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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약] 반세기 동안 국민과 함께 한 역대급 효자 약품 3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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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561호 김유림 기자⁄ 2017.11.13 10:11:47


▲서울 마포구의 한 약국 모습. 사진은 기사의 특정 사실과 관련 없음. 사진 = CNB저널 자료사진


제약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산업 중의 하나이자 국민 건강의 영원한 동반자다. 최근에는 신약개발 열풍이 불면서 우리 경제에 활력을 주고 있다. 제약사들이 장수한 배경에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은 히트제품이 있었다. <편집자 주>



Part 1. “이 소리가 아닙니다” 반세기 목 건강 지킴이, ‘용각산’

(CNB저널 = 김유림 기자) 기침은 우리 몸을 보호하는 방어기전 중 하나다. 기도를 통해 유해 물질이나 이물질이 들어오는 것을 막고, 폐와 기도의 해로운 물질과 분비물을 바깥으로 배출해 기관지를 깨끗하게 유지해준다. 

어르신들이 폐렴으로 인한 사망이 많은 이유도 기침할 수 있는 기운이 없어 가래를 효과적으로 배출하지 못해 병이 악화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도한 기침은 기관지 점막에 상처를 내고, 숙면까지 방해하며 일상생활에 지장을 준다. 

▲1960년대 말 용각산 신문광고. 사진 = 보령제약

최근에는 중국발 미세먼지로 특별한 기관지 병이 없어도 기침이 잦은 젊은층이 늘어나고 있다. 머리카락 굵기의 1/10 정도인 미세먼지는 일반적인 먼지처럼 코털이나 기관지 점막에서 거르지 못하고, 코와 구강, 기관지에 축적된다. 지속적으로 흡입하게 되면 기관지 점막이 건조해지면서 세균이 쉽게 침투할 수 있으며, 만성 폐질환이 있는 사람은 폐렴과 같은 감염성 질환에 취약해진다. 

가래기침이 계속되거나 가래의 배출능력이 떨어질 경우 ‘진해거담제(鎭咳祛痰劑)’를 많이 찾는다. ‘진해’는 원인과 관계없이 기침을 가라앉히며, ‘거담’은 끈끈한 점액을 녹이는데 도움을 주어 묽게 된 분비물을 기도 밖으로 배출시키는 역할을 한다. 

▲용각산 패밀리 제품 이미지. 사진 = 보령제약

진해거담제는 가루약이나 시럽의 형태다. 호흡기 질환이 좋지 않아 복용하는 약인만큼 삼키기 어려운 알약 형태는 거의 없다.  

대표적으로 동그랗고 납작한 은색 뚜껑에 하얀색 씁쓸한 가루가 들어있는 ‘용각산(龍角散)’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용각산의 출발은 24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 왕을 치료하는 의사였던 후지이 겐엔은 길경가루, 행인, 감초, 세네가 등 한약재를 바탕으로 용각산을 처음 개발했다. 
이후 그의 아들 겐신이 양의학을 배워 서양의 생약을 도입해 개량했으며, 겐신의 아들인 후지이 쇼테이지가 약방을 통해 일반 사람들에게 판매를 시작했다. 메이지 27년(1894년) 약제사가 된 쇼테이지의 아들 도쿠사부로가 가루분말 형태로 개발해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용산각의 주재료인 ‘길경(도라지의 약재명)’은 음식뿐만 아니라 폐와 기관지를 다스리는데 널리 쓰이는 한약재다. ‘동의보감’에는 길경이 들어가는 처방이 280여 가지나 되며, ‘명의별록’에는 오장을 이롭게 하고 부족한 피를 보충하며 속을 덥게 하고 음식을 잘 소화시킨다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사포닌 성분이 풍부해 기관지에서 생성되는 분비액인 뮤신(mucin)의 양을 증가시켜 가래의 배출을 용이하게 하고 기관지 내벽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용각산 기술협상 당시 성수동 공장부지를 시찰하고 있는 김승호(가운데) 보령제약 명예회장. 사진 = 보령제약

국내에는 일제강점기 전후로 ‘등정득삼랑’이라는 회사가 수입하면서 들어오게 됐다. 1950년대 정부에서 밀수 금지 품목으로 정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그러다 1960년대 보령제약이 기술제휴를 거쳐 공식적인 국내 판매가 시작됐다. 

보령제약의 창업주 김승호 회장은 1963년 보령약품을 세우며 본격적으로 제약산업에 뛰어들었다. 1966년 지금의 보령제약으로 회사 이름을 바꾸고, 그 해 일본 용각산社와 기술제휴를 맺기 위해 뛰어다녔다. 

