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김금영 기자) 오래된 나무가 김덕용 작가에게는 캔버스다. 오래된 가구나 문짝 등의 나무판을 깎고, 다듬어서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김덕용이 이화익갤러리에서 개인전 ‘오래된 풍경’을 10월 31일까지 선보인다.
작가는 ‘나무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알려졌다. 그는 왜 종이가 아닌 나무에 그림을 그리게 됐을까? 이것은 재료의 근본에 접근하고자 한 작가의 태도에서 비롯됐다. 동양화를 전공하며 미술사를 공부하던 작가는 수많은 목조 건물을 발견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포근함과 안락함을 느끼게 하는 목조 건물은 작가의 마음 또한 파고들었다. 그리고 작가가 재료에 대한 관심을 더욱 갖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고.
“우리는 흔히 종이에 그림을 그립니다. 저도 미술 공부를 하면서 종이에 그림을 많이 그렸어요. 그런데 종이의 원료 또한 나무잖아요? 그 생각을 갖고 목조 건물과 나무를 바라보니, 색다르게 다가왔어요. 스스로 시간을 담고 있는 나무는 저의 손때를 묻히기도 좋았고, 역사 속 흐름을 담는 데 가장 적절한 재료라는 생각이 들었죠. 저는 우리 미술의 정신은 이론이 아닌 재료 그 자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옛 선조들이 남겨놓고 간 순수한 재료는 혼과 시간을 담고 있죠.”
그래서 작가는 원재료 자체의 특성을 살리는 그림에 몰두하게 됐다. 그의 작품 속 나무 위 등장하는 자개 또한 그 일환이다. 요즘은 모던한 서양식 가구가 가구점을 가득 채우고 있지만, 작가의 어린 시절 가구는 자개장이 대부분이었다. 화려하면서도 독특한 분위기를 내뿜는 자개는 작가의 어린 시절과 더불어 어머니를 떠오르게 만들었다.
“시골에서 올라와 객지 생활을 하면서 어머니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그리울 때가 많았어요. 특히 자개 무늬가 어머니를 많이 떠올리게 했어요. 어렸을 때 많이 본 자개장의 영향도 있었지만, 소풍갈 때 어머니가 입고 왔던 깨끼한복의 무늬와도 꼭 닮았죠. 그래서 자개를 보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가 동시에 찾아왔어요. 그 느낌이 아련하고 행복했죠. 또 제 어린 시절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자개는 먼 옛날부터 가구에 사용되면서 우리의 생활과 미술에 자연스럽게 속해 왔어요. 그래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 자개를 2000년도부터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해 작업을 하게 됐습니다.”
작가는 작업할 때 자신이 “목수이자, 화가”라고 말했다. 자개를 보면 공예, 나무를 보면 건축, 물감을 보면 회화를 한다고 각각 이야기될 수도 있다. 그런데 작가는 장르로서 자신의 작업에 접근하지 않는다. 공예, 건축, 회화 이 모든 것이 작가에게는 예술로 이야기된다.
그림에 등장하는 창과 문의 의미
나무에 가구용 염료를 칠해 색을 내고, 단청 기법으로 색을 낸다. 그리고 나전칠기의 방식을 따라 자개를 붙인다. 강조 또한 축약은 지양한다. 재료의 본래 특성이 가장 잘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작가가 신경 쓰는 부분이다. 작가는 “재료는 그 자체가 아름다워요. 미사여구가 필요 없죠. 그래서 제 작업에서는 재료가 장식적인 의미에서 화려하게 꾸며지지 않습니다. 본연의 모습 그 자체, 재료가 담은 혼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합니다”라며 작업관을 밝혔다.
또한 작가가 작업을 통해 경험하는 것이 있다. 최근 작가는 주거 형태를 기반으로 한 ‘공간’의 표현에 집중하고 있는데, 건축물의 안과 밖을 잇는 차경(借景)을 통해 옛 선인들을 만나고 있다. 한 예로 ‘결 - 자미화(紫微花)’는 대청마루에 누워 자신이 좋아하는 배롱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다 낮잠에 들었을 안평대군을 상상하고 그린 작품이다. ‘관해낙조(觀海落照)’는 다산 선생의 쓸쓸한 마음을 그렸다. 작품 속 공간은 평화로운 정자다. 그리고 노을빛이 저무는 풍경이 화면을 채웠다. 실제 있는 풍경을 바탕으로 작가의 상상이 더해진 결과물이다.
“선조들이 머물렀던 공간을 통해 그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상상을 하곤 합니다. 그리고 작업에 그 상상을 옮기죠. 제가 이때 주목하는 건 역사적인 사실의 재현보다는 그분들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거예요. 학자로서, 예술가로서 선조들은 어떤 생각을 품고 살았을까, 해 저무는 풍경을 보고 무엇을 느꼈을까 등 다양한 상상을 하면서 감정이입을 하기도 합니다.”
작가는 본인이 쓸쓸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스스로 게을러 잘 돌아다니지 않는다고 고백한 작가가 세상과 소통하는 창구는 바로 작업이었다. 그리고 작가는 소통의 의미로서 그림에 창을 그려 넣었다. 살짝 열린 창은 폐쇄된 공간을 바깥세상과 연결해주는 창구이자 새로운 풍경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존재가 된다. 그래서 차경은 작가에게 바깥세상, 즉 희망을 품게 하는 역할을 했다.
“그림 속 인물을 통해 제 마음을 드러내기도 했죠. ‘차경 - 뒤안’에는 건물 안에 앉아 창으로 바깥을 바라보는 인물의 모습이 담겼어요. 작품을 본 사람 중 어떤 분은 그림 속 인물과 제가 닮은 것 같다고 하기도 했어요. 놀라웠어요. 안에 있는 제가 또 다른 세상을 보고 싶은 마음이 투영돼서 그렇게 느낀 것은 아닐까요?”
작가는 “앞으로도 나무, 자개를 이용해 오래된 풍경을 그리고 싶다”고 밝혔다. 일분 일초 흐르는 시간의 흔적과 그 시간에 함께 쌓이는 그리움, 쓸쓸함, 행복, 희망을 모두 놓치지 않고 바라보겠다는 각오다.
“시간이 흐르면서 제 안에도 여러 방이 생겼어요. 앞으로의 작업은 그 방들을 하나하나 두드려 문과 창을 열어가는 과정이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