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막 내린 제약업계 정기주총…CEO 대규모 물갈이 “왜”
오너 2·3세에 밀려 ‘뒷방 신세’…‘그들만의 잔치’ 언제까지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윤웅섭 일동제약 사장, 허승범 삼일제약 사장, 윤석근 일성신약 부회장, 이윤우 대한약품 회장, 허준 삼아제약 사장, 배건우 대한뉴팜 대표, 황우성 서울제약 회장, 이상준 현대약품 부사장, 김은석 대화제약 사장, 윤성태 휴온스 부회장. 사진 = 각 기업
(CNB저널 = 김유림 기자) 올해 제약업계의 정기 주총은 과거 어느 때보다 인사태풍이 강하게 몰아쳤다. 대표이사부터 주요 임원진까지 대규모 물갈이가 진행되면서 ‘경영승계’와 ‘사업혁신’이라는 두 마리 토끼 잡기에 나선 것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그만큼 비판과 긍정론이 동시에 쏟아지고 있다. CNB가 제약업계 주총 결과를 면밀히 들여다봤다.
대부분의 제약사들은 ‘슈퍼위크데이’로 불리는 3월 17일과 24일에 정기 주총을 마쳤다. 이번 주총의 키워드는 ‘오너가(家) 2·3세의 전면 배치’와 ‘전문경영인들의 교체’로 요약된다. 외부 인사 영입 경쟁이 벌어지면서 기존의 터줏대감 경영인들은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회사를 떠났다.
서울제약은 지난해부터 대웅제약 출신이 대거 영입됐다. 박종전 부회장(R&D 부문), 박재홍 부사장과 안상순 상무(관리부문), 이진호 부사장(생산 부문), 이도영, 홍찬호, 황수헌 이사(영업 및 마케팅 부문) 등 주요 부문을 모두 대웅 출신이 담당하고 있다. 여기에다 지난 24일 주총에서 박종전 부회장, 이진호·박재홍 부사장이 등기이사에도 선임됐다.
▲이번 주총에서 신규이사로 선임된 (왼쪽부터)이정진 종근당바이오 대표, 백승호 JW신약 대표, 박종전 서울제약 부회장, 박재홍 서울제약 부사장 모두 대웅제약 출신이다. 사진 = 각 기업
종근당홀딩스는 2003년부터 전문경영인으로 몸 담아온 김정우 부회장의 임기만료 1년을 앞두고 이병건 전 녹십자홀딩스 대표를 대표이사 부회장으로 맞이했다. 이병건 부회장은 LG연구소, 삼양사 의약사업 본부장, 녹십자 지주사 대표까지 역임한 R&D 전문가다. 또 종근당바이오는 대웅제약 바이오연구소장 출신의 이정진 신임 대표이사를 선임했다.
JW중외그룹은 오너 3세 이경하 회장이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고 전문경영인 대표체제로 탈바꿈했다. 그동안 이경하 회장은 JW홀딩스(지주사)와 JW중외제약(사업회사)의 대표를 겸직해왔지만 사업회사 대표이사직을 내려놓고 JW홀딩스에 집중할 방침이다.
이에 따라 중외제약은 이경하-한성권 공동대표에서 한성권-신영섭 체재로 전환됐다. 계열사 JW신약은 대표이사에 대웅제약 출신의 백승호 부사장을 선임했다. 백승호 대표는 1985년 대웅제약에 입사해 30년 가량 영업과 마케팅 분야 업무를 담당했고, 이후 대웅의 관계사인 한올바이오파마에서 경영관리와 영업 부문을 총괄했다.
동국제약은 이영욱 사장이 임기 2년을 남겨두고 이번 정기 주총을 끝으로 물러나면서 오흥주 사장 단독 체제로 전환됐다. 이영욱 사장은 차바이오텍으로 영입돼 신임 대표이사로 내정된 상태다.
▲(왼쪽부터)이관순 한미약품 전 대표, 우종수 사장, 권세창 사장. 사진 = 한미약품
휴온스그룹은 3개사의 대표이사를 새롭게 맞이했다. 이번 주총에서 휴온스는 R&D 전문가인 엄기안 중앙연구소장(부사장)이, 휴메딕스는 정구완 사장이 새로운 대표 자리에 올랐다. 또 지주사 휴온스글로벌은 윤성태 부회장 단독대표 체제에서 R&D 부문을 총괄해온 김완섭 부사장을 공동대표로 선임했다.
한미약품은 1984년 한미약품에 연구원으로 입사해 2010년 대표이사 사장자리에 오른 후, R&D를 진두지휘하며 신약개발을 주도해왔던 이관순 대표를 전격 교체했다. 최근 한미약품연구센터를 책임졌던 신약 개발 전문가 권세창 부사장과 한미약품의 제제연구 분야와 경영관리 부문을 총괄했던 우종수 부사장을 공동대표 사장으로 선임했다.
“M&A는 할아버지 회사 남에게 넘기는 것”
이 같은 제약업계의 주요 임원 교체를 두고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위기 극복’의 일환이라는 분석이다. 최근 몇 년 전부터 제약업계는 갈수록 심해지는 정부의 약가 인하 정책과 글로벌 제약사들과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변화와 쇄신’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글로벌 제약사들은 ‘과감한 M&A(인수합병)’와 ‘R&D(연구개발) 투자’로 위기를 정면돌파 하고 있다.