한일 기술제휴, 국민건강 획기적 개선
연구개발 올인해 ‘용각산 신화’ 탄생
젊은 취향 ‘스틱형 1회용 포장’ 발전 

당시 용각산社는 생산설비 현황, 기술 도입 후 신규로 설치할 설비, 생산시설을 보령에 요구했다. 용각산의 성공을 확신했던 김 회장은 막 계약을 마친 허허벌판의 성수동 공장부지로 용각산社 임원을 데려가 그곳에서 펼쳐질 보령제약의 미래를 설명, 설득하며 계약을 성공시켰다. 

1967년 6월 우여곡절 끝에 용각산이 발매됐지만, 기대와는 달리 전혀 팔리지 않았다. “일본 제품보다 품질이 떨어진다”는 구설수에 휘말렸기 때문. 알고보니 문제는 포장상태였다. 일본보다 떨어지는 용기제작 기술로 오해가 생긴 것이다.

김 회장은 곧바로 첫 출하물량 5만개를 모두 수거해 폐기했고, 일본 원제품과 똑같은 수준의 용기와 포장으로 다시 만들어 영업사원들과 함께 소비자를 직접 찾아 다녔다. 이와 함께 신문과 라디오를 통해서 광고도 대대적으로 진행했다. 김 회장은 출시 이듬해인 1968년 전체 매출(9442만원)의 32%(3056만원)를 광고에 투자했으며, 몇 년간 30% 내외의 광고비를 집행했다. 

당시 의약품 시장을 주도하던 제약사들이 광고비에 투자한 비용은 대략 매출의 10~15%였다. 신생기업이 그들의 두 배를 광고에 쏟아 부으니 모두 무모하다고 말렸지만, 김 회장은 용각산의 효능을 믿고 밀어붙였다. 

▲일본 용각산社을 방문해 제조 과정을 배우고 있는 김승호(왼쪽에서 둘째) 보령제약 명예회장. 사진 = 보령제약

그 결과 용각산의 미세분말 제형의 특징을 살린 “이 소리가 아닙니다~”로 시작하는 문구는 전 국민에게 각인됐으며, 의약품 광고업계에서는 지금까지 명광고로 회자되고 있다.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용각산은 변화를 맞는다. 용산각은 미세한 분말을 아주 작은 수저로 떠먹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고, 쓴맛과 생약성분 특유의 냄새 때문에 젊은층의 수요는 잡지 못했다.

이에 보령제약은 2001년 ‘용각산’을 개선한 ‘용각산쿨’을 내놓았다. 용각산쿨은 스틱에 들어 있는 과립형 제제로 1회용 포장으로 만들어 복용의 편의성을 높이고 맛도 개선했다. 또한 기존의 용각산보다 길경가루, 세네가, 행인, 감초의 함량을 높였고, 인삼과 아선약도 추가했다. 

보령제약 관계자는 CNB에 “50년의 역사를 지닌 용각산은 소비자가 언제나 곁에 두고 생필품처럼 이용할 수 있는 브랜드를 목표로 하고 있다”며 “앞으로 목건강 관리는 물론, 삶의 질을 높여 나갈 수 있는 호흡기 전문 브랜드로서 제2의 전성기를 이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한편 보령제약에 따르면 용각산과 용각산쿨을 복용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물 없이 복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용각산은 목 점막에 직접 작용하는 약으로 물과 함께 복용하게 되면 희석이 될 뿐 아니라, 위로 바로 넘어가게 되어 효과가 약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Part 2. “딱지 떼지 마세요” 37년간 1위, 동화약품 ‘후시딘’

그때 그 시절 아이들의 팔꿈치나 무릎에는 속칭 ‘빨간약’으로 불리던 ‘아까징끼’가 발라져 있었다. 1919년 등장한 이 약의 원래 이름은 머큐로크롬(Mercurochrome)이다. 수은(mercury)이 주성분이며, 상처를 치료하는 만병통치약으로 사용됐다. 

그러나 수은 중독, 수은 알러지 등을 유발해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는 이유로 일본은 1973년 판매와 제조를 금지했다. 미국의 FDA 역시 판매중지를 결정했고, 독일과 프랑스, 한국도 이를 뒤따르게 된다. 

▲동화약품 부채표 후시딘 연고 휴대용. 사진 = 동화약품

머큐로크롬이 사라진 후 노란 빛깔의 포비드 요오드가 그 자리를 대신해 ‘젊은 빨간약’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동화약품의 ‘후시딘’이 약국에 등장하면서부터 예전만큼 만병통치약으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후시딘은 덴마크의 피부질환 전문 제약사 레오파마에서 1962년 개발한 제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동화약품이 1980년 기술 제휴를 맺어 처음 출시했다. 이후 상처치료제 시장에서 37년 동안 단 한번도 1위를 놓친 적이 없을 정도로 대한민국 대표 상처치료제로 애용되고 있다. 

