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주의 나홀로 세계여행 - 라트비아 리가 → 리투아니아 빌니우스] 유대인 수난사 간직한 아름다운 발트 3국
(CNB저널 =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13일차 (탈린 → 라트비아 리가)
역사가 비슷한 발트 3국
리가(Riga)까지 328km, 출발 세 시간만에 국경에 닿지만 발트 3국은 쉥겐(Schengen) 지역이라서 버스는 출입경 절차 없이 그대로 지나친다. 곧 발트 해를 다시 만난다. 바닷물이 넘칠 듯 차창 가까이서 찰랑거린다. 라트비아(Latvia)는 평균 해발 고도 100m의 저지대 국가다. 이웃 나라 에스토니아처럼 라트비아도 독일, 스웨덴, 러시아로 주인만 바뀌는 외세의 지배를 오랫동안 받은 나라다. 특히 나치와 러시아의 압제에 큰 희생을 치렀다. 나치는 라트비아 인구의 절반을 희생시키겠다며 인종 청소를 단행했다. 나치 점령 기간 중 20만 명의 라트비아인(7만 5천 명의 유대인 포함)이 희생됐고, 소비에트 시절에는 14만∼19만 명의 라트비아인들이 시베리아 유형소에 보내졌다. 1991년 독립했고 2004년에 EU에 가입했다. 남한의 2/3 정도 면적에 인구는 207만으로 이중에는 러시아인의 비율이 27%로 상대적으로 높다.
발트의 십자로 리가
라트비아 수도 리가는 활기차다. 교통의 십자로답게 버스, 열차, 항공기들이 다 모인다. 국제버스는 동쪽으로는 모스크바까지, 남쪽으로는 유럽 전역을 들고 난다. 그 버스를 타고 세계의 젊은이들이 다 몰려드는 낭만 넘치는 인구 70만의 도시다. 숙소에 짐을 풀고 올드 타운부터 탐방을 시작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네오클래식, 고딕, 바로크, 르네상스 양식까지 내가 아는 모든 건축 양식의 융합 결정판을 계속 만난다. 아무리 변방이라도 역시 유럽은 유럽이다. 한 골목 돌아 나오면 다음 골목에 또 어떤 황홀경이 기다리고 있을지 예측하기 어렵다.
▲역을 지나 시장 뒤 초대형 소비에트 건물에는 과학 아카데미가 입주해 있다. 흉하지만 거대함에 놀라 한참을 올려다본다. 사진 = 김현주
리가 명소들 1
성요한교회(St. John’s Church)는 겉으로는 고딕 첨탑 이외에는 평범해 보인다. 하지만 죽음과 부활, 승천 예수를 묘사한 성당 내부 제단이 화려하다. 장중한 음악을 연주하는 대형 오르간이 특히 인상적이다. 가까운 곳에는 리가에서 가장 오래된 성베드로 교회(St Peter’s Church)가 있다(1209년 건립). 이어서 타운 홀 광장에 들어서니 화려하게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즐비하게 서 있다. 다우가바(Daugava) 강가로 나간다. 강 건너편으로는 국립도서관의 초현실주의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페리 터미널에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막 도착한 크루즈선이 방문자들을 쏟아낸다.
강제 병합 박물관
시내로 돌아오는 길에 강제 병합 박물관(Occupation Museum)에 들른다. 나치 점령(1941~1945), 소비에트 점령(1940, 1945~1991) 시절의 잔혹상에 대한 솔직한 기록이다. 1940년 우호조약을 내세워 들이닥친 소비에트에게 선택의 여지없이 땅을 내주는 것을 시작으로 전쟁 후 소련군 재진입과 압정을 기록했다. 나치 점령 시에는 라트비아 유대인의 85%가 희생된 사실, 두 차례에 걸친 애국지사 투옥 및 시베리아 유형소 강제 이송의 역사는 나에게는 새로운 사실이다.
