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김금영 기자) 혐오(嫌惡). 싫어하고 미워하는 감정. 이 혐오가 현 사회에 가장 강력한 감정으로 만연하게 퍼져 있다. 혐오가 불러일으킨 범죄들도 있다. 지난해 강남역 인근 건물 공용화장실에서 벌어진 20대 여성 살인 사건 뒤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더욱 뜨거워지면서 ‘여성 혐오’에 대한 사회적 담론이 다양하게 형성됐다. 그런데 여성을 혐오하는 태도와 가치관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점점 이야기가 강해지더니 ‘남성 혐오’가 경쟁 양상처럼 대립하기 시작했다. 호남 지역과 여성을 혐오하는 대표적인 극우 사이트 일간베스트와 여성우월주의를 주장하는 사이트 워마드는 서로를 김치녀, 한남충(한국 남자는 벌레)이라 부르며 경멸한다.
여성 혐오와 남성 혐오가 다가 아니다. ‘외국인 혐오’ ‘성 소수자 혐오’ ‘노인 혐오’ ‘장애인 혐오’ 등 어떤 대상 뒤에 마치 합성어처럼 혐오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따라붙고 있다. 마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잠재적인 혐오의 우려가 있는 듯 그 범위가 무섭도록 확대되는 게 섬뜩하다. 이젠 “좋은 데 이유가 있나”라는 말보다 “싫은 데 이유가 있어야 하나”라는 말이 주변에서 더 흔히 들린다.
뮤지컬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에도 혐오의 대상으로 마츠코가 등장한다. 국내에 영화로도 잘 알려진 이 작품은 일본 소설가 야마다 무네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주인공 마츠코는 중학교 국어 선생이다. 그녀는 동료 선생 사에키와의 데이트 약속에 설레지만, 자신의 학생 류 요이치의 거짓말, 그리고 사에키의 외면, 학교 교장과 교감 권력의 억압 속에 학교를 떠나게 된다. 그리고 이건 불행의 시작이었다. 이들은 왜 마츠코를 혐오했을까?
사에키와 학교 교장, 교감은 불안감에서 파생된 집단화 혐오의 양상을 보여준다. 학교 교장은 마츠코를 겁탈했고, 교감은 이를 묵인했으며, 사에키는 돈을 훔쳤다는 모함을 받는 마츠코와의 데이트 약속을 일방적으로 취소하며 거리를 뒀다. 현재 자신의 위치에 위협을 끼칠지 모른다는 생각에, 자신을 지키려는 자기애가 발동한 이들은 똘똘 뭉쳐 집단을 구성했다. 그리고 마츠코를 올바르지 못한, 혐오의 대상으로 바꿔버렸다. 평범한 마츠코가 ‘혐오스런’ 마츠코가 되는 순간 자신들의 타당하지 못한 행동을 올바른 정의를 행하는 수단으로 합리화할 수 있기 때문. 그렇게 이들은 한 마음으로 마츠코를 몰아내며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류 요이치는 다른 경우다. 그는 오히려 마츠코를 사랑했다. 하지만 사에키와의 데이트 약속으로 설레는 마츠코의 모습이 그에겐 질투로 어그러져 혐오스럽게 비춰지기 시작했다. 류는 독백을 통해 “선생님이 미워졌다”고 털어놓는다. 그리고 질투는 분노와 증오, 더 나아가서는 혐오로 바뀌어 마츠코를 곤경에 빠뜨린다.
마츠코는 자신을 혐오하는 사람들에게 “왜?”라고 울부짖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다. 김종갑의 저서 ‘혐오 감정의 정치학’에서는 혐오와 분노의 감정을 구분한다. “분노가 옳고 그름을 따지며 정의의 관념을 먹고 자라는 사회적인 성격을 가졌다면, 혐오는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즉 동물적인 감정에 가까운 것으로 ‘왜’나 ‘이유’가 사라지면서 언어가 파괴되고 소통이 거부된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마츠코가 류에게 잘못한 것은 없지만, 이 혐오의 감정이 류의 마음에 번지면서 마츠코는 순식간에 죄인으로 전락한다. 현 사회에서도 이 감정에서 파생되는 범죄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데이트 폭력, 이별 범죄로 이야기되는 사건들은, 상대방을 자신의 소유물로 인식한다. 상대방이 자신을 떠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했을 때 느끼게 되는 무차별적 혐오의 감정이 돌이킬 수 없는 범죄로 이어진다. 소유물에 ‘왜’라는 이유는 붙이지 않는다. 그저 마음에 안 들면 잘못한 것. 혐오와 전혀 거리가 멀어 보이는 사랑과 애정이라는 감정이 혐오로 발길을 들였을 때 초래될 수 있는 무서운 결과다.
