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재벌개혁 시대 개막…재판 중인 총수들은?
文 대통합 선언에 안도…사면은 ‘글쎄요’
▲문재인 대통령과 영부인 김정숙 여사가 5월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 로텐더홀에서 제19대 대통령 취임식을 마친 직후, 환영하는 시민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CNB저널 = 도기천 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첫 일성에서 ‘대통합’을 공표하면서 재계가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다. 재벌개혁이 적폐청산의 0순위로 예고된 상황에서 문 대통령이 국민통합을 강조한 만큼 일단 최악의 상황은 피했다는 분위기다. 특히 총수가 법정을 오가고 있는 기업들은 향후 재판에 미칠 영향과 더 나아가 사면 가능성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이들의 기대대로 가줄까.
탄핵과 조기대선의 원인이 박근혜-최순실과 재계의 ‘정경유착’에서 비롯됐다는 점에서 그동안 재계는 마음을 졸여왔다.
최순실씨가 실소유주인 K·미르스포츠재단에 출연한 기업은 총 53곳으로 출연금 규모는 774억원에 달한다. 삼성 204억, 현대차 128억, SK 111억, LG 78억, 포스코 49억, 롯데 45억, GS 42억, 한화 25억, KT 18억, LS 16억, CJ 13억, 두산 11억, 한진 10억, 금호아시아나 7억, 대림 6억, 신세계 5억, 아모레퍼시픽 3억, 부영 3억 등이다. 이 중 상당수 기업은 검찰과 특검 수사를 번갈아 받는 등 지난 6개월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문 대통령은 조기대선 정국에서 “재벌이 경제성장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며 재벌개혁 의지를 여러 번 밝힌 바 있다.
하지만 10일 대통령 취임식에서 ‘국민께 드리는 말씀’을 통해 “저를 지지하지 않았던 국민 한분 한분도 저의 국민이고 우리의 국민”이라며 오늘부터 저는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밝혔다. “오늘이 국민통합의 시작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고도 했다. 후보 시절 외쳤던 ‘적폐청산’ ‘재벌개혁’은 한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대통합·대탕평을 국정운영의 가장 중요한 화두로 제시한 것이다.
경제수장 온건파 등용 ‘환영’
이를 두고 재계는 내심 반기는 분위기다. 한 대기업 고위 관계자는 CNB에 “시장주의자인 문 대통령이 무리하게 (재벌개혁을) 밀어붙이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여권의 핵심관계자는 “재벌의 편법·불법 행위에 대해서는 현행법만 잘 가동해도 충분히 제재가 가능하다. 다만 입법이 필요한 부분은 우리(민주당) 의석 만으로는 표결이 불가능한 만큼 우선 연정(대통합)을 통해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하겠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구속 기소된 박근혜 전 대통령(왼쪽)과 최순실. 사진 = 연합뉴스
문 대통령이 속한 더불어민주당의 의석수가 119석(전체의석의 39.8%)에 불과해 단독으로 개혁법안을 추진하긴 사실상 힘든 상황이다. 초대 총리에 이낙연 전라남도 지사를 지명한 것도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는 국민의당과의 연정을 염두에 둔 포석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취임 첫날 야당 당사(자유한국당, 국민의당, 바른정당, 정의당)부터 방문해 협조를 구한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따라서 우선은 공정거래위원회, 국세청 등 사정기관을 통한 규제를 강화하되 개혁입법은 시간을 두는 투트랙 전략이 구사될 것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재벌 입장에서는 상당한 시간을 벌게 된 셈이다.
내친김에 사면까지? 기대감 솔솔
재계는 한발 더 나아가 기업인 사면 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있다. 과거 정부들이 집권 초기에 대사면을 단행한 전례가 있는데다 문 대통령이 대탕평과 경제살리기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역대 대통령들은 대부분 집권 초기에 대규모 특사를 실시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80년 9월 516명을 사면한 데 이어, 이듬해 대통령에 재취임한 것을 기념해 3230명을 추가로 사면·감형·복권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88년 취임 기념으로 6375명을 특별사면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3년 취임 직후 역대 최대 규모인 4만913명을,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8년 취임 기념으로 3만4803명에 대한 특사를 각각 단행했다.
