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김금영 기자) 기계와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신해 2020년에는 약 71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진다는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관한 이야기가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고 있다. 이 가운데 ‘인간 소외’와 ‘실존’을 주제로 끊임없이 화면에 창작열을 불태워 온 청년 작가 오원배가 이 주제를 화면 위에 끌어왔다. 5년 만에 OCI미술관에서 열리는 작가의 대규모 개인전 현장을 찾았다.
작가가 이번 전시를 구상한 건 제4차 산업혁명 시대를 논하는 담론이 채 이뤄지기도 전인 4~5년 전부터다. 이 시간 동안 기계 문명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화면 위에 펼쳐봐야겠다는 계기를 두 가지 맞았다고 한다. 세계를 놀라게 한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결, 그리고 일본에서 쓰인 한 소설이 작가에게 큰 충격을 줬다.
2016년 3월. 5회에 걸쳐 이뤄진 이세돌과 바둑 인공지능 프로그램 알파고의 대국에서 알파고가 4승 1패로 최종 승리했다. 의견은 분분했다. 이세돌이 인간으로서 일궈낸 1승에 주목하는 이도 있었고, “인간의 첫 패배”라며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었다. 작가 또한 많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도 안심이 되는 부분이 있었다. 작가는 “인간은 생활하는 데 보다 편리하기 위해 기계를 만들고 사용해 왔다. 그래도 아무리 기능적인 면이 뛰어날 지라도, 인간의 창조적인 영역인 감성까지 기계가 대신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생각을 뒤집는 일이 생겼다. 니혼게이자이 신문이 주최하는 호시 신이치 공상과학(SF) 문학상의 공모전에서 ‘컴퓨터가 소설을 쓰는 날’이라는 작품이 1차 심사를 통과했다. SF 작가 하세 사토시는 “100점 만점에 60점 정도로 놀라운 수준”이라고 호평했다. 그런데 소설을 쓴 주인공이 인공지능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순간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마쓰바라 진 공립 하코다테미래대 교수 연구진이 2012년부터 인공지능과 협력해 만든 작품 4편을 공모전에 제출했고, 이 중 ‘컴퓨터가 소설을 쓰는 날’이 예심을 통과한 것. 소설을 읽은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을 인공지능이 썼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결과를 지켜본 작가는 “이 일은 기계가 인간의 감성 영역까지 언제든 범접할 수 있다는, 즉 인간의 자리를 완벽히 대체할 수 있다는 일종의 경고음과도 같이 내게 들렸다”고 말했다.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소설의 주인공은 컴퓨터 속 인공지능이다. “그날은 구름이 낮게 깔리고 어두침침한 날이었다”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소설은 쓸쓸했던 인공지능이 인간과 교류하면서 친근해지는 과정을 그린다. 하지만 다시 쓸쓸해진 인공지능은 자신에게 끊임없이 일이 주어지는 상황에 불편한 감정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컴퓨터는 자신의 재미 추구를 우선하고, 인간에게 봉사하는 것을 그만뒀다”는 말로 소설을 끝맺는다.
우리는 일찌감치 다양한 콘텐츠를 통해 기계에 지배받는 세상에 대한 고민을 해 왔다.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1936)는 공장에서 하루 종일 나사못 조이는 일을 하는 찰리의 이야기를 다뤘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조여 버리는 강박 관념에 빠진 찰리는 정신병원에 가게 되는데, 특히 기계의 부속품이 된 듯 톱니바퀴 사이에 낀 채 우스꽝스럽게 돌아가는 찰리의 모습이 유명하다. 10월 리메이크 버전으로 새롭게 돌아온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원작은 1982년 개봉했다. 인간과 복제인간이 혼재된 시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복제인간을 추적하는 과정을 담았다.
그래도 이때는 기계에 지배받는 세상이 ‘아주 먼 미래’의 이야기로 느껴졌다. 하지만 알파고가 이세돌에게 승리하고, 인공지능이 쓴 소설이 공모전에서 예심을 통과하는 현실을 ‘바로 오늘’ 마주하고 있는 우리에겐 “컴퓨터는 자신의 재미 추구를 우선하고, 인간에 봉사하는 것을 그만뒀다”는 인공지능 작 소설 속 문구가 더 이상 멀지 않은, 바로 다가와 있는 현실로 섬뜩하게 느껴진다.
춤추던 인간들, 왜 춤을 멈췄나
이런 현실을 체감한 걸까. 현재를 살고 있는 작가의 화면 속 인간들도 변화됐다. 작가는 산업화에 밀린 소외된 계층의 삶과 애환을 인간 형상으로 표현하는 작업을 과거부터 꾸준히 이어 왔다. 2012년 금호미술관에서 열렸던 초대전에서는 어둡고, 일그러진 형상을 띤, 몸부림치는 인간들이 화면에 등장했다. 처절하게 형상화된 몸부림은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또한 탈을 쓰거나 악기를 부는 등 그래도 인간에게서 역동성이 느껴지는 부분이 조금이나마 있었다.
