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김금영 기자) 파란 하늘을 제대로 본 게 언제였을까. 연일 미세먼지와 황사로 하늘은 뿌옇고 숨을 쉬기에도 답답해 연신 콜록댄다. 도심 대로변에 설치된 나무들은 삐쩍 말랐고, 눈에 들어오는 건 온통 고층 빌딩의 회색빛이다. 이 가운데 청량한 초록빛과 푸른빛을 가득 담아내며 자연의 숭고함과 아름다움을 끌어온 전시가 있어 눈길을 끈다.
허구영이 ‘낭만정원’에서 찾은 순수한 즐거움
갤러리 문을 열자마자 마치 밀림 같은 수풀이 펼쳐졌다. 순간 ‘전시장을 잘못 찾아왔나’ 싶어 다시 확인해보니 제대로 온 게 맞다. 키를 훌쩍 넘는 화초 사이 좁다랗게 마련된 길을 따라 걷는데 곳곳에 그림이 설치된 것을 발견했다. 전시장 속 화초와 꼭 닮은 그림도 있고, ‘저건 무슨 꽃일까?’ 궁금증을 자아내는 그림도 있다. 처음엔 익숙하지 않은 전시장 내부에 경계심이 들었다가 걸음을 옮길수록 화초와 그림을 함께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호기심이 더 커졌다. 풀들을 헤치고 들어가니 허구영 작가가 서 있었다.
‘허구영의 낭만정원’전이 열리는 누크갤러리에서 그를 만났다. 작가는 본래 꽃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꽃, 즉 자신을 둘러싼 자연은 늘 경외의 대상으로 언젠가는 꼭 화폭에 담아보고 싶은 소재였다. 1990년대 중반에 꽃을 주제로 한 ‘꽃이 있기에’ 그룹전에 참여하며 발을 들여놓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후 꽃 그림을 본격적으로 사람들에게 공개한 적은 없었다.
그러다 올해 7월 ‘낭만정원’과의 만남이 이뤄진다. 이번 전시의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다. 미술대학 아는 후배가 화원을 연다고 했다. 이름은 낭만정원. 호기심에 찾아갔다가 화원을 가득 채우고 있는 꽃들을 바라보는 순간 형언할 수 없는 감동과 평안이 가슴 안에 가득 찼다고 한다.
“그때의 감정을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꽃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고 늘 생각했고, 조금씩 그리기도 했지만 적극적으로 행동에 옮기지는 않았었어요. 그런데 화원에 들어서는 순간 붓을 정말 잡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후배에게 양해를 구하고, 낭만정원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본래 그리던 그림이 아닌, 전혀 다른 그림을 그리면서 제게 어떤 변화가 올지 궁금해지면서 두근두근했죠.”
사람들은 꽃 그림을 좋아하면서도 “너무 흔하다” “꽃 그림은 다 비슷비슷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 가운데 작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건 ‘체험’과 ‘장소성’이다. 보지 않은 걸 본 척 하거나, 직접 듣고, 느끼지 못한 것을 인위적으로 꾸며내는 것을 경계한다고 했다.
“멋진 풍경을 보고 사진을 찍거나 빠르게 스케치를 한 뒤 이를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는 경우들도 있어요. 그게 옳지 못하거나, 틀리다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다만 저는 현장에서 눈앞에 펼쳐진 것들을 보고, 그것을 통해 제가 체험한 감동을 바로 화면에 옮기는 과정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꽃과 풀의 향기, 그리고 이를 바라보고 느끼는 저. 낭만정원 자체를 작업실로 만든 이유도 여기에 있죠.”
작가의 기존 작업을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 이번 전시는 놀랍다. 작가는 개념미술 분야 설치 작업을 주로 선보여 왔다. 느낌은 전체적으로 어두웠고, 추상적인 작업이 주를 이뤘다. 90년대 한 번의 그룹전 이후 개인전에서 그의 화면에 꽃이 등장한 건 이번이 처음. 그래서 “허구영이 꽃 그림을 그렸다고?”라며 놀란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이를 작가는 “낭만을 찾은 여정”이라 설명했다. 앞서 언급했던 화원을 처음 봤을 때 느낀, 뭐라 설명할 수 없었던 감정이 무엇인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느끼게 됐다는 것.
“감정과 자아의 해석을 위주로 한 낭만주의 미술은 근대미술의 기로를 이루는 장르죠. 하지만 저는 이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어요. 감정을 철저히 배제하고 그림을 그렸죠. 작가로서 철학적·이성적 사고가 중요하다고 여겼어요. 물론 지금도 이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 부분에만 집중하느라 제가 그간 돌아보지 못했던 감정도 소중하다는 걸 잊고 있었어요. 다름 아닌 그림을 그릴 때의 순수한 즐거움이요.”
작가는 중·고등학교 때 하교 시간이 다가오면 늘 설렜다. 그림 그리는 것에 푹 빠져 공부시간에 집중을 못할 정도로 머릿속에 그림 생각이 가득했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달려가 그림을 그렸고, 무엇을 그리든 행복했다. 그런데 ‘작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난 뒤 어느덧 이런 즐거움에서 서서히 멀어진 자신을 발견했다. 그렇게 잊고 있었던 행복을 낭만정원에서 다시 찾았다.