특히 문 대통령의 정신적 멘토인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집권 시절 친기업적 행보를 보인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법무부 통계에 따르면, 참여정부 시절 ‘경제인’으로 사면된 이는 230명에 이른다. 이명박 정부 때는 107명, 박근혜 정부에서는 28명만이 경제인 자격으로 사면을 받았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이 죄지은 기업인에 대해 후했던 배경에는 지금의 문 대통령과 같은 대통합 정책이 있었다. 재계가 문재인 정부에게 거는 기대가 클 수밖에 없는 이유다.
경제사렵탑인 경제부총리에 비교적 중도적인 노선을 취해온 인물들이 거론되고 있는 점도 고무적이다. 더불어민주당 국민성장위원회 상임위원인 조윤제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 문재인 대선 캠프 비상경제대책단장인 이용섭 전 의원 등이 하마평에 오르고 있다.
조 위원은 금융전문가로 문재인 선거캠프의 싱크탱크 역할을 해온 정책공간 ‘국민성장’의 소장을 맡고 있다. 이 단장은 재경부 세제실장, 국세청장 등을 거친 관료 출신으로 참여 정부에서 행정자치부 장관, 건설교통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이밖에 거론되고 있는 김광두 전 국가미래연구원장, 김진표 전 부총리, 임종룡 금융위원장도 모두 시장친화적인 인물들이다.
朴·崔와 엮인 삼성·롯데
현재 재계 서열 20대 그룹 중에서 총수가 재판을 받고 있는 곳은 삼성, 롯데, 효성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지난 2월 뇌물공여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된 상태다. 검찰은 삼성이 최순실씨가 실소유주인 미르·K스포츠재단에 건넨 298억원을 ‘뇌물’로 보고 있다. 자금 출연의 대가로 청와대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국민연금을 통해 도움을 줬다는 게 검찰 주장이다.
롯데는 K스포츠재단에 ‘하남시 복합체육시설 건립’ 명목으로 70억원을 추가로 지원했다가 검찰의 압수수색 직전에 돈을 돌려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은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을 뇌물공여 혐의로 불구속 기소한 상태다. 신 회장은 이와 별개로 신격호 롯데 총괄회장의 탈세혐의와 관련된 재판도 받고 있다.
▲지난해 12월 6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국회청문회에 출석한 기업총수들이 증인선서를 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회장, 조양호 한진그룹회장, 신동빈 롯데그룹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최태원 SK대표이사, 김승연 한화그룹회장, 구본무 LG 대표이사, 손경식 CJ 회장. 사진 = 연합뉴스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는 연루되지 않았지만, 회사 내에서 발생한 탈세, 배임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1심에서 징역 3년 및 벌금 1365억원을 선고받은 바 있다. 현재 불구속 상태에서 항소심 재판을 받고 있다.
이 중 삼성과 롯데는 박근혜 전 대통령과 운명을 같이 하고 있다. 뇌물죄는 ‘받은 사람과 준 사람’ 모두 처벌하는 쌍벌죄다. 검찰은 박 전 대통령과 최씨를 ‘경제공동체’로 판단하고 있다. 박 전 대통령과 최씨가 공모해 이들 기업의 뒤를 봐주고 뇌물을 수수한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박 전 대통령과 이재용·신동빈 회장은 서로 같이 묶인 처지다.
사면, 文보다 朴 하기 나름
하지만 기업인에 대한 대규모 사면이 실제로 단행될 지는 단언하기 힘들다. 문 대통령은 대선 정국에서 재벌 총수의 사면에 대해 “반시장범죄를 저지른 재벌은 엄벌해야 한다. 사면권은 국민의 뜻에 어긋나지 않게 행사 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스스로 사면권을 제한하겠다고 해놓고 입장을 뒤집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촛불민심이 여전히 재벌을 적폐청산의 대상으로 보고 있는 점도 부담이다.
설령 문 대통령이 기업인 사면에 나서더라도, 현재 재판 중인 재벌총수들이 수혜를 입게 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사면은 형이 확정된 이후에 대통령의 권한으로 행사할 수 있는 제도다. 박 전 대통령과 총수들의 재판이 1심도 끝나지 않은 상황인 점을 감안하면, 취임 기념 특사는 이미 물 건너갔다. 8.15특사 또한 재판 일정상 힘들어 보인다.
그나마 내년 3.1절 특사 정도는 기대해볼만하지만 관련자들이 1심 재판결과에 승복했을 경우다. 항소를 포기해 형이 확정되면 사면논의가 급물살을 탈 수도 있지만, 피의자들이 끝까지 법정 다툼에 나선다면 대법원 판결 이후에나 사면설이 회자될 수 있는 상황이다.
도기천 기자 babsigy@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