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김금영 기자) 지난해 광화문 광장의 촛불은 뜨거웠다. 살을 에는 추위에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 부패한 사회에 반성과 개선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올해 8월, 그 광장의 뜨거운 열기를 임옥상 작가가 다시금 끌어왔다.
임옥상 작가는 민중미술 1세대 작가로 40여 년 동안 왕성한 활동을 해 왔다. 특히 민중미술가로서 문명 비판적, 정치 고발적, 사회 참여적 작품을 선보여 온 그는 지난해 11월 광화문 광장에서도 퍼포먼스를 펼쳐 화제가 됐다. 당시 500m 길이의 흰 천을 광장에 펼쳤고, 그 위에 시민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적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퍼포먼스에 감명을 받았고, 예술을 통해 사회에 목소리를 내는 조화와 화합의 장이 마련됐다.
그리고 이번에 작가는 가나아트센터에서 9월 17일까지 열리는 개인전 ‘바람 일다’로 돌아왔다. 전시장 1층에는 매우 익숙한 얼굴들이 등장한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트럼프, 아베 등 국내외 국가 원수 14인의 초상을 대형 가면으로 만들어 설치했다. 이 작품의 이름은 ‘가면무도회’다. 큰 얼굴들이 한데 모여 인상을 쓰거나 웃고 있는데 그 모습이 오묘하다. 그리고 가면에 가까이 다가서면 해당 인물이 한 말들이 적혀 있다. 가령 아베의 얼굴엔 “일본의 2차 대전은 침략 전쟁이 아니다”가 적혔다. 너무 어이없어서 실소와 분노를 자아낸 말들이 대부분.
“2014년도에 물대포 진압 사건이 있었죠. 그때 당국은 ‘폭력 시위대를 진압했다’고 하며 ‘앞으로 시위에 가면을 쓰고 나오면 폭력 시위로 간주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때가 임계점이었어요. 정말 참을 수가 없었죠. 그래서 박근혜 당시 대통령의 가면을 만들어 시위 현장에 나갔어요. 인기가 대단했죠. 그리고 하나로는 너무 쓸쓸해 보여서 이후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롯해 ‘독재자 시리즈’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자기검열에 빠지는 순간이 있었어요. 그래서 알리바이를 위해 범위를 더 확대에서 세계 모든 권력자의 가면을 만드는 과정까지 작업이 이어졌습니다.”
이어지는 2층 전시장에서는 백남기 농민 물대포 사망 사건을 다룬 ‘상선약수-물 2011’, 용산 화재 참사를 주제로 한 ‘삼계화택-불 2011’,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윌리엄 모리스’ ‘존 버거’가 설치됐다. 또한 민들레 꽃씨로 제작한 노무현과 문재인 두 전/현직 대통령의 초상화도 전시됐다. 한쪽 벽면에서는 푸른빛의 물, 다른 쪽 벽면에서는 붉은빛의 불이 화면 가득해 물과 불의 대립 구조가 돋보이는 구성이다.
“물대포 사망 사건을 그리면서 용산 참사 또한 떠올랐어요. 둘 다 있어서는 안 될 안타까운 일들이었죠. 생명을 살리는 물과 불로 사람을 죽이다니요. 용산참사의 진압을 명령한 김석기 당시 경찰청장은 지금 국회의원을 지내고 있어요. 진실을 밝히겠다고 평화시위를 벌인 시민들에게 매우 무례한 대우를 했죠. 이렇게 우리나라 사회정의 수준이 참 비참해요. 너무 가슴 아파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또 잊어서는 안 되는 일들을 화면에 담았습니다.”
존 버거와 윌리엄 모리스는 작가가 존경하는 예술가들이다. 같은 예술가의 입장에서 ‘이들의 시선으로 우리 현대사를 바라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작품을 함께 전시장 가운데 설치했다.
“작가가 이 정도도 못해서 되겠냐”
또 다른 2층 전시장에는 높은 벽을 가득 채우는 대형 작업들이 들이찼다. 강렬한 이미지의 ‘광장에, 서’와 ‘창조경제혁신센터장 및 지원기업 대표 간담회’가 함께 마주보고 있다. ‘창조경제혁신센터장 및 지원기업 대표 간담회’는 재벌 총수들이 손을 잡고 환하게 웃고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하반신이 눈길을 끈다. 환한 모습의 상반신과 달리 하반신은 마치 괴물과 같은 촉수 등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수면 아래 그들의 모습을 상상했어요. 모처럼 상상의 나래를 펼친 즐거운 작업이었죠. 그런데 이 작업을 보고 걱정하는 분들도 있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답했어요. ‘작가가 이 정도도 못하냐’고요. 풍자와 해학은 작품에서 매우 중요한데, 어느 순간부터 거세를 당하기 시작했어요. 저는 쿠바를 자주 다녀오곤 해요. 그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예술에는 아무런 표현의 제약을 두지 않아요. 그런데 민주주의 국가라는 한국에서 벌어진 일들이 비참하죠.”
이 재벌총수들을 지켜보듯 ‘광장에, 서’가 설치됐다. 지난해 광화문 광장을 채운 촛불들을 다시금 불러 온 작업들이다. 현장을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작업했다.
“광장에 넘쳐났던 사람들과 무수한 일들을 어떻게 기록해야 하나 고민했어요. 촛불이 모이고 모여 형성한 파도를 생각하다 수많은 땡땡이 무늬가 생각났고, 이를 촛불의 불빛으로 표현했죠. 광장을 다시 불러낼 수 있는 단초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작업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기, 흰꽃’과 ‘여기, 무릉도원’ 그리고 작가의 ‘자화상 Ⅰ’이 자리했다. ‘여기, 흰꽃’과 ‘여기, 무릉도원’은 북한산의 산세를 흙 바탕에 선묘로 재현하고, 작품 하단은 꽃들로 채운 작품이다. 암울한 현재를 극복하고 희망찬 내일로 나아가고자 하는 작가의 바람이 담겼다. 이 모든 풍경을 바라보는 작가의 자화상은 과거를 잊지 않고, 현실을 열심히 살며, 더 나아가서는 희망의 내일을 바라보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실제 풍경을 풍유적으로 번안했어요. 일종의 관념적 실경화이자 현대판 무릉도원이죠. 하얀 목화가 화면에 가득 꽃을 피웠어요. 우리에게도 이런 향기롭고 따뜻한 내일이 오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