▲리가의 올드 타운. 네오클래식, 고딕, 바로크, 르네상스 양식까지 내가 아는 모든 건축 양식의 융합 결정판을 계속 만난다. 사진 = 김현주
▲타운 홀 광장에 들어서니 화려하게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즐비하게 서 있다. 사진 = 김현주
리가 명소들 2
리가 시내의 중심은 누가 뭐래도 프리덤 모뉴먼트(Freedom Monument)다. 이 도시, 이 나라의 상징이다. 뙤약볕 아래 근위병들이 서 있지만 미동도 없다. 올드 타운 중심에는 파우더 타워(Powder Tower)가 있다. 리가의 요새 중 하나로서 성곽 도시의 주요 관문이다. 한참을 머물게 하는 대길드와 소길드(동업자 조합), 쉬지 않고 등장하는 화려한 건축물 덕에 오후 반나절 도시 탐방이 바쁘게 이어진다. 길드 광장, 돔 광장, 돔(Dome) 성당 등 일찍이 다른 데서 본 적이 없는 건물들을 넋을 잃고 감상한다. 역을 지나 시장 뒤 초대형 소비에트 건물에는 과학 아카데미가 입주해 있다. 흉하지만 거대함에 놀라 한참을 올려다본다.
▲리가 시내의 중심은 누가 뭐래도 프리덤 모뉴먼트(Freedom Monument)다. 사진 = 김현주
▲빌니우스 거리의 그래피티. 방치했으면 흉했을 도시의 회색 담벼락이지만 거리 예술가들의 그래피티 작업으로 그나마 도시가 산뜻해졌다. 사진 = 김현주
탈린 vs 리가
뿌듯한 마음으로 리가에서의 하루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니 2층 발코니에 작은 파티가 열리고 있다. 세계 각국 젊은이들이 모이는 게스트하우스에는 매일 저녁 파티가 열린다. 나도 젊은 한 때로 돌아가 본다. 여행의 즐거움을 잘 아는 듯 수십 개의 언어로 오가는 대화를 통해 서로 젊음을 공유한다. 나도 그 모임에 끼어 여행 이야기, 인생 이야기, 세상 이야기를 나눈다. 세상 곳곳을 다녀 본 사람들이라 사고도 열려 있어서 대화는 허물없이 통한다. 관광객들이 너무 많이 모여들어 산만해진 이웃 탈린에 비하면 리가는 소박하지만 즐거운 해방 공간이다.
14일차 (라트비아 → 리투아니아 빌니우스)
발트 이웃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리투아니아
독특한 위치와 역사적 조건이 만들어낸 발트 3국의 두 도시를 지났다. 큰 기대를 하지 않은 채 그저 유럽의 변방이겠거니 찾았던 두 도시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몇 배로 보답해 주었다. 발트의 또 다른 나라 리투아니아(Lithuania)는 어떤 모습일까? 버스가 떠나기 전부터 설렌다. 인구 219만, 리투아니아인 84%로 발트 해 국가 중에서 가장 동질적인 민족 구성을 보인다. 북쪽으로는 라트비아, 동남쪽으로는 벨라루스(Belarus), 남쪽으로는 폴란드, 남서쪽으로는 러시아 영토 칼리닌그라드가 둘러싸고 있다. 14세기 리투아니아 대공국 시절에는 대영토를 소유하기도 했으나 이후 열강의 영토 분할 단골 메뉴가 돼 버렸다. 다른 발트국가처럼 나치와 소비에트의 폭압에 많은 희생을 치렀다.
▲올드 타운 중심에는 파우더 타워(Powder Tower)가 있다. 리가의 요새 중 하나로서 성곽 도시의 주요 관문이다. 사진 = 김현주
▲빌니우스에서 가장 많은 방문객들이 찾는 곳은 학살 희생자 박물관(Museum of Genocide Victims)이다. 나치보다 소비에트의 박해로 인한 희생이 훨씬 더 컸던 만큼 KGB 박물관으로도 불린다. 사진 = 김현주
에코라인 버스
에코라인 버스로 리가를 출발한다. 발트, 동유럽, 러시아 여행은 에코라인 버스가 최고다. 온라인 예약이 되므로 나는 한국에서 이미 예약 발권은 물론 좌석 지정까지 해놓았다. 리투아니아 수도 빌니우스(Vilnius)까지 309km, 도로는 리투아니아에 들어와서 편도 2차선으로 넓어진다. 네 시간 주행 끝에 버스는 빌니우스에 입성한다. 다른 발트 국가 수도와는 달리 내륙도시다.