그런데 이번 전시에서는 인간들이 춤을 멈췄다. 아니, 두 팔을 앞으로 뻗거나, 머리 위에 손을 올리는 등 춤 엇비슷한 동작이 보이기는 한다. 그런데 이전엔 인물들이 제각기 다른 동작을 취해 개성과 의지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면, 이제 인간들은 모두 동일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군무라고 하기엔 그들의 시선엔 초점도 없다. 정면을 응시하지 못한 채 아래를 바라보거나 눈을 감는 등 적극적인 의지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전 인간들의 춤 같은 몸부림이 “나 괴롭다”고 외치는 것처럼 보였다면, 이번 화면 속 인간들은 제어된 동작 아래 목소리를 삼키며 침묵을 지키는 것 같다.
작가는 “이 인물들에는 실제 모델들이 있다”고 말했다. 그 말인즉슨 실제 현실 속 그들은 각각의 개성이 있었을 터인데, 그림에는 공장에서 찍어져 나온 생산품처럼 누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무채색으로 획일화됐다. 이 가운데 오히려 색깔이 다채로워 보이는 건 기계들이다. 인간들을 둘러싼 배경으로 사다리, 벽, 공장 기계 등이 등장한다. 대부분이 갈색조 톤이 전체적으로 어둡긴 하지만, 그래도 무채색의 인간들 가운데 보다 활기를 띤 모습이다.
그리고 마침내 작가의 화면에서 처음으로 로봇(인조인간)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인조인간들이 오히려 춤을 추는 것 같은 모습이다. 대체로 무표정인 가운데 슬쩍 미소를 머금은 인조인간도 보인다. 인간보다 역동적이다. 작가는 “그림을 보면 인간이 못하는 제스처를 기계가 하고, 기계의 제스처를 오히려 인간이 따라가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이 자신들이 만든 기계의 통제를 받고, 점점 의지를 잃어가는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즉 각각의 몸부림을 멈춘 인간들은 기계의 부속품처럼 살아가는 데 점점 익숙해지는 반면, 반대로 역동성을 보이는 인조인간들은 인간화되면서 인간의 자리를 대신하는 기계 문명을 상징한다.
이 모든 광경을 담은 32m 길이의 대작이 전시된 1층에 들어서는 순간 형언할 수 없는 중압감이 가슴을 누른다. 화면 자체엔 흰 여백이 많지만, 가슴은 꽉 찬 느낌이다. 그리고 이 불편한 감정의 근원은 불안감에서 비롯된다. 작가가 걱정하는 오늘 그리고 바로 내일의 우리가 처한 현실에 공감하게 되는 것. 영화 ‘매트릭스’의 빨간약과 파란약이 떠오른다. ‘매트릭스’는 인간의 기억마저 기계와 인공지능에 의해 입력, 삭제되는 세상, 즉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상현실이다. 빨간약을 먹으면 가상현실에서 깨어나고, 파란약은 모든 걸 잊고 가상현실에서 살아가게 만든다. 극중 키아누 리브스가 맡았던 네오는 빨간약을 선택했지만, 작가의 화면 속 춤추는 인조인간들은 무채색의 인간들에게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너희를 더 편하게 해줄 수 있으니, 어서 파란약을 먹어”라고.
알고 보면 ‘스스로’ 화면에서 사라진 사람들
1층 공간이 현재의 기계 문명과 인간이 처한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면, 2층에 전시된 작품들은 이 현실을 만든 근원에 보다 직접적으로 접근한다. 전시 공간에 들어서면 사람 한 명의 온기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화면을 채운 건 삭막한 건물들이다. 파리 유학 시절 평일엔 학교, 주말엔 거리를 지겹도록 쏘다니며 산책을 했다는 작가는 이번엔 한국의 도시를 쏘다녔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들여다보고, 이를 그림으로 그리며 참견해 온 작가가 한국의 도시에서 발견한 기계 위주의 삶이 초래한 ‘인간 소외’의 풍경들이다.
