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에 위치한 엔씨소프트. 사진 = 박현준 기자
(CNB저널 = 유경석 기자) 초연결(hyperconnectivity)과 초지능(superintelligence)이 특징인 제4차 산업혁명. 인공 지능(AI), 사물 인터넷(IoT), 클라우드 컴퓨팅, 빅데이터, 모바일 등 지능정보기술이 기존 산업과 서비스에 융합되거나 3D 프린팅, 로봇공학, 생명공학, 나노기술 등 여러 분야의 신기술과 결합돼 실세계 모든 제품·서비스를 네트워크로 연결하고 사물을 지능화한다. 하지만 발목을 잡는 복병이 도사리고 있다. 대·중소기업 간 불공정 계약 관행이다. 정부가 앞장서 하도급 불공정 행위를 집중 점검하고 있지만 불공정 거래 관행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융·복합 현상으로 대표되는 제4차 산업혁명시대를 맞아 새로운 형태의 하도급거래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기존 하도급 불공정 관행을 근절하지 못하면 4차 산업혁명의 새싹을 틔울 수 없을 것이라는 위기감이 커지는 배경이다. 현재 정부와 정치권 등은 대·중소기업 간 불공정 거래 관행을 근절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대·중소기업 간 하도급 불공정 행위에 대한 자율 개선이 선행되지 않으면 공염불에 그칠 수 있다. 공정거래위원회에 적발된 불공정 관행 사례가 씁쓸한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하도급 불공정 관행을 끊고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할 수 있을까.
하도급 불공정 행위는 산업 전 분야에 폭넓게 퍼져있다. 특히 4차 산업혁명의 한 축인 정보통신기술(ICT) 등 업종에서 관행이 돼 중소기업의 기술개발과 전문인력 유지를 어렵게 하고 있다.
㈜카카오는 2014년 6월부터 12월까지 약 6개월 동안 7개 하도급 업체에 모두 27건의 카카오 프렌즈 상품의 제조를 위탁하면서 하도급 대금과, 그 지급 방법 등을 기재한 서면을 발급하지 않았다고 공정위는 밝혔다. 카카오톡은 메신저 서비스를 쉽고 재미있게 다가가기 위해 만든 캐릭터 상품이다.
㈜엔씨소프트는 2014년 3월부터 2016년 4월까지 약 2년 동안 30개 수급 사업자에게 모두 116건의 온라인 게임의 그래픽 제작 및 온라인 게임에 등장하는 캐릭터 상품의 제조를 위탁하면서, 이에 대한 서면을 발급하지 않거나 계약 체결 이후에 발급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자동차·건설·전자전기·의류산업·소프트웨어(SW)·유통 등 업종 불문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한진’에 소속된 회사로, 시스템 통합(System Integration, SI)업체인 한진정보통신(주)은 하도급 대금 지연이자 1333만 원을 지급하지 않고 사업자 43곳의 서면 64건을 지연 발급했다. 한국타이어에 소속된 회사인, 시스템 통합업체인 ㈜엠프론티어도 하도급 대금 지연이자 6812만 원 등 총 2억 266만 원을 지연지급하고, 사업자 49곳에 대해 서면 미발급 77건, 지연 발급 11건 총 88건을 위반했다.
우리산업㈜은 에어컨 부품을 제조하여 만도, 델파이(Delphi) 등 국내외 주요 업체에 납품하는 자동차 부품 제조 사업자다. 우리산업은 2015년 4월부터 2016년 2월까지 26개 수급 사업자에게 인쇄 회로 기판(PCB) 등을 제조 위탁하고 하도급 대금 286억 원을 어음으로 지급하면서 어음 할인료 3억 4554만 원을 지급하지 않았다.
전기기기·부품, 변압기 등 제조 및 전기공사 등으로 2015년 기준 6851억 3800만 원의 매출액을 기록한 일진전기는 111개 수급 사업자에게 전기 기기 제조나 전기 공사를 위탁하고, 2014년 1월부터 2016년 2월까지 그에 따른 하도급 대금을 뒤늦게 현금·외상 매출 채권 담보 대출로 지급하면서 총 5억 8047만 원의 지연이자와 수수료를 주지 않았다.
㈜동아엘텍은 2014년 7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오디아이 등 2개 수급 사업자에게 액정표시장치(LCD) 검사 장비 등을 제조 위탁하고, 목적물 등을 수령한 후 하도급 대금 12억 8200만 원을 결제하지 않았다. 또 같은 기간 동안 수급 사업자인 ㈜오디아이 등 2개 수급사업자에게 액정표시장치(LCD) 검사 장비 등의 제조를 위탁하고, 지급기일을 넘겨 지급한 하도급대금 1억 5585만 원에 대한 지연이자 161만 원을 비롯해 하도급 대금 약 129억 원에 대한 어음 대체 결제 수수료 1억 3160만 원을 송금하지 않았다.
