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김금영 기자) 왜 예명이 최랄라(본명 최한솔)일까? 별다른 의미 없단다. 룰루랄라 즐겁게 살고 싶었단다. 그런데 이것만큼 최랄라 작가를 설명해주는 단어도 없다. 작가는 예명 그대로 매우 유쾌했다. 그리고 작가는 사진을 찍을 때 무엇보다도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디프로젝트 스페이스 구슬모아당구장에 살롱이 하나 꾸려졌다. 바로 최랄라의 ‘랄라 살롱’. 지난해 열렸던 첫 개인전 전시 현장은 아틀리에 같은 콘셉트로 꾸려졌는데, 이번엔 살롱이라니. 관련해 작가는 “매 전시마다 어떤 콘셉트에 갇히려는 의도는 없었다. 다만 화이트큐브 안에서 작품을 거는 형식보다는, 사람들이 편하게 전시장에 와서 밤늦게까지 같이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랐다. 마침 전시장 안에 바가 있었고, 살롱이라는 콘셉트가 이번에 잘 맞아떨어졌다”고 말했다. 이곳저곳 빈티지 느낌의 가구도 배치돼 사람들은 전시를 구경하다가 지치면 앉아 있기도 했다.
그리고 또 눈길을 끄는 게 있다. 일반적으로 전시에 걸린 작품엔 이미지 캡션이 달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랄라 살롱에는 이미지 캡션이 인쇄된 종이 대신, 한탄(?)과도 같은 독특한 문구를 작가가 직접 벽에 적어 놓았다. 간간이 작품 설명도 있는 가운데 “카메라 뭐 쓰는지 그만 좀 물어보세요 ㅠㅠ”라며 자신이 사용하는 기종을 적었고, “아, 조명이 필요해…” 등 예상치 못한 말들도 적어 놨다. 작가는 “애초에 의도했던 건 아니다. 작품을 거는 마무리 시간 동안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생각들을 벽에 적었다”며 웃었다. 작품을 감상하던 사람들은 이 문구를 보고 마치 작가와 대화를 나눈 듯 얼굴에 웃음꽃이 번진다.
이처럼 작가는 관람자를 편하고 즐겁게 해주는 묘한 매력을 가졌다. 하지만 작업에서는 진지함이 묻어났다. 그에게 사진은 즐거움과 동시에 많은 고민 또한 동시에 안겨준 존재다. 애초의 시작은 말년 병장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대를 앞두고 작가는 섬에 가게 됐는데 정말 그곳에는 아무 것도 없이 정적만 가득했다. 이때 시간이 날 때마다 사진으로 주변을 기록하기 시작했는데 눈으로 본 세상과 사진으로 본 세상은 또 다르게 느껴졌다고.
“눈으로 세상의 수많은 것들을 보죠. 그런데 카메라로 찍은 세상은 또 달랐어요. 왜냐하면 카메라 렌즈는 제가 진짜 관심 있고, 보고 싶은 것들에 자연스럽게 향하게 되잖아요? 제 ‘자의’가 들어간 세상이죠. 그래서 인화된 사진을 보고 ‘세상의 수많은 이야기 속 내가 이런 이야기에 특히 관심이 있었구나’ 알게 됐어요.”
처음엔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 시작한 그는 현재 필름 카메라를 고집하고 있다. 작가는 “디지털 카메라는 편리하다. 하지만 ‘마음에 안 들면 다시 찍으면 되지’ 하고 쉽게 사진을 삭제하고 다시 찍는 과정이, 마치 내 생각을 그만큼 쉽게 잃어버리는 느낌이었다”며 “필름은 찍은 당시 확인할 수 없어 최대한 생각을 많이 하고 느낀 다음 찍어야 한다. 그 과정이 매우 설레고 즐거웠다”고 말했다.
이렇게 사진 찍는 것을 즐기기도 했지만, 또 너무 막연해서 버거울 때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고민은 이번 전시에서도 드러난다. 초창기 찍었던 작품에 “뭘 모르고 찍었을 때”라고 적으며 셀프 디스도 서슴지 않는다. 이랬던 작가는 독특한 색감을 배경으로 사람들의 뒷모습을 찍은 ‘모호’ 시리즈로 점차 알려졌다. 이 사진을 찍기까지도 많은 과정이 있었다. 본래는 사람의 앞모습에 주목했던 시기도 있었다.
“초창기 작업 때 인물을 매우 단조롭게 찍는, 구성을 다 빼버리는 시도로 버텼어요. 그런데 그 와중에도 뭐를 찍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러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 이 사람들이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 점점 느끼게 됐어요. 그리고 그 복합적인 감정들이 제게는 정확히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빨간색의 이미지로 확 다가왔어요.”
앞모습 놓치고 아쉬워하며 돌아서던 그때 발견한 뒷모습
이번 전시장을 보면 벽 전체가 빨간색으로 칠해져 있다. 이건 작가의 내면세계를 뜻하기도 한다. 빨간색에 내포된 느낌은 매우 다양하다.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상징하는가 하면, 반대로 잔인함과 공포를 심어주는 색이기도 하다. 또 채도에 따라서도 느낌이 다르다. 하나로 설명될 수 없는 복합적인 감정이 작가에게는 수많은 색 중 유독 빨간색으로 다가왔고, 이번 전시장의 주요 테마 색으로 꾸렸다. 이 빨간색은 ‘모호’ 시리즈에서도 전체적인 느낌을 구성하는 주요 테마로 쓰이기도 했다.