‘퓨시드산나트륨’을 주성분으로 하며, 스테로이드 성분을 함유하지 않아 신생아(생후 4주)와 미숙아를 제외한 아이에게도 사용할 수 있다.

포도상구균, 연쇄구균 등 염증을 일으켜 덧나게 하는 각종 세균들을 막아주기 때문에 상처가 빨리 아물고 흉터 발생을 최소화 하는데 효과적이다. 특히 깊은 부위의 상처뿐만 아니라 딱지 위에 발라도 효과를 낼 정도로 강한 피부 침투력을 나타낸다. 

▲동화약품 부채표 후시딘 1988년 광고. 사진 = 동화약품

후시딘이 처음 출시될 당시 이미 국내에는 겐타마이신, 테트라사이클린, 바시트라신 등 수많은 피부 연고가 자리 잡은 상황이었다. 또 경쟁사들의 제품보다 3배 가까이 비싼 탓에 시장에 안착만 해도 성공적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예상을 뒤엎고 출시 첫해부터 1위 자리에 올라섰다. 후시딘이 불티나게 팔린 이유는 공격적인 영업과 마케팅도 아니었다. 딱지를 떼거나 종기에서 고름을 짜내는 고통과 불편함을 겪었던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시켜준 제품력 때문이다. 

이러한 명성으로 ‘상처=후시딘’은 고유명사처럼 쓰이게 됐고, 1994년 서울 정도(定都) 600주년 기념행사에서 가정상비약을 대표하는 제품으로 선정돼 상처치료제 중 유일하게 타임캡슐에 보관됐다. 이 타임캡슐은 서울 정도 1000년이 되는 2396년에 후손들이 개봉할 예정이다. 

▲동화약품 부채표 후시딘 1986년 광고. 사진 = 동화약품

후시딘을 한국 소비자들에게 선보이는데 공을 들인 고 윤광렬 동화약품 명예회장은 1995년 제 23회 보건의 날 국민훈장 모란상을 받았다. 일평생 제약산업 발전과 국민 보건 향상을 위해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또 같은해 윤 명예회장은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덴마크 정부로부터 헨릭공(덴마크 여왕 부군) 명예 훈장과 덴마크기업연합회 상패를 수훈했다. 1982년 제정된 이 상패는 덴마크 왕실과 외무성, 현지 기업연합회가 해외 기업인 중에서 상호 우호 증진과 교역 증진에 공로가 뛰어난 인물을 선정해 수여하는 명예로운 상이다.

‘빨간약 시대’ 막 내리자 혜성처럼 등장
유해성분 없어 아이들도 맘 놓고 사용
타임캡슐 보관된 단 1개의 ‘상처치료제’

후시딘이 전 국민적인 인기를 얻자 시중에 유사한 제품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원조 레오파마사와 판권 라이센스를 유지하고 있는 브랜드는 ‘후시딘’이 유일하다. 후시딘은 지난해 연매출 200억원을 달성했으며, 동화약품 일반의약품 매출의 약 13%를 차지하고 있다. 

▲동화약품 부채표 후시딘 1987년 광고. 사진 = 동화약품

동화약품 관계자는 CNB에 “올해 120주년이 된 동화약품은 상처치료제인 부채표 후시딘이 30년 넘게 꾸준히 사랑 받아온 만큼 앞으로도 소비자들의 마음까지 따뜻하게 해 줄 수 있는 브랜드가 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데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한편 후시딘은 소비자의 편의를 높이기 위해 다양한 라인을 출시하고 있다. ‘후시딘 연고’는 건조하고 갈라진 상처부위 부스럼에, ‘후시딘 겔’은 얼굴 여드름이나 노출부위와 진물이 흐르는 상처부위에 끈적임 없이 깔끔하게 바를 수 있다. ‘후시딘 밴드’는 후시딘 성분이 함유돼 흉터를 효과적으로 예방하고 항균효과까지 갖춘 습윤밴드다. 특히 개별 파우치에 담긴 ‘후시딘 연고 휴대’는 야외에서도 가방, 지갑 등에 넣어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다.