한 예로 어디를 가나 볼 수 있는 CCTV가 보인다. 본래는 치안을 위해 설치됐지만, 사생활 침해 논란도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작가 또한 CCTV에서 관음을 당하는 듯 불편함을 느낀 적이 있다. 그는 “CCTV 카메라에서 빨간색이 깜빡깜빡할 때 그것이 꼭 나를 감시하는 눈초리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이는 나뿐 아니라 누구나 한 번쯤 느껴봤을 오싹함이다. 인간은 보다 편리하기 위해, 보다 안전하기 위해 기술을 발전시켰지만 어느새 기계에게 감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화면엔 롤러코스터도 보인다. 본래 소란스러워야 할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에는 침묵만 가득하다. 그리고 이 거대한 구조물을 아래서 위로 바라본 작가의 시선은 정작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 온 인간 소외의 현실을 더욱 중압감 있게 느끼게 한다. 때로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선도 보이는데, 이 화면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높은 곳에서 떨어질 것 같은 아찔한 불안감이 마음을 휩쓴다. 이처럼 화면에 인간은 등장하지 않지만, 오늘날의 인간이 처한 위태위태한 상황을 화면에서 느낄 수 있다. 또 다른 화면에서는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엮인 전깃줄이 하늘을 제대로 쳐다볼 수도 없게 만든다. 이 모든 풍경들은 작가가 현실에서 직접 발견한 곳들이다.
기계의 지배를 받는 획일화된 인간의 모습은 바로 주위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지금 고개를 돌려 옆 사람의 모습을 봐도 키보드와 모니터에, 스마트폰에, TV에 시선이 꽂혀 있다. 주변 풍경을 바라보며 걷던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바라보며 걷는 공통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빗댄 신조어 스몸비(스마트폰 좀비)도 등장했다. 언제 어디서든 편하게 정보를 얻고 연락을 취하기 위한 용도로, 즉 인간을 편하게 하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진 스마트폰이건만, 정작 이 기계에 더 매달리고 스스로 종속되는 건 인간이다. 그리고 작가는 우리가 직접 초래한 풍경을 과장이나 축소 없이 직설적으로 보여주면서 현재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기계와 인간 사이를 날아다니는 나비는 자유롭다
3층 전시장에는 기계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작가가 자유롭게 풀어낸 일상의 풍경들이 펼쳐진다. 1, 2층 전시장에서의 무거움에서 벗어나 한결 산뜻해진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생활 곳곳에서 마주친 주변 인물과 소소한 사건을 기억하고, 섬세한 감성으로 포착한 드로잉 37점은 그래도 창의적인 능력을 지닌 인간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그리고 현재 주어진 상황을 마냥 비관적으로만 바라보지 않는 작가의 태도는 1층 그림 속 작은 나비에게서도 읽을 수 있다. 32m 길이의 대작에서 손바닥만한 크기의 작은 나비의 존재는 미미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이 나비야말로 작가가 이번 전시에서 가장 주목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제4차 산업혁명이 도래하는 현 시대의 청년들은 기계와 일자리 경쟁을 벌여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교육은 소용이 없다”며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이렇게 살아남아야 한다”는 책, 방송, 강연이 쏟아지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인간 자체의 존재와 존엄성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어떻게 기계를 이겨야 하나’에만 골몰한다.
이 가운데 작가는 화면에 나비를 날렸다. 정면을 바라보지 못하고 눈을 아래로 내리깐 청년들 사이를 나비가 날아다닌다. 또 기계 사이도 날아다닌다. 획일화되고 위축된 화면 속 나비는 그 무엇의 통제도 받지 않는 듯 움직임이 자유롭고 또 아름답다. 특히 무채색 청년들과 어두운 톤의 기계 사이 노란색, 파란색 나비의 존재는 빛을 발하며 삭막함 속 포근함을 느끼게 해준다. 이 나비는 작가가 바라보는 작은 희망의 불빛이다.
작가는 “기계에 삶을 잠식당한다는 불안감이 오늘도 마음을 치고 들어오는 암울한 시대지만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고 싶지 않았다. 화면 속 작지만 빛을 발하며 존재감을 떨치는 나비는 기계와 인간 사이를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마냥 상황을 비관 또는 낙관만 하지 않고 기계와 인간 사이 공존의 가능성을 찾는 움직임이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앞서 8월 작가는 고재석 동국대 국어교육과 교수와의 대담에서 “미래는 이미 우리에게 와 있다”며 “‘기계와의 공존을 통해 인간의 고유한 영역이 보호될 수 없는가’ 하는 물음과 함께 인간과 기계의 관계가 야기한 불안과 희망 모두를 작업에 지금 이 시점에 담고 싶다”고 말했다. 이후 그림에 인간과 기계 그리고 나비를 그렸다. 나비의 날갯짓이 날씨를 변화시킨다는 ‘나비효과’ 이론처럼, 32m 속 나비의 존재는 매우 미미하지만 이 작은 희망의 불빛이 점차 크게 타올라 세상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꿔나갈 힘을 다지기를 작가는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전시는 OCI미술관에서 12월 23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