끊이지 않는 대·중소기업 간 불공정 하도급 관행
건설업은 하도급 불공정 행위의 온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건물의 완공까지 공정이 복잡하고, 참여 기업 역시 많은 탓이다. ㈜부영주택은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인 부영에 소속된 회사로, 2014년 7월부터 2015년 12월까지 광주전남혁신 B3블럭의 부영아파트 건설 공사 등 26개 공사 현장에서 131개 하도급 업체에 하도급 대금, 지연이자, 어음 대체 결제 수수료 등 모두 5억 2800만 원을 지급하지 않았다.
▲서울시 중구 서소문동에 위치한 부영 빌딩. 사진 = 박현준 기자
부영주택은 부영아파트, 부영호텔 등 신축·대수선 공사를 하고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준공 검사를 받았으면서도 하도급 업체에는 정산 또는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았다는 이유 등으로 하도급 대금 등을 지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처럼 부영주택이 지급하지 않은 금액은 하도급 대금 2억 4793만 원, 지연이자 1억 4385만 원, 어음 대체 결제 수수료 1억 3624만 원 등 모두 5억 2803만 원에 달했다고 공정위는 밝혔다.
㈜포스코아이씨티는 2014년 7월부터 2015년 6월까지 브라질 CSP MES 설비 구축 등과 관련해 16개 하도급 업체에 하도급 대금 5392만 원, 지연이자 3억 8862만 원 등 모두 4억 4254만 원을 지급하지 않았다. 또 성능유보가 설정된 특약 조항을 이유로 목적물을 수령하고도 수령일로부터 605일~760일 동안 하도급 대금 5392만 원을 결제하지 않았다.
두산중공업㈜은 2011년 1월부터 2013년 10월까지 82개 수급 사업자와 최저가 경쟁 입찰로 117건의 하도급 계약을 체결하면서 자신의 원가 절감을 위해 정당한 사유 없이 추가 입찰을 통해 최저가 입찰 금액보다 총 4억 2167만 원 낮게 하도급 대금을 결정했다. 최저 입찰 금액이 자신이 사전 설정해 놓은 구매 예산 범위에 해당해 추가 입찰의 대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추가 입찰을 실시해 당초 최저 가격으로 입찰한 금액보다 낮은 금액으로 하도급 대금을 결정한 것이다. 특히 내부 관련 부서가 작성한 ‘입찰 행위가 법 위반 소지가 높다’는 내부 문건이 발견돼 사전에 하도급법 위반이 될 수 있음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공정거래위원회 조사가 이루어질 때까지 이를 시정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1999년 벽산그룹에서 계열 분리된 벽산엔지니어링(주)은 2015년 시공능력평가액이 1288억 8400만 원 규모의 토목건축공사업·산업설비공사업 등을 영위하는 사업자로, 2014년 7월 1일부터 2015년 12월 31일까지 하도급 대금 1650만 원을 법정 지급 기일 내에 지급하지 않았다. 또 같은 기간 동안 수급 사업자에게 하도급 대금을 법정 지급 기일이 경과한 후 지급하면서 초과 기간에 대한 지연이자 1187만 원을 미지급했다.
한일중공업(주)은 2015년 2월 수급 사업자에게 구조용 강재를 제조위탁한 후 2015년 5월과 2015년 6월 목적물을 납품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급 기일인 45일이 지나도록 하도급 대금 3억 3690만 원을 주지 않았다. 또 2015년 4월 목적물을 납품받고 하도급 대금을 수령일로부터 60일이 경과한 후 지급하면서 초과 기간에 따른 이자 39만 원을 지급하지 않았다.
중흥종합건설(주)은 2013년 1월 1일부터 2015년 7월 31일까지 100개 수급 사업자에게 건설 공사 등을 위탁하고 하도급 대금을 만기일이 목적물 수령일부터 60일을 초과하는 어음으로 지급하면서 초과 기간에 대한 어음 할인료 20억 4174만 원을 지급하지 않았다. 또 같은 기간 동안 16개 수급 사업자에게 레미콘 등을 제조 위탁하고 납품 대가인 하도급 대금 5억 911만 원을 비롯해 지연이자 9054만 원을 모른 체 했다.