걷기에 딱 좋은 발트 도시들
숙소에 짐을 던져 놓고 도시 탐방에 나선다. 오늘도 도보로 도시를 탐방할 예정이다. 발트 3국의 수도들은 도시 규모가 콤팩트하여 웬만한 주요 방문지들은 대부분 도보 이동이 가능하다. 리투아니아 거리에는 낡은 버스와 트롤리가 다니는 등 소비에트 흔적이 많다. 방치했으면 흉했을 도시의 회색 담벼락에 거리 예술가들이 그래피티(graffiti) 작업을 해놓은 덕에 그나마 도시가 산뜻해졌다.
유대인 관련 박물관들
먼저 유대인 박물관에 들른다. 유대인 문화와 종교, 정체성과 편견, 진실과 오해, 반유대주의(Anti-Semitism)와 나치의 박해 등을 체계적으로 설명한다. 나치 시절 리투아니아 유대인의 90%가 학살당하는 등 유대인 공동체가 사라질 뻔 했다. 그런 사연들을 파악하고 나니 박물관 이름을 왜 ‘관용 센터’(Tolerance Center)라고 지었는지 분명히 개념이 잡힌다.
의인 일본 외교관 스기하라
도시에는 유대인 학살 관련 박물관이 더 있다. 홀로코스트 박물관(Holocaust Museum)은 리투아니아 유대인의 참담한 수난에 대한 기록을 전시했다. 일본인 외교관 스기하라(杉原)에 관한 기록이 번쩍 눈에 띈다. 이른바 홀로코스트 의인(義人)으로서 나치의 학살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본국 정부의 비협조 또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2천 건의 통과 비자를 발급하여 유대인들이 일본을 통해 제3국으로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파견 기간이 끝나고 본국에 돌아간 후 그는 외교관에서 해임되었다고 한다. 박물관 앞마당에는 그를 기념하는 돌조각상이 서있다. 소비에트 시절에도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는 여전해서 더러는 시베리아 비로비잔 유대인 자치주로 소개되기도 했다.
▲KGB 박물관의 도감청실. KGB, 즉 구소련 국가보안위원회(State Security Committee)의 악명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사진 = 김현주
▲홀로코스트 의인으로 불리는 일본인 외교관 스기하라의 공적비. 사진 = 김현주
학살 희생 박물관
마음을 가다듬으러 타우루스(Taurus) 언덕 위 전망대에 오른다. 언덕에는 흉한 소비에트 건물이 하나 서있으나 높은 언덕 위에서 보이는 도시 전경은 일품이다. 이 도시에서 가장 많은 방문객들이 찾는 곳은 학살 희생자 박물관(Museum of Genocide Victims)이다. 나치보다 소비에트의 박해로 인한 희생이 훨씬 더 컸던 만큼 KGB 박물관으로도 불린다. 과거 나치와 소련 비밀경찰 KGB가 사용했던 건물을 박물관으로 꾸몄다. 희생자들의 사진으로 가득 채운 입구부터 분위기가 스산하다.
일명 KGB 박물관
지하 취조실과 감옥, 감도청실의 미로 구조가 음습하기 짝이 없다. 우리나라 서울 독립문역사공원(구 서대문형무소)을 생각나게 한다. 1940년 6월 소비에트 점령 초기에 29명, 그리고 1944~1947년 677명, 그리고 1950년 이후 242명의 리투아니아인들이 이곳에서 사라져 갔다. 20만 명을 수감했고 그중 13만 명은 소련 각지의 강제노동 유형소로 보내졌다. 수감 중 사망자 2만∼2만 5천 명, 유형소 사망자 2만 8천 명… 참혹하다. 발트의 슬픈 역사를 이곳에 와서 직접 보고서야 깨닫게 됐다. KGB, 즉 구소련 국가보안위원회(State Security Committee)의 악명을 눈으로 확인한다.
(정리 = 윤하나 기자)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babsigy@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