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7호 김광현⁄ 2017.05.25 16:50:27
직장인 정 모 씨(서울 관악구)는 휴식 시간이면 영등포의 롯데마트 서울양평점(이하 양평점)을 찾는다. 쇼핑이 아니라 쉬기 위해서다. 그뿐 아니라 인근 직장인들은 음료를 사야 매장 이용이 가능한 일반 카페와는 달리 '그냥' 쉴 수 있는 롯데마트 양평점 1층을 자주 찾는다.
마트가 변하고 있다. 더 많은 물건을 팔기 위해 매장을 뺏빽하게 채우기만 하는 게 아니라 "놀러 오라"며 매장 한가운데를 휴식 공간으로 제공하는 신개념 '대인배 공간'도 등장하고 있다.
롯데마트 양평점은 지난 4월 27일 개점했다. 주변에 대형 마트가 몰려 있는 상업 중심지라는 점을 고려하면 무모하면서도 신선한 도전이다. 반경 3Km 안팎에 대형마트가 10개나 몰려 있는 ‘레드오션’ 지역이다.
양평점이 들어설 '붉은 바다'를 의식한 김종인 롯데마트 대표이사는 “쇼핑도 일로 여기게 된 세태를 극복하고자 도심 속 힐링 공간으로 재창조하는 데 가장 큰 노력을 기울였다”고 개점 취지를 밝혔다. 쇼핑 공간 겸 휴식 공간이라는 새로운 시도다.
롯데마트의 출점 전략 변화는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2015년 12월 3일 경남 창원시에 세운 롯데마트 양덕점이 신호탄이었다. 양덕점은 매장 통로를 4m에서 5m로 넓히고 일방통행 동선을 도입했다. 걸리적거림 없이 편하게 걸어다니며 쇼핑하라는 배려였다. 또한 1층에는 신상품만을 배치하는 공간을 만들었다. 당시로선 혁신적인 구성이었다. 소비자의 쇼핑 체험에 방점을 둔 이른바 ‘제3세대 마트’의 시작이다.
양덕점은 도로 하나를 두고 유통 공룡인 홈플러스와 마주 보고 있지만, 소비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개점 10일 만에 57억 원을 기록해 월 매출 목표의 71%를 달성했다. 당시 롯데마트 측은 117개 전 매장을 양덕점 같은 ‘생활 제안형 매장’으로 변경하겠다고 공언했다. 양평점은 양덕점 이후 롯데마트가 처음으로 서울에 들이민 '체험 중심' 매장이다.
#1층 #어반포레스트 #성공적 #아주칭찬해
양평점의 가장 큰 특징은 1층을 고객에게 내줬다는 점이다. 어반포레스트(Urban 4 Rest)로 명명된 이 공간은 고객이 쉬는 ‘도심 속 숲’을 표방한다. 내부 곳곳에는 자연의 느낌을 강조하는 인공 나무, 덩굴 등이 우거져 있다. 제품 진열 판매대 대신 소파와 테이블이 배치됐다. 계단형 목제 벤치 옆의 그랜드 피아노에서는 계속해서 선율이 흘러나온다. ‘쉼’의 강조가 읽힌다.
대형 마트엔 물건을 사러 간다. 그런데 롯데마트 양평점 1층엔 온통 식당뿐이다. 매장 입구에는 푸드트럭 두 대가 진출해 있다. 백화점에서나 볼 만한 고급 커피 전문점 ‘폴바셋’뿐 아니라 태국 음식 전문점 ‘마이타이’, 인도 음식점 ‘강가’, 대만 디저트 전문점 ‘대만대첩’ 등 세계 요리 매장이 줄을 잇는다. ‘북촌손만두’, ‘두끼떡볶이’ 등 프랜차이즈 식당도 함께 한다. 물건만이 아니라 식욕을 위해서 찾아오라는 개념이다.
반응은 긍정적이다. 딸과 함께 온 이 모 씨(서울 영등포구)는 “카페 같은 느낌에 괜찮은 맛집들이 1층에 있어 좋다”고 인상을 밝혔다. 인근에 산다는 주 모 씨는 “일반 마트와 다른 카페 같은 디자인이 좋다”고 호평했다.
양평점의 변신은 어린이와 노년층을 마트로 유인하는 효과도 보였다. 구로구에서 온 백발 노인은 “무릎이 불편해 멀리 못 가는데 손자가 여길 꼭 오자고 해서 같이 왔다”고 말했다.
고객들이 쉬는 모습은 각양각색이다. 소파에 앉아 책을 보고,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으로 과제를 하고, 아이와 함께 뛰어다니기도 한다. 회사원으로 보이는 10여 명 남성이 테이블에 앉아 회의를 한다. 사원증을 단 직장인들이 커피를 마시는 모습은 흔하다. 테이블에 엎드려 낮잠 자는 고객도 보인다. 회의실에서 취침실까지 다목적 공간이다.
노른자위 1층을 공용 공간으로 내주니 쉬려고 마트에 오는 고객들이 많다고 관계자는 밝혔다. “주말에는 말도 못 해요. 지금은 평일이라 괜찮지만 주말에는 엄청 바뻐요”라며 손사래를 쳤다. 주 고객층은 “아이를 데리고 온 가족이나 젊은 사람들”이란다. 젊은 층을 겨냥한 매장답게 어반포레스트 곳곳엔 ‘인스타그램 핫플레이스’(사진이 잘 나오는 곳) 스티커가 붙어 있다.