‘화이자’의 대표 품목인 센트륨과 챕스틱, 애드빌 등은 2009년 680억달러(약 75조8000억원)에 인수합병한 와이어스의 제품이다. 전문가들은 “와이어스와 합병하지 않았으면 현재의 화이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지난 2015년 3월 서울 양재동 일동제약 사옥에서 열린 제72기 정기 주주총회가 끝난 뒤 녹십자로부터 경영권 방어에 성공한 윤원영 회장이 환한 얼굴로 퇴장하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하지만 이런 경우는 흔치 않다. 창업주의 2·3세에게 회사를 물려주는 문화가 자리잡고 있는 국내 제약사들에게 M&A는 ‘할아버지 회사를 남에게 팔아넘기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2015년 녹십자가 일동제약과의 M&A를 시도했지만, 일동제약 오너 일가의 강력한 반발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당시 녹십자가 일동제약과 합치려 했던 이유는 양사의 주력 사업 품목이 겹치는 부문이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녹십자는 혈액과 백신제제, 일동제약은 일반의약품부터 건강기능식품, 화장품까지 품목이 다양해 양사가 합병했다면 ‘글로벌 제약사’로 거듭났을 것이라는 평이 지배적이었지만, 이를 경영권을 노린 ‘적대적 M&A’로 본 일동 측의 반발로 무산됐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국내 제약사들은 M&A보다는 R&D에 집중하게 됐고, 능력이 검증된 외부 인사 모시기 경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실제 올해 주총에서는 CEO와 임원 뿐만 아니라 중앙연구소장과 고문 자리에 신약개발 전문가들이 대거 영입된 것으로 알려졌다.
▲(왼쪽부터)류덕희 경동제약 회장과 그의 장남 류기성 부회장, 정도언 일양약품 회장과 장남 정유석 전무이사. 사진 = 각 기업
‘위기돌파’ 속내는 지배력 강화
이번 교체 바람이 경영권 승계 작업과 무관치 않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자기 세력을 구축해야 하는 젊은 오너들이 ‘혁신’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대대적인 물갈이를 진행했다는 것이다. 40대 중반의 회장이 등장하면 50대 이상 경영진들은 버틸 방법이 없다. 부장급부터 대표이사까지 대대적인 개편이 뒤따르며 주요 간부들의 평균 연령은 순식간에 낮아지게 된다.
실제로 지난해 연말부터 오너 자녀의 승진 소식이 잇따라 전해졌으며, 이번 주총에서도 실적 및 배당, 주가 등락 여부보다 ‘젊은 사장님’의 경영권 강화가 피날레를 장식했다.
▲(왼쪽부터)허일섭 녹십자홀딩스 회장, 허은철 녹십자 사장, 허용준 부사장. 사진 = 녹십자
녹십자홀딩스는 주총에서 오너 3세 허용준(43) 부사장을 사내이사로 신규 선임했다. 그의 형은 허은철(45) 녹십자 사장이며, 숙부는 허일섭 녹십자 회장이다. 허 부사장의 등기임원 등재가 마무리 되면서 녹십자는 ‘가족경영’ 체제가 더 확고해졌다.
동아쏘시오홀딩스는 오너 3세 강정석(52) 회장 취임 이후 첫 주주총회를 진행했다. 지난 1월 1일자로 승진한 강 회장은 직접 주주들을 챙기는 등 ‘강정석 체제 굳히기’에 나섰다. 경동제약은 대표이사 임기가 만료된 남기철 사장을 재선임하지 않고, 류덕희 회장과 그의 장남 류기성(35) 부회장 체제로 전환하며 경영권 대물림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일성신약은 윤석근 부회장의 아들들인 윤종호(34)·종욱(31)씨의 사내이사 신규 선임 건을 통과시켰다. 종호씨는 현재 비서실에서 임원 총괄 업무를, 종욱씨는 회사에서 기획을 담당하고 있다. 한미약품은 창업주 임성기 회장의 차남인 임종훈(40) 전무가 등기임원에 이름을 올렸다. 오너 2세 중 장남인 임종윤(45) 한미사이언스 대표이사에 이어 두 번째 등재다.
▲(왼쪽부터)조아제약의 창업주 조원기 회장, 장남 조성환 부회장과 차남 조성배 사장. 사진 = 조아제약
대한약품은 창업주 고 이인실 회장의 손자이자 이윤우 회장의 아들인 이승영(44) 이사가 새로운 사내이사에 선임됐다. 조아제약은 창업주 조원기 회장의 장남 조성환(47) 부회장과 차남 조성배(45) 사장이 나란히 신규 이사로 선임됐다.
이밖에 윤웅섭(49) 일동제약 사장, 허승범(35) 삼일제약 사장, 허준(46) 삼아제약 사장, 강원호(42) 유나이티드제약 대표, 배건우(56) 대한뉴팜 사장, 김은석(42) 대화제약 사장, 황우성(49) 서울제약 회장, 정유석(42) 일양약품 전무이사, 이상준(41) 현대약품 부사장 등 오너 2·3세 모두 사내이사로 재선임하는 안건이 통과됐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D제약사는 몇 년 전 50대 오너가 등장하면서 능력과 무관하게 50대 중반이상 임원들 대부분이 짐을 싸고 경쟁사로 이직했다”며 “희망퇴직과 명예퇴직은 수개월전 예고하는 절차라도 있지만, 젊은 사장이 등장했다는 이유로 수십년 간 기업을 지켜왔던 전문경영인들이 우후죽순 갑자기 짐을 싸는 건 아직도 제약업계가 폐쇄적인 문화에 갇혀있음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유림 기자 babsigy@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