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포그래피의 대가이자 북 디자이너로 명성이 자자했던 얀 치홀트, 건축가이자 감각적인 타이포그래피로 주목받던 막스 빌. 타이포그래피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디자인 분야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두 사람이 1946년, 치열한 논쟁을 벌인다. 현대적인 미감으로 새로운 타이포그래피를 이끌던 얀 치홀트가 자신의 과거를 전면 부정하며 장식이 배제된 전통적 타이포그래피로 전향한 것. 이 논쟁은, 단순히 개인적 취향의 대립이 아니라 시대적 변화 양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예술적 관점에서의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었다. 새로운 타이포그래피의 선구자였던 얀 치홀트가 자신의 지난 작품은 물론, 자신이 추구했던 새로운 양식마저 부정하면서 다시 과거의 타이포그래피로 돌아간 것이 막스 빌에게는 변절이자 배신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은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의 작품 세계를 인정하며 친밀하게 지내왔던 두 사람의 관계가 왜 비판과 반론이 오가고 비방과 모함까지 가세하는 상황으로까지 치달았는지 상세히 분석하면서, 그와 함께 타이포그래피의 변천 과정과 역사, 더 나아가서는 디자인의 역사를 개괄한다. 이 논쟁의 시발점이 된 얀 치홀트의 강연 ‘타이포그래피의 불변 요소’를 비판한 막스 빌의 ‘타이포그래피에 관하여’와 함께, 그 글에 대해 또다시 반론한 치홀트의 ‘신념과 현실’의 전문을 실었으며, 두 사람이 걸어온 타이포그래피의 변천 과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자세한 설명과 풍부한 도판도 볼 수 있다. 더불어 그들을 둘러싼 다른 예술가들의 평론까지 실었다.
두 사람이 어떤 쟁점을 가지고 비판과 반론을 펼쳤는지 그들의 글을 통해 이해하고 나면 두 논쟁의 후일담이라고 할 수 있는 요스트 호훌리의 에필로그가 등장한다. 이 글을 통해 두 사람의 논쟁이 어떻게 마무리됐는지, 그리고 이 논쟁이 현대에 와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해를 돕는다.
한스 루돌프 보스하르트 지음, 박지희 옮김 / 1만 8000원 / 안그라픽스 펴냄 / 20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