 방향을 집중했다고 보고 있다.
▲미인도가 위작이라고 감정한 뤼미에르 테크놀로지 다중스펙트럼 광학연구소의 장 페니코 소장.(사진=연합뉴스)
뤼미에르의 연구 결과를 배제
검찰은 뤼미에르의 연구 결과에 △콧망울 이외에는 밑그림 자체에 대한 심층적 단층 분석에 대한 내용이 없다는 점 △미인도의 배경과 밑그림에는 다양한 스케치선이 나타나는데 그 것을 언급하지 않은 점 △명암 대조 편차 값, 눈동자의 흰색 부위의 두께가 비교 대상 작품과 유사해야 진품이라는 뤼미에르 전제의 타당성에 의구심이 있다는 점을 들어 수사에서 배제했다.
유족 측은 우선, 뤼미에르에 감정을 요청하게 된 배경이 본인들의 요구가 아닌 검찰 측의 요청에 의해 세계적으로 명망 있는 업체를 수소문해 초청한 것인데, 수사 과정에서 억지 논리를 씌워 연구 결과를 배제한 것은 납득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들은 오히려 뤼미에르가 내한해 감정을 하는 당시, 피고인 측인 국현 관계자들이 검찰과 동등한 위치로 회의에 참석하는 반면, 유족들은 검찰의 협박에 가까운 명령으로 미인도 근처에도 가보지도 못했다고 지적했다. 뤼미에르는 한국에서의 연구 결과 설명을 위한 기자 회견 후, 파리 현지에서 검찰이 연구 자료를 왜곡하고 통계 자료를 조작했다는 반박 기자회견을 다시 한 번 가지기도 했다.
권춘식의 그림과 같지 않으면 진품?
검찰이 뤼미에르의 63쪽에 달하는 ‘다중스펙트럼 촬영기술로 확보한 초고해상도 영상을 컴퓨터로 단층분석 해 광학적으로 분석한 결과보고서’를 배제하고 선택한 과학 감정은 천 화백의 작품 13개와 미인도, 그리고 위작범임을 자처해 온 권춘식의 모작을 비교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정결과였다.
검찰은 미인도와 천 화백의 진품들에서 검출된 안료의 성분이 유사하다며, 특히 밑그림 분석에선 권춘식의 모작과 미인도 그리고 천 화백의 ‘청춘의 문’을 비교하며, 압인선(연필이나 송곳 같은 뾰족한 것으로 종이에 자국을 낸 것)이 미인도와 진품들에서는 발견되나 권춘식의 모작에선 발견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유족 측은 “권춘식의 모작 ‘막은 내리고’는 천 화백이 서양화 물감(과슈)으로 칠한 해외여행 스케치를 모작한 것이고 미인도는 천 화백의 진채 동양화를 모작한 것”이라며 “둘 사이에 차이점이 있는 것은 당연함에도 검찰은 권춘식의 모작과 미인도의 차이로 미인도가 진품이라는 근거를 제시하는 논리 비약을 했다”고 주장했다.
더불어, “검찰은 ‘권춘식 외 미인도 위작을 자처한 다른 위조범은 없다’고 전제했다”며, “권춘식은 고소대상에도 포함돼 있지 않고, 미인도의 위조범이라고 단정한 일도 없다”고 밝혔다. 권춘식은 본인이 천경자의 위조범이라고 진술한 것을 이미 몇 차례 번복한 전례가 있어 신빙성이 없고 증거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인도의 무희’의 원작으로 추정되는 천 화백의 1979년 작품 ‘아그라의 무희’.
1991년의 또 다른 위작 ‘인도의 무희’
한편, 최근 천 화백의 유족 측은 미인도 논란이 시작된 1991년 당시 천 화백 위작을 포함한 대규모 위작 사건이 일어난 적이 있음을 밝히며, 미인도를 진품이라 판정한 화랑협회에 대한 의혹을 드러냈다. 당시 미인도 말고도 다른 위작인 ‘인도의 무희’가 있었다. 천 화백의 작품인 ‘아그라의 무희’를 위작한 이 작품은 강남 모 화랑에서 전시됐다가 천 화백이 알게 되어 그림을 내리고 도록까지 폐기했던 사건이다. 유족 측에 따르면 이 위작의 출처 화랑의 대표가 천 화백에게 “한 번만 살려달라”고 빌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당시 검사였던 김성준 현 법무법인 산경 대표변호사는, 이번 미인도 사건 진술서를 통해 “당시 수사관들이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위조범들이 그린 그림을 유명 화랑이나 미술관에서 싼값으로 구입한 다음 수년간 묵힌 후 진품인 양 시중에 내놓아 고가에 판매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화랑과 위조범의 공생관계가 심각했다”고 술회했다.
또한 “천 화백을 참고인으로 오시게 해 압수한 그림에 대한 위작(‘미인도’와 ‘인도의 무희’가 아닌) 확인을 받았고 처벌 의사를 확인한 참고인 조서를 받았다”며, “본인이 만난 천 화백은 너무도 정정하고 건강했으며 기억력이 명료했다”고 밝혔다.(천 화백은 김성준 당시 검사와 만나 ‘인도의 무희’에 대해 언급했지만 수사로 이어지진 않았다)
▲항고를 위해 법원에 온 천 화백 유족 측의 변호인단.(사진=연합뉴스)
“화랑협회, 작가가 생존시에도 위작을 진작으로 둔갑시켜”
하지만, 이번 미인도 검찰 수사 발표에서 천 화백이 가짜라 밝혔던 ‘인도의 무희’가 화랑협회의 감정에 의해 진품으로 판정돼 있었던 사실이 밝혀졌다. 유족 측은 이미 위작으로 끝난 일인 줄 알고 있었는데 미인도 사건 이후, 천 화백이 미국에서 여생을 보내는 동안 이 그림이 진작으로 둔갑했다고 주장했다. 더불어 유족 측은 이번에 기소된 정 모 전 국현 학예실장이 “천 화백이 위작 주장을 철회했다”는 허위 사실을 만들어 기고나 인터뷰를 통해 퍼져나가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인도의 무희’에 관한 천 화백의 위작 철회 소문은 현재까지도 미인도가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는 천 화백의 생전 주장을 의심하는 입장의 근거로 쓰이고 있다. 최근에는 당시 그 그림을 전시했던 화랑주가 검찰로부터 진작 판정을 받았다는 소문까지 만들어졌다. 그러나 당시 담당 검사였던 김 변호사의 진술로 사실무근으로 확인됐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화랑협회 측은 “화랑협회가 작품 감정을 했던 것은 오래된 일이고 현재는 하고 있지 않다. 아직 내부적으로 (사건 정황, 입장 등이) 정리되지 않았다”며 입장 발표를 유보했다.
유족 측은 “이 사건(‘인도의 무희’ 진작 판결)은 화랑협회가 작가가 생존해 있음에도 작가 몰래 진품 판정을 한 일이 드러난 셈”이라며, “위작 미인도를 진품으로 만들려는 국현과 화랑협회의 이해가 일치되는 점이 여기에 있다. 그 불순한 동기가 앞으로 명확히 밝혀져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연수 breezeme@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