“그런데 또 고민이 생겼어요. ‘과연 나라는 사람이 타인의 감정을 담는 그릇이 될 수 있나? 그건 내 욕심 아닌가?’ 하고요. 그리고 수많은 이야기를 듣다보니 어느 순간 그들의 이야기를 ‘다 그럴 수 있지’ 식으로 쉽게 넘기는 저를 발견했어요. 또 예쁜 피사체가 아닌 내면을 담고 싶은데, 사진을 보고 판단하는 기준은 각각 매우 달랐어요. 외형만 예쁘게 찍히길 신경 쓰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이러다보니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보는 게 힘들어졌어요.”
이때 작가는 모든 걸 내려놓고 훌쩍 여행을 떠나버렸다. 하지만 여행간 곳에서도 괴로웠다고 한다.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을 순간 찍고 싶은 욕망이 불끈불끈 솟았지만 용기가 없었다. 그 와중 노르웨이의 한 마을에서 한 모녀를 만났다. 햇살이 따사롭게 비추는 가운데 행복하게 웃는 모녀의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다. 또 사진을 찍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하지만 셔터를 끝내 누르지 못했다.
“그때 저 스스로 패배자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돌아서려는데 모녀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어요. 그때 와! 정말 놀랐어요! 그들의 뒷모습은 정말 아름다웠어요. 생각해보면 앞모습이건, 뒷모습이건 그 사람은 똑같은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저는 앞모습만 보려고 욕심을 부리고 있었던 건 아닌지, 정말로 그 사람을 제대로 보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건 정작 제가 아니었는지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들의 뒷모습은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앞모습의 표정은 의도적으로 꾸밀 수 있지만 뒷모습에는 숨길 수 없는 감정의 흔적이 있었다. 이후 ‘모호’ 시리즈를 비롯해 뒤돌아선 여자들에 주목한 작업을 펼쳤고, ‘관계가 끝난 후 생기는 것들’을 콘셉트로 한 뒷모습도 찍었다.
신작도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다. 광활한 바다를 배경으로 흑백의 모노톤이 눈에 띄는 이 작업은 작가가 다른 누구의 이야기가 아닌, 오롯이 자신의 내면에 집중해 찍은 사진이다. 바쁘게 전시를 준비하던 도중 마음이 복잡해 아이슬란드로 훌쩍 떠났고, 여기서 또 자신의 오만함을 느꼈다고 한다.
“수많은 들판을 보고 정말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여기에 모델을 세우면 뭔가 괜찮은 사진을 찍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사진을 찍는 순간 절망했어요. 자연의 방대함 앞에서 전 한없이 작은 존재였죠. 그 방대함을 다 담을 수 없었어요. 좌절한 채 한국에 돌아왔는데 사진을 인화하는 순간! 환희를 느꼈어요. 전혀 기대 못했는데 사진을 보는 순간 이게 바로 현재 제 심정이라는 게 느껴졌거든요. 그때 또 생각이 들었어요. 즐겁게 사진을 찍기보다는 ‘전시해야 하는데’ ‘작품 개수 모자라는데’ 등 정말 잘 찍고 싶다는 생각에 제가 스스로를 강박했던 건 아닌가 하고요. 제 자신이 있어야 사진을 찍을 수 있는데, 제가 아닌 주변 환경을 더 앞세웠던 거죠. 아직 멀었다고 느꼈어요. 앞으로 개념을 더 확장시켜 많은 사진을 찍고 싶어요.”
전시장에서 또 만날 수 있는 최랄라의 이야기가 있다. 세상에 알려진 최랄라의 또 다른 필모그래피다. 전시장 한켠에 마련된 문을 열고 들어가면 태연, 비와이, 자이언티 등 유명 뮤지션들의 앨범 재킷 작업과 송혜교, 문소리 등 배우들과의 화보 사진, 그리고 패션 매거진들과의 화보작업을 볼 수 있다.
“예술사진과 상업사진의 경계가 저는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사진을 찍을 때 제게 가장 중요한 건 즐겁게 찍는 거예요. 자이언티와의 작업은 특히 괴롭고도 즐거웠어요. 사진을 찍기 전 아이디어를 모으는 브레인스토밍에서 정말 기발한 발상을 보여줘서 외계인 같다고 느끼기도 했어요(웃음). 그러면서도 일을 할 때는 냉철하고 프로다운 모습을 보였고요. 표현의 자유를 마음껏 느낄 수 있었던 작업이라 인상 깊었어요.”
오지 않은 미래보다 오늘 하루를 즐겁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작가이지만, 이루고 싶은 목표는 명확히 세워뒀다. 작가는 자신이 사진 공부를 시작할 때 많은 자료가 없어 힘들었다고 한다.
“이갑철 선생님의 사진을 보면서 많은 걸 느꼈어요. 다른 나라에서는 할 수 없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이야기와 감성을 담았다고 느꼈죠. 저는 외국 잡지 어딘가에서 본 것 같은, 다른 문화를 어설프게 따라하는 게 아니라, 우리만의 문화와 감성을 담은 사진을 찍고 싶어요. 외적으로 예쁜 게 아닌, 본연의 감성을 다루는 사진이요. 이후 사진계에 입문하기를 꿈꾸는 친구들을 위해서도요. 그리고 이 모든 사진들을 즐겁게 찍고 싶어요.”
전시는 디프로젝트 스페이스 구슬모아당구장에서 12월 24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