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9호 김금영⁄ 2017.03.30 16:58:53
(CNB저널 = 김금영 기자) 마초적인 남자가 대세였던 시절이 있었다. ‘남성다움’이라 하면 우락부락한 눈매와 터프한 말투, 근육질 몸매가 대표적으로 이야기됐다. 2000년대에는 짐승돌(짐승과 아이돌의 합성어로, 거친 매력을 지닌 그룹을 칭하는 용어) 열풍이 불었다. 짐승돌의 대표 주자로 꼽힌 2PM의 택연은 무대에서 옷을 찢고 근육질 몸매를 드러내는 퍼포먼스로 ‘찢택연’이라는 별명까지 얻으며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2017년 시대가 선호하는 남성상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방송에서 흔히 비쳐지는 아이돌 그룹, 모델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패션계에서는 ‘앤드로지너스 룩’ 바람이 불었다. 그리스말로 남자를 뜻하는 앤드로, 여자를 뜻하는 지나케어가 합쳐진 이 말은, 남자와 여자의 특징을 모두 담은 패션을 일컫는다. 국내에서도 1990년대 가수 김원준이 치마를 입고 등장했을 때는 “충격”이라며 “흉하다”고들 말했지만, 현재 대표 패셔니스타로 불리는 지드래곤이 치마를 입으면 “멋있다”는 소리가 쏟아진다. 그만큼 인식이 변한 것.
‘여자보다 더 예쁜 남자’로 불리는 슈퍼주니어의 김희철과 샤이니의 태민을 비롯해 요즘 남성 아이돌 그룹 멤버들은 백옥 같은 피부와 가녀린 몸선 등 기존 ‘남자답다’고 인식돼 온 틀을 깼다. 이건 여성 그룹에서도 마찬가지다. 여성들의 마음까지 저격한다는 ‘걸크러시’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그리고 과격한 퍼포먼스와 강한 인상을 드러낸 2NE1, 포미닛 등이 많은 사랑을 받았다. 기존 제시돼 온 남성상과 여성상에 의문이 제기됐고, 새로운 모습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런 시대의 흐름 속에서 점점 모호해진 젠더(gender) 경계에 제시 모크린 작가가 관심을 가졌다. 한국에서의 첫 개인전 ‘XOXO’전을 갤러리 페로탕에서 열었다. 전시의 주인공은 인기 아이돌 그룹 엑소(EXO)다. 엑소 멤버인 수호가 자신의 모습이 그려진 작품을 직접 감상하러 방문하기도 했다. 그 덕분인지 요새 전시장은 엑소 팬들의 성지 순례 장소로도 인기를 끌고 있다. 전시명인 XOXO도 발음을 그대로 하면 꼭 엑소를 이야기하는 것 같다(XOXO는 해외에서 이메일을 쓸 때 말미에 키스를 뜻하는 ‘쪼쪼’로 따뜻함을 연상시킬 때 쓰인다고 한다). 이쯤 되면 작가를 ‘엑소 덕후’로 추측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작가는 한국 아이돌 그룹에 관심이 많기는 하다. 이번 전시를 위해 한국을 찾은 작가는 블랙핑크, 방탄소년단, 슈퍼주니어, 빅뱅 등 한국 아이돌 그룹의 영상을 직접 보여줄 정도로 애정과 호기심을 보였다 한다. 그런데 단순 팬심으로, 그냥 초상화를 그리는 개념으로 이번 전시를 마련한 것은 아니다. 작가의 주된 이야기는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모호한 경계들, 그곳에 있다.
2017년과 1900년대 사이의 타임머신
작가는 2년 전 LA 코리아타운에서 엑소 멤버들의 스티커 사진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스티커 속에는 매우 예쁘장하게 생긴 엑소 멤버들이 담겨 있었다. 처음 엑소의 존재를 모르고 스티커를 봤을 때는 남성인지 여성인지 알 수 없는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특히 눈길을 끌었다고 한다. 전시장에 그려진 엑소 멤버들을 봐도 느낌이 묘하다. 하나 같이 가느다란 손목에 목젖이 보이지 않는 고운 목선, 선한 눈매까지. 남성으로도, 여성으로도 확정지어 이야기하기 애매한 분위기가 전시장을 감돈다. 꼭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에 등장한 오스칼과 같은 느낌이랄까.