팔 걷어붙인 공정위, 하도급대금 지급관리시스템 행정예고
현재 정치권은 대·중소기업 간의 불공정 계약 관행을 근절하기 위한 하도급법 개정안을 활발하게 발의하고 있다, 정부 역시 중소기업의 경쟁기반을 확충하는 한편 거래관행의 자율적인 개선을 유도하기 위해 정책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올해 공정거래위원회는 업종을 선별해 하도급대금을 미지급하거나 부당하게 대금을 감액하는 행위, 부당한 위탁의 취소, 부당한 반품 등 3대 하도급 불공정 행위를 집중 점검하고 있다.
하지만 정치권과 정책당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공정 거래 관행은 계속되고 있다. 특히 4차산업을 주도할 것으로 에상되는 자동차·건설·전자전기·의류산업·소프트웨어(SW)·유통 등 많은 분야에서 하도급대금 미지급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최근 하도급법 시행령 개정 후속조치로 건설위탁 분야에서 원사업자의 하도급대금 지급보증의무가 면제되는 하도급대금 지급관리시스템을 지정하는 고시 제정(안)을 마련하고 5월 29일까지 행정예고했다. 이 기간 국민은 누구라도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
상생결제시스템 결제대금예치계좌 운영을 골자로 한 하도급대금 지급관리시스템은 발주자가 하도급대금, 자재·장비대금 등을 대·중소기업협력재단 예치계좌에 이체하면, 원사업자를 거치지 않고 각 대금의 지급기일에 수급사업자, 자재·장비업체에게 지급되는 절차를 거치게 된다.
상생대기업의 신용으로 2차 이하 단계의 협력기업들이 낮은 금융비용으로 납품대금을 조기 현금화할 수 있고, 안전하게 대금을 회수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기업 간 결제방법이다. 공정위는 행정예고 기간 중에 의견이 제시되는 경우 면밀하게 검토하고 필요한 경우 이번 제정(안)을 보완해 공정위 전원회의 심의 등을 거쳐 오는 6월 28일부터 시행할 계획이다.
정치권 역시 현재와 같은 하도급 불공정 행위가 계속될 경우 4차 산업혁명에 연착륙할 수 없을 것으로 보고 대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자유한국당 김종석 국회의원(비례대표)도 최근 국회에서 ‘상생협력을 위한 하도급거래의 제도개선과 발전방향’을 주제로 정책토론회를 개최했다.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융·복합 현상으로 대표되는 제4차 산업혁명시대를 맞아 새로운 형태의 하도급거래가 등장하고 있지만 이러한 유형의 거래들은 현행 하도급법의 적용을 받지 못하는 등 제도적 보완이 시급하기 때문이다. 이날 토론회는 학술적인 차원을 넘어 구체적인 제도적 대안에 대한 논의가 진행돼 눈길을 끌었다.
▲지난달 11일 국회의원회관 제2세미나실에서 열린 상생협력을 위한 하도급거래의 제도개선과 발전방향 정책토론회 모습. 사진 = 김종석 국회의원실
토론에 나선 한국경제연구원 신석훈 연구위원은 “대·중소기업 간 거래는 법적으로 사적 계약관계이고, 경쟁과 무관한 우월적 지위남용행위의 통제는 사법(私法)인 민법의 역할”이라고 전제한 후 “현행 사전적 행정제재 중심의 체제에서 사전적 자율규제 강화, 사후적 민사구제 강화, 사후적·대안적 분쟁해결절차(ADR) 강화로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공정거래위원회 정진욱 기업거래정책국장은 “4차 산업혁명은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융·복합 현상으로 대변되는 것이 특징인데, 이런 새로운 유형의 하도급거래를 하도급법의 적용대상에 포함시키는 방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할 것”이라며 “하도급법의 공적 집행을 보완하는 징벌적 손해배상제 확대, 집단소송제 도입, 사인의 금지청구제 도입에 대해서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홍대식 교수도 “하도급법 적용대상 범위를 열거주의에서 포괄주의 방식으로 전환할 경우 오히려 규제로 인해 거래활성화나 소비자 보호가 저해되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며 신중한 접근을 주문했다.
김종석 국회의원은 “하도급거래는 대기업의 지배적지위 남용이 늘 존재하는 영역이다. 부당하게 대금을 감액하거나 부당한 반품을 하는 등 불공정 행위를 감시해오고 있지만 아직도 미흡한 점이 많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라며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이해 하도급거래가 새로운 형태로 진화하고 있는데, 이러한 유형의 거래들은 현행 하도급법의 적용을 받지 못하고 있다. 시장과 기술의 진화에 하도급법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제도 개선의 필요성을 시급하다”고 조속한 해결을 촉구했다.
유경석 기자 kangsan069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