“예전에 학교 끝나고 그림 그리러 달려갔던 것처럼 시간이 날 때마다 낭만정원으로 갔어요. 눈에 보이는 것에 순수하게 호기심을 갖고, 그때그때 끌리는 대로 마음껏 그림을 그려본 게 정말 오랜만이었어요. 여러 외부적인 환경이나 조건을 다 잊어버리고, 그저 그림이 좋아서 신나게 그렸던 어린 시절의 저로 돌아간 거죠. 이게 바로 잊고 있었던 저의 낭만이었어요.”
작가가 이번의 낭만을 통해 기존 선보여 왔던 작업과 완전히 선을 긋는 건 아니다. 이번 ‘낭만정원’ 작업과 기존 개념미술 작업을 잇는 시도도 발견된다. 1층에서 2층으로 이어지는 공간에 꽃가루가 묻은 사진이 전시됐다. 손에 묻은 꽃가루를 통해 작가가 자연에 흠뻑 취해, 그림을 그리는 순수한 즐거움에 빠지게 되는 과정을 암시할 수 있게 돕는다.
자신이 낭만정원에서 느낀 행복을 전하고 싶어 낭만정원 자체를 전시장에 가져오는 시도를 했다. 그냥 그림만 가져오는 게 아니라, 후배의 도움으로 낭만정원에서 작가와 함께 했던 식물을 옮겨 왔다. 전시장을 열자마자 초록빛이 가득했던 건 이런 연유에서다. 작가는 “이번 낭만정원은 프로젝트성으로 기획돼서 일단 전시가 끝나면 마무리된다. 하지만 앞일을 지금 알 수 없듯 앞으로 또 다른 낭만정원이 등장할지는 시간이 지나봐야 알 것 같다”고 말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감동이 아닌, 순수한 동심에서 찾은 허구영의 낭만. 화초들 사이 그려진 작가의 자화상은 더없이 행복해 보인다. 전시는 누크갤러리에서 12월 17일까지.
전명자, 자연으로 떠나는 ‘그림 속의 가족 여행’
전명자 작가는 ‘오로라 작가’라 불려 왔다. 1995년부터 11년 동안 프랑스에서 거주하면서부터 자연과 인간이 함께 공존하는 초현실적 유토피아를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일생에 한 번 제대로 보기도 힘들다는 오로라를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한 감동을 잊지 못해서다.
“오로라를 보기 위해 열 번을 시도한 결과 네 번 성공했어요.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았던 그 광경을 잊지 못해요. 자연은 우리를 가득 품어주고 있었고, 그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작은 존재였죠.”
이번엔 그가 이 자연 속에 함께 하는 가족들을 화폭에 끌어 왔다. 작가는 “50년 작업의 결산”이라고 말했다.
“늘 곁을 지켜준 가족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작업을 이어오지 못했을 거예요. 가족 또한 제 행복의 원천이죠. 그래서 자연과 가족이 함께 하는 ‘그림 속 가족여행’이야말로 진정한 유토피아로 향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전시는 크게 세 가지 시리즈를 선보인다. ‘오로라를 넘어서’는 아이슬란드에서 작가가 오로라를 직접 체험해 느꼈던 황홀경을 담았다. 마치 신비로운 깊은 심연의 바다 또는 드넓은 우주의 은하수를 연상케 한다. 또한 그 속 행복했던 작가의 삶의 흔적을 담았다. 뜰 앞의 마을과 분수와 놀이터, 오래된 골목, 숲을 거니는 기수들 그 속의 사람들이 행복한 표정으로 오로라를 바라본다.
‘자연의 조화’는 꽃과 나무, 하늘과 어우러진 정원과 공원에서 사람들이 행복해 하는 모습을 담았다. 화목한 가족, 사랑을 나누는 연인,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피아노와 하프를 연주하는 여인, 회전목마를 타는 아이들 등 평범한 일상에서 행복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 모습을 촬영하고 있는 사람이 반복적으로 발견된다. 이를 작가는 “행복을 발견하고 간직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설명했다.
‘금빛 해바라기’에는 노란 빛깔의 해바라기가 가득하다. 수많은 꽃들 중 해바라기를 택한 이유가 있다. 작가는 “해는 모든 만물에 에너지를 쏟아준다. 그 에너지를 가장 강력하게 받는, 태양과 가장 가까운 꽃이 해바라기다. 이 해바라기를 통해 자연이 전해주는 행복의 에너지를 전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선화랑 측은 “이번 전시에서는 특히 아름다운 자연 속 행복하고 다정한 가족과 이웃들의 모습이 강조돼 있다. 더불어 유럽 활동에서 체화된 색채감, 우리 고유의 색감, 북극의 오로라 등 작가에게 영향을 준 수많은 색채적 경험들이 오묘한 색감과 더 채도 높은 강렬한 색채로 표현된다”며 “자연에서 수많은 감정을 느낀 작가가 구축한 유토피아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전시는 선화랑에서 12월 6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