해외에 수많은 아이돌 그룹이 있지만, 특히나 여러 멤버로 구성된 한국 아이돌 그룹에서 모호한 젠더의 경계를 작가는 강하게 느꼈다고 한다. 또 외모는 예쁘장한데 보이는 퍼포먼스는 파워풀한 것도 흥미로웠다.
작가는 시대를 역행하는 듯한 느낌에도 흥미를 가졌다. 스티커 속 엑소 멤버들의 모습이 과한 리본 장식, 화려한 의상 등 1900년대 고전 미술에 등장하는 옛날 남자들과 비슷했던 것. 특히 우아함이 특징인 로코코 시대 미술에 관심이 많았던 작가는 현재의 엑소에서 과거 시대의 유산이 연결되는 지점을 느꼈다. “그건 마치 타임머신을 탄 것과 같은 매우 흥미로운 느낌이었다”는 고백이다.
이번 전시 이전에도 작가는 경계에 관한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꾸준히 작업에 담아 왔다. 그의 화면을 보면 분명 어디에선가 본 것 같다. 램브란트 반 레인의 그림 속 부드러운 살결의 느낌, 모딜리아니의 그림 속 과장된 목선 등이 집합적으로 들어간 느낌이다. 그래서 뭔가 친숙하고 익숙하다. 그런데 그 가운데 또 새롭다. 이것이 또한 묘하다.
이건 작가가 의도한 바다. 작가는 딱 정해진 고정된 틀에 갇힌, 이미 답이 정해진 이야기에서는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는 어느 시대인지도 모호하고, 등장인물의 성별조차 모호한, 경계를 가지고 노는 작업에 탁월하다. 익숙한 고전의 요소들이 작가의 손을 통해 현 시대와 연결돼 사람들을 만난다. 그리고 작품을 보는 사람들 또한 경계에 서서 과거도 현재도 함께 느끼게 된다. 이 작업을 작가는 계속 이어오고 있다.
작가의 상상력까지 들어간 화면은 이 느낌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갤러리 페로탕 측은 “초상화 작가의 계보가 있다. 앤디 워홀의 경우 당대 유명 인사들을 그렸다. 그런데 앤디 워홀은 상대방을 아는 듯한 사적인 감정을 투영해 그리는 특징이 있었다. 제시 모크린은 초상화에 ‘이 사람은 이러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넣어서 새로운 이야기를 꾸린다”고 밝혔다. 결국 초상화 속 사람은 실제 존재하는 동시에 또 상상에 등장하는, 그래서 현실과 상상의 경계에 서는 인물이다.
이번 엑소를 담은 작업에서도 작가의 상상력이 발휘됐다. 작가의 전시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엑소는 패션 잡지 보그 및 브랜드 구찌와의 컬래버레이션 화보를 진행했다. 화보 속 엑소는 작가가 처음 엑소를 접한 스티커 속 모습과도 비슷하다. 첸, 백현, 시우민은 리본과 러플 장식이 달린 화려한 블라우스를 착용했다. 수호는 비비드한 노란색 티셔츠에 화려한 프린트가 돋보이는 빨간색 점퍼를 걸쳤다.
작가는 화보를 바탕으로 영감을 받아 동그란 캔버스에 엑소 멤버들을 그렸다. ‘더 헌터’ ‘더 러브 송’ 등 멤버별로 상상의 이야기를 덧붙였다. ‘더 헌터’ 속 인물은 나무 뒤에서 얼굴을 살짝 감추고 누군가를 쳐다보는 듯 응시하고, ‘더 러브 송’에는 사랑 가득한 표정의 인물이 보인다.
그런데 각 인물이 엑소 중 누구인지는 따로 설명을 달지 않았다. 엑소의 초상화 전시가 아니라, 경계에 관한 이야기를 들여다 봐주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작가는 “마치 숨은 그림 찾기처럼, 경계에서 줄타기를 하며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작품을 즐겨주길 바란다”고 소감을 전했다. 전시는 갤러리 페로탕에서 4월 8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