‘혐오스런 마츠코’가 아닌 마츠코의 ‘혐오스런 일생’
집 바깥에서 혹독한 상황을 마주한 마츠코는 집에서는 편했을까? 그녀를 가장 외롭게 만들었던 공간이 바로 집이다. 아픈 동생 쿠미를 돌보기 위해 온 가족의 관심과 사랑이 몰렸다. 마츠코는 동료 선생과의 데이트 소식을 쿠미에게 말했다가 “눈치없다”고 아버지에게서 야단을 맞는다. 서러운 마음이 쌓이고 학교에서도 부당한 일을 당하면서 집을 나오게 됐지만 여전히 그녀에게 돌아오는 건 “쿠미에게 미안하지도 않아?”다. 가족이 보기에 아픈 쿠미는 모든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약자였고, 이런 쿠미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마츠코는 항상 괜찮아야 하고, 모든 걸 감내해야 하는 강자였다. 마츠코 스스로도 매우 외롭고 약한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환경은 마츠코가 조금씩 ‘자기혐오’에 빠지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무언가 되고 싶은,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지만 달성되지 않을 때 ‘난 왜 이럴까’라는 패배, 열등의식에 빠져드는 현대인이 많다. ‘뭘 해도 되지 않을 것’이라는 좌절의 화살표가 계속해서 자신에게로 향할 때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자기혐오의 감정이 쌓인다. 끊임없이 노력해도 가족의 관심과 사랑을 받을 수 없었던 마츠코는 “난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라며 점점 위축돼 갔다. 극중 그녀는 유독 가족을 마주할 때 고개를 숙여 땅을 볼 때가 많았다.
하지만 마츠코는 자기혐오에 계속 빠져들기보다는 세상으로부터 사랑받기 위해, 더 나아가서는 자신을 혐오하는 세상을 사랑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모습이다. 남들이 손가락질 하는 마사지걸로 일할 때 “가장 행복했다”는 고백이 눈에 띈다. 이 고백에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순간 나오는 마츠코의 고백. “나로 인해 치유 받는 사람들이 있어서 행복했어.” 마츠코는 자신이 받은 혐오를 복수의 마음, 또는 편견의 시선으로 세상에 돌려주기보다 사랑의 마음으로 품기 위해 나름의 방식으로 노력한 것.
그녀는 자신을 폭행한 테츠야, 마약에 빠져들게 한 오노 데라, 결혼하자고 청혼했다가 자신을 버린 이발사 켄지, 그리고 모든 일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거짓말로 마츠코를 곤경에 빠뜨린 류에게조차 아낌없이 사랑을 주며 “난 절대 너를 떠나지 않아” “다시 새롭게 시작하자”고 말한다.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는 마츠코의 모습은 누군가에게 의지하려 애쓰는 것 같다. 하지만 마츠코에게 미안한 감정을 가진 테츠야, 마츠코를 이용했지만 동시에 필요로 한 오노 데라, 함께한 순간만큼은 마츠코를 사랑한 켄지, 한평생 마츠코를 마음에 품은 류까지 오히려 마츠코에게 의지했던 건 주위 사람들. 계속해서 쏟아지는 마츠코의 큰 사랑을 감당하지 못하고, 마츠코의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이들은 마츠코를 혐오함으로써 두려운 현실에서 도망쳐 버린다.
마츠코가 죽은 뒤 사람들은 그녀를 ‘혐오스런 마츠코’라고 부르며 킥킥대거나 얼굴을 찌푸린다. 그녀를 잘 모르는 사람들조차 “혐오스럽다”고 쉽게 말을 내뱉는다. 하지만 실상은 누구보다 사랑스러웠던 그녀다. ‘혐오 감정의 정치학’은 개인의 성향과 취향에 따라 달라지는 혐오의 대상을 짚었다. 그 예로 홍석천을 이야기한다. 2000년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공개한 홍석천은 사회의 비난 속에서 사라져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동성애를 주제로 한 콘텐츠를 TV, 영화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고, 홍석천은 다시 방송 활동을 하며, 반대로 동성애를 혐오하는 사람이 혐오의 대상으로 손가락질을 받는다. 과거와는 완전히 뒤바뀐 상황.
결국 “혐오스러운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단지 어떤 대상을 바라보는 혐오의 감정과 태도만이 있고, 그런 감정과 태도 또한 고정적이 아니라 계속해서 변화하는 과정에 있다는 것. 마츠코 또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시선을 마주했고, 처음엔 따뜻했던 시선이 순식간에 차가운 혐오로 변하는 일들을 겪었다. 진짜 혐오스러운 건 마츠코가 아니라 그녀의 일생이었고, 이 ‘혐오스러운 일생’을 만든 건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의 태도가 아니었을까.
뮤지컬 '혐오스런 마츠코'의 김민정 극작·연출은 “극의 주요 화두에는 ‘혐오’가 있다. 마츠코를 혐오스럽다고 규정짓는 건 외부 시선이다. 여러 편견이 가득한 사회는 그녀를 몰아내고 결국 파국에 치닫는다”며 “사회가 이토록 혐오스럽지 않고 누군가 마츠코를 잡아줄 수 있었다면 그녀는 파괴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건 단지 마츠코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다. 단순히 어떤 노숙자에게서 자신과 같은 향기가 난다고 무차별 폭행이 이뤄진 일이 실제 현실에서 있었다. 이런 ‘혐오 사회’에 지금 우리는 살고 있다”며 “극은 마츠코라는 개인을 통해 혐오 사회를 투영하며 많은 생각해볼 거리를 던진다. 지금 이 시점에 진지하게 우리가 고찰해봐야 할 문제”라고 강조했다.
세상에 수많은 잠재적인 ‘혐오스런 마츠코’가 존재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만들어지고 있다. “왜 마츠코를 사랑해주지 않았냐”는 극 말미 쇼의 눈물 섞인 외침은 그래서 더 처절하다. 무차별적 혐오가 아닌 사랑으로 끌어안는 세상을 꿈꾼 외침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