Part 3. 45년 배앓이 상비약, 동성제약 ‘정로환’

가을이 깊어가면서 낮과 밤의 온도차가 크게 벌어지고 있다. 이 시기에는 여름철보다 식품 위생 관념이 느슨해지면서 유독 배탈이 나는 사람들이 많다. 또 갑작스러운 날씨 변화가 우리 몸의 면역력을 떨어뜨려 배앓이를 일으키기도 한다. 

▲동성정로환 예전 광고. 사진 = 동성제약

이처럼 복통을 수반하는 보통 설사에 시달리는 경우 가정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상비약은 100여년의 역사를 지닌 ‘정로환’이다. 워낙 역사가 오래된 덕분에 ‘배탈에는 정로환’이라는 믿음이 생긴 것도 있지만, 2003년 미국식품의약청(FDA)의 승인을 받았을 정도로 검증된 약이다. FDA는 전세계 거의 모든 나라가 결정에 따를 정도로 의약품에 대해 가장 엄격하고 신중하게 관리 및 시판하는 승인 기관이다. 

정로환은 사실 1905년 일본에서 탄생했다. 러일전쟁 당시 만주에 파병 간 일본 군인들은 나쁜 수질로 인해 설사병에 시달리다가 죽어나갔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에서 만든 약이 다이코신약의 ‘정로환’이다. 정로환은 정신없는 전쟁통에 강력하고 빠른 효과를 발휘했고, 결국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게 됐다. 

▲동성정로환 예전 광고. 사진 = 동성제약

현재 국내에는 익수정로환, 태준대행정로환당의에이, 솔표정로환 등 여러 종류의 정로환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원조는 ‘동성제약’의 제품이다. 한국에 정로환이 정식으로 등장한 스토리는 동성제약의 창업주 이선규 명예회장의 약업인생과 같이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전쟁 직후인 1960년대, 우리나라는 광범위한 영양실조와 배탈이 국민병일 정도였다. 음식물의 흡수가 충분치 못한 상태에서 설사로 영양을 상실하게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콩보다 작은 정로환 몇 알만 있었어도 충분히 치료할 수 있었지만, 국내 제약사 중 정로환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곳은 없었다. 

반면 당시 일본은 정로환을 가정상비약으로 가지고 있을 정도로 보편화된 상황이었다. 이에 이 명예회장은 ‘정로환’을 국내에서 생산하고자 했다. 처음에는 일본 정로환의 성분 표시를 보고 그대로 제조했으나 실패의 연속이었다. 

▲동성정로환 과거제품 조합. 사진 = 동성제약

그러나 이 명예회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일본에 직접 건너가 다이코신약으로부터 정로환 제조 기술을 직접 배워왔고 1972년 봄, 동성정로환(正露丸)이라는 이름으로 국내에 첫 선을 보였다. 동성정로환을 향한 시장의 반응은 뜨거웠다. 국내 제약사들은 앞다퉈 유사제품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에 이 명예회장은 여름철 마케팅에 집중적인 투자를 단행했다. 여름이면 많은 사람들이 피서를 즐기기 위해 해수욕장을 방문한다. 지금은 식수환경이 좋아졌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낯선 곳에서 물을 바꿔 먹을 경우 배탈이 흔했다. 

세월 흘러도 여전한 국민 지사제
‘배탈 설사엔 정로환’ 역대급 광고
한약재 냄새 뺀 새 정로환 ‘시즌2’  

그렇게 해서 탄생된 광고 카피는 ‘배탈 설사엔 정로환!’이다. 그 결과 1972년 정로환은 단일 제품으로만 약 50억원의 매출을 올렸으며, 동성제약이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줬다. 어머니들은 자식이 배탈이 나면 정로환 몇 알을 들이키게 했고, 이때부터 ‘엄마 손’은 ‘진짜 약손’이 되었다. 

▲동성정로환 당의정. 사진 = 동성제약

이후 1980년대 들어서면서 동성정로환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정로환은 생약이 주성분이기 때문에 한약재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가 있다. 이 때문에 어린 아이나 젊은 사람들이 꺼려하는 경향이 있었다. 동성제약은 이를 개선해 1988년 정로환 당의정을 만들어 낸다. 당의정은 정로환의 냄새를 없애기 위해 약 표면에 코팅처리를 한 제품. 덕분에 냄새에 민감한 사람들도 편하게 복용할 수 있게 됐다. 

동성제약 관계자는 CNB에 “정로환은 1972년 출시 이후 50년 세월 동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배탈설사약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지금도 동성제약의 매출을 책임지고 있는 효자제품”이라며 “개선된 생활환경으로 배앓이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해외여행 등 낯선 환경에서의 배탈을 염려해 정로환을 챙기는 이들이 많다. 변화하는 현대인의 특성에 맞춰 연구개발을 지속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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