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대우조선해양 외통수에 걸린 국민연금공단 선택은
‘울며 겨자 먹기’식 지원 언제까지?
▲2월 23일 경남 거제시 아주동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서문으로 직원들이 출근하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CNB저널 = 도기천 기자) 정부가 대우조선해양에 대한 수조원대 추가 지원에 나선 가운데, 대우조선의 최대 채권자인 국민연금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문형표 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돼 구속수감 되면서 ‘VIP의 거수기’였다는 비난에 직면한 상태라 정부 의도대로 움직이기 쉽지 않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다가 대우조선이 파산하게 되면 수천억원의 국민노후자산을 날리게 된다. 외통수에 몰린 국민연금은 어떤 선택을 할까.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대우조선의 회사채 발행잔액은 1조3500억원에 이른다. 이 중 올해 만기가 돌아오는 회사채는 9400억원이다. 당장 다음달에 4400억원의 회사채가 만기 도래하고 7월 3천억원, 11월 2천억원 등 줄줄이 대기 중이다. 국민연금은 이 가운데 4천억원 가량을 보유하고 있는데, 채권단 중 가장 큰 규모다.
하지만 올해 대우조선의 수주실적은 미미하다. 지난달 미국의 LNG 회사와 부유식 액화천연가스 저장 재기화 설비(LNG-FSRU) 7척에 대한 투자의향서(LOI)를 체결했고, 이달초 유럽지역 선주로부터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2척을 수주한 게 전부다.
대우조선은 2015년 3조3천억원, 2016년 2조7천억원 등 매년 2~3조원 규모의 적자를 내고 있다. 부채총액이 14조 5천억원에 이르며, 자기자본 대비 부채비율이 무려 2700%대로 추정되고 있다. 자본금에 비해 빚이 27배나 많다는 얘기다.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3월 23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제11차 산업경쟁력 강화 관계장관회의에서 대우조선해양 지원방안에 대해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이런 상황에서 금융당국은 3월 23일 2조9000억원의 자금을 추가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시중은행과 회사채 투자자를 포함한 모든 채권자가 채무조정·회사채 만기연장·출자전환 등 다양한 방식으로 손실을 분담 한다는 구상이다.
이런 정부의 계획은 채권단에게 큰 부담을 주고 있다. 특히 정부는 채권단에게 출자전환을 요구하고 있는데, 이는 대우조선을 끝까지 끌고 가겠다는 의도로 읽힌다.
출자전환은 금융기관이 기업에게 빌려준 대출금을 그 기업의 주식으로 전환해 부채를 조정해주는 방식이다. 2015년 산업은행은 정부 방침에 따라 1조 8천억원 어치의 대우조선 채권을 주식으로 전환한 바 있다. 이에 따라 산은이 보유한 대우조선 지분율은 79%까지 올랐다.
이번에는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의 무담보채권 1조6천억원 전액을, 국민연금·우정사업본부·은행·보험 등 기관투자자는 보유한 채권의 50%를 출자전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길어지는 논의, 결론 못내려
이런 가운데 국민연금의 역할이 주목받고 있다. 회사채 투자자 중 보유 채권액이 가장 큰데다, 정부 산하 기관이라는 점에서 국민연금이 어떻게 방향을 잡느냐에 따라 채권단의 향배가 결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추가 지원은 1차 지원 때와 달리 ‘선 채무조정’, ‘후 자금지원’이 기본원칙이다. 만일 국민연금이 정부 뜻대로 대우조선 채권의 만기를 연장해 주고 출자전환에 나설 경우, 다른 은행들도 동참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미래창조과학부 산하기관인 우정사업본부는 3천억원대의 대우조선 채권을 보유하고 있는데 국민연금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국민연금은 문형표 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돼 국민적 비난에 직면한 상태라, 대우조선해양 지원에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다. 문 전 이사장이 3월 20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리는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려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채권단은 4400억원의 회사채가 만기 도래하는 4월 21일 이전에 사채권자집회를 열어 대책을 논의할 예정이다. 사채권자집회는 전체 채권액의 3분의1 이상 참석, 참석자의 3분의2 이상의 찬성으로 결론이 도출되는 만큼 국민연금의 역할이 중요하다.