직행 에스컬레이터 도입도 이색적
다른 층에서도 마트의 고정관념을 깨려는 시도가 보였다. 양평점에는 1층에서 지하 2층으로 3개 층을 관통하는 직행 에스컬레이터가 있다. 지하 2층의 식품, 유아용품, 자동차용품 매장으로 직행하려는 고객을 위한 것이다.
조명으로 분위기 좀 바꿔볼까?
지하 2층에서 인상적인 것은 조명의 차이다. 과일 및 채소, 육류, 어류 등 신선식품 공간과 조리 식품 공간에는 노란 빛 조명을 사용했다. 와인 판매 공간 역시 노란빛으로 공간의 느낌을 차별화했다. 반면 가공식품과 자동차-스포츠용품, 세제 공간에는 흰색 조명이다. 전체를 같은 조명으로만 꾸미는 마트들과 대조적이다. "왜? 조명 색깔이 다르면 안 돼? 이건 불빛의 민주화야"라고 램프들이 말하는 듯 하다. 매장 벽 일부를 목제로 꾸며 색다른 분위기를 낸 것도 눈에 띤다.
음식에 쇼를 입히다
신선식품 판매대에도 색다른 ‘쇼’를 도입했다. 구매한 스테이크를 즉석에서 구워주는 ‘스테이크 스테이션’과, 고기 숙성 과정을 보여주는 웻에이징 숙성고다. 또 랍스타 등 살아있는 해산물이 움직이는 수조 ‘클린 클라스 스테이션’은 수산시장의 느낌을 물씬 풍긴다.
매장 곳곳에 설치된 모니터로 영상이 송출되는 것도 눈길을 끈다. 맥주 전용 판매 공간에서는 맥주잔에 맥주를 따르는 소리와 영상이 눈과 귀를 끈다. 시청각으로 고객을 움직이려는 ‘감각 마케팅’의 도입이다.
과도한 마케팅이 ‘쉼’을 방해하는 건 아쉬워
단 반복적인 광고 영상 송출이 쇼핑 몰입을 방해할 수 있다는 점은 아쉽다. 기자가 방문한 5월 22일 오후 3시 30분경, 지하 2층 대형 옥외 광고판 ‘디지털 사이니지’에는 롯데마트 양평점에선 ‘편리한 쇼핑경험’을 광고하는 영상물이 반복해 재생됐다. ‘휴식’이 테마라는 당초의 약속과는 배치되는 부분이다. 또 스포츠·자동차 용품 공간에는 서로 다른 3개의 광고 영상이 반복적으로 송출돼 ‘쉼’의 테마와는 거리가 느껴졌다.
지하 1층에는 생화(生花) 전문 판매점 ‘페이지그린’을 두어 쉼의 테마와 일치시키려 구성했다. 생화 매장 안에 커피 전문점을 두어 고객의 여유로운 쇼핑과 함께 부가가치를 올리려는 노력으로 보였다.
아이와 어른 함께 즐겨요
2층은 아이와 ‘덕후’들을 위한 장난감 전문 매장 공간이다. 아동용 장난감 전문 매장 ‘토이저러스’에는 제품 진열은 물론 장난감을 가지고 놀 넓은 공간이 마련됐다. 무선자동차를 조종해 볼 소형 트랙도 설치돼 있다. 영등포에서 두 아이와 함께 온 부부는 “마트에서 장난감 자동차를 운전해본 건 처음”이라며 즐거워했다. 그 뒤편으로는 드론 전문 매장과 어른용 장난감 매장인 키덜트 공간이 있다. 손바닥 크기의 스타워즈, 아이언맨 피규어는 물론 사람 키 만한 배트맨이 서 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오프라인 소비자들이 원하는 건 체험이고, 요즘 오프라인 매장의 트렌드는 고객을 모으는 것”이라며 "그 방법으로 고객이 필요로 하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소개했다. 이 교수는 “쇼핑과 엔터테인먼트, 쇼핑과 맛, 쇼핑과 만남의 장소의 결합 등으로 매장의 개념이 확장되고 있다. 증강현실이 활성화되기 전까지 매장은 체험을 제공하는 공간으로서의 유효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본다”고 전망했다.
기자가 본 양평점은 제품이 가득 채워진 기존의 마트와는 달랐다. 전 층에 일관되게 통로는 넓었고 천장이 높아 답답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도심 속 숲 개념의 1층을 비롯해 카페형 원예 매장, 키덜트 존 등 각 층이 골고루 이색 체험을 제공한다.
이색 체험이 곧 매출 상승으로 이어질지는 지켜볼 일이다. 기자가 방문한 5월 22일 오후 4시쯤에는 주요 쇼핑 공간인 지하 1, 2층의 넓은 통로와 비교될 정도로 쇼핑객이 드물었다. 특히 롯데마트가 특화 매장으로 내세운 가구·인테리어 매장의 ‘룸바이홈’은 지하1층 면적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두 세명의 쇼핑객만이 둘러보고 있을 뿐이었다. 소위 ‘오픈발’이 약해진 것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된다. 이에 매장 관계자들은 "평일이라 한산한 편"이라고 답했다. 휴식을 테마로 한 이색 체험 제공이 성공했다는 평가가 앞으로 매출 효자로까지 이어질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