만약 지원책이 무산되거나 크게 축소될 경우, 대우조선은 워크아웃, 법정관리 등의 절차를 밟게 될 가능성이 높다. 금융위원회는 3월 23일 대우조선 지원과 관련해 “채권단의 자율적 합의가 무산되면 4월 유동성 부족이 현실화돼 부도가 발생하고 기업도산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국민연금은 내부 논의를 거쳐 최종입장을 정하겠다며 말을 아끼고 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관계자는 CNB에 “정부의 지원책을 면밀하게 분석한 뒤 판단하겠다”고 말했다.
차라리 발 빼는 게 낫다?
현재로서는 보건복지부 소속 기관인 국민연금이 정부 의도와 다른 길을 걷게 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하지만 갈수록 기금운용의 독립성이 강화되고 있는 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돼 비난 여론에 직면한 상황 등을 고려하면 뜻밖의 결론을 내릴 가능성도 배제하기 힘들다.
국민연금은 최근 수년 간 외부전문가 영입 확대, 전문위원회 강화 등 개혁에 속도를 내왔다. 국회에는 기금운용의 투명성 및 의결권 행사절차 강화, 국민연금공단 이사장 임명에 있어 국회 인사청문회 실시 등을 골자로 하는 여러 건의 개정안이 상정된 상태다. 이런 점에서 국민연금의 독자행동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는 것.
문형표 전 이사장이 직권남용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점도 부담이 될 수 있다. 문 전 이사장은 보건복지부 장관이던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과정에서 국민연금이 찬성표를 던지도록 부당한 압력을 가한 혐의로 지난 1월 구속기소 된 상태다. 그는 보건복지부 담당 공무원 등을 통해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담당자에게 두 회사 합병 안건을 외부 전문가로 구성된 의결권 행사 전문위원회에 넘기지 않고 자체 투자위원회에서 심의·의결하게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경남 거제시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전경. 사진 = 연합뉴스
정부가 ‘양치기 소년’이 돼 버린 상황도 추가지원을 망설이게 하고 있다.
정부는 2015년 10월 청와대 ‘서별관회의’에서 대우조선에 대한 4조2000억원(유상증자 및 출자전환 포함)의 금융지원을 결정한 바 있다. 서별관회의에는 최경환 당시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임종룡 금융위원장, 안종범 청와대 경제수석 등 경제수장들이 전부 참석했다.
당시 정부는 지원의 전제조건으로 대우조선의 과감한 구조조정, 영업이익 증대 등을 내걸었지만 전부 지켜지지 않았다. 특히 당시 정부는 “더 이상의 추가지원은 절대 없다”고 공언했다. 결국 거짓말을 한 셈이 됐다.
이런 여러 배경들로 인해 국민연금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비난에 직면한 대우조선에 대해 선뜻 지원결정을 내리기 힘든 처지가 된 것이다.
그렇다고 국민연금이 ‘대우조선 살리기’에 반대할 명분도 뚜렷하지 않다. 대우조선이 지원 받지 못해 쓰러질 경우 산업 전반에 미칠 손실이 천문학적이기 때문이다.
이미 대우조선이 선수금으로 받은 선박 건조 비용이 13조2천억원에 이르는데 이 돈을 전부 발주사에 돌려줘야 한다. 피해액 산정을 놓고 여러나라와의 국제재판이 벌어질 수도 있다. 1500여 곳에 이르는 협력업체·부품공급업체들이 줄도산 할 경우, 총 피해액이 57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군함, 잠수함, LNG선박 등 대우조선이 보유한 국가전략기술이 고스란히 외국으로 넘어갈 우려도 있다.
따라서 지원책이 무산돼 대우조선이 파산하게 되면 국민연금 또한 엄청난 후폭풍을 맞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채권은행의 한 관계자는 “국민연금으로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가 된 만큼, 막판까지 여론추이를 봐가면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출자전환은 위험부담이 큰 만큼 회사채 만기연장을 통해 시간을 벌어주는 쪽을 택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고 말했다.
이필상 서울대 교수(경제학부)는 “왜 대우조선이 이렇게 됐느냐에 대한 원인규명과 책임소재부터 분명히 밝혀야 제2,제3의 대우조선을 막을 수 있다”며 “조선산업의 미래를 충분히 고려해 가능성이 없으면 부도처리하는 것이 당장에는 큰 타격이 오더라도 장기적으로는 우리경제에 낫다”고 지적했다.
도기천 기자 babsigy@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