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 임종석發 ‘UAE 나비효과’…벼랑 끝 중동 기업들
‘시아파 vs 수니파’ 불똥 맞나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이 1월 2일 문재인 대통령이 주재하는 새해 첫 국무회의에 참석해 있다. 사진 = 연합뉴스
(CNB저널 = 도기천 기자) 자유한국당·국민의당·바른정당 등 야3당이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의 아랍에미리트(UAE) 방문 의혹을 두고 국회 국정조사를 요구하면서 중동에 진출했거나 진출할 계획인 한국기업들이 노심초사하고 있다. 사실 규명 여부를 떠나 국정조사 자체만으로도 신뢰를 중시하는 아랍권 국가들과의 교역에 차질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CNB가 ‘태풍의 눈’으로 부상한 UAE 사태의 향배를 들여다봤다.
나비의 날개짓이 폭풍우를 불러온다? 임종석 비서실장의 UAE 방문이 ‘나비 효과(Butterfly effect)’를 예고하고 있다. 임 실장이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UAE 왕실과 만나 문재인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고 돌아 온 뒤 의혹은 좀체 가라앉지 않고 있다.
야3당의 요구로 국정조사가 실시될 경우, 파장은 걷잡을 수 없을 전망이다. 이명박 정부와 UAE 간의 원전개발 이면계약설, 박근혜 전 대통령의 MB(이명박) 뒷조사설, 문재인 정부와 UAE 간의 탈원전 갈등설 등 제기된 의혹들이 전부 매머드급 수준이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호사가들은 두 대(여야)의 차량이 마주보고 달리는 ‘치킨게임’에 비유하고 있다. 어느 한쪽이 핸들을 틀지 않는 한 국익에 큰 손실을 입게 된다는 점에서다.
▲자유한국당 김성태 원내대표가 2일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임종석 비서실장의 UAE 방문과 관련, “국정조사를 비롯해 국회 차원에서 모든 가능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의혹을 밝히겠다”고 강조하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이번 사태의 뿌리는 20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한국전력·두산중공업·현대건설·삼성물산으로 구성된 한국 컨소시엄은 프랑스와 일본을 제치고 186억달러(21조원)짜리 140kw급 신형 원전 4기 건설사업을 UAE로부터 수주했다. 2016년에는 한전이 이 원전의 60년 운영권 계약을 494억달러(54조원)에 수주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 UAE 측은 아부다비 주재 한국대사관 등을 통해 우리 정부에 원전사업에 관해 항의의 뜻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우리 정부는 지난달 9일 임 실장을 특사 자격으로 UAE에 보내 모하메드 왕세제 등과 회담을 가졌다.
회담의 구체적인 내용은 알려진바 없다. 청와대는 “우호증진을 위해 대통령 친서를 전달하러 갔을 뿐”이라는 입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매머드급 의혹들…韓기업 애먼 피해
청와대가 입을 닫으면서 UAE 왕가 비자금 관련설, 리베이트 마찰설, 한국업체 공사대금 체불설, 대북접촉설 등 갖은 의혹이 쏟아졌지만, 지금껏 나온 얘기들을 종합해보면 의혹의 중심은 ‘원전’으로 모아지고 있다.
▲임종석 비서실장이 12월 10일 셰이크 모하메드 빈 자이드 알 나흐얀 UAE 왕세제와 만나 악수하고 있다. 사진 = 청와대
우선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UAE가 항의했을 가능성이다.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 공론화가 시작되면서 이명박 정부 시절 UAE와 체결했던 각종 공식·비공식 원전 관련 계약들을 현 정부가 조정하려는 과정에서 UAE 측이 반발했다는 것.
특히 원전을 수주할 때 옵션으로 내건 군사지원을 현 정부가 축소하는 과정에서 마찰이 생겼을 수 있다. 아크 부대에 파병하려고 했던 군 간부들의 파병이 최근 보류돼 이들이 각 소속부대로 복귀했다는 사실이 이런 의혹의 배경이 됐다.
두번째는 이명박 정부와 UAE 간의 이면계약을 문재인 정부가 뒤늦게 발견했을 가능성이다. 당시 원전 사업 수주의 옵션으로 핵폐기물과 폐연료봉 국내 반입, 군사적 지원, 리베이트 제공 등의 내용을 담은 이면계약이 있다는 설이다. 박근혜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이 이명박 정부의 UAE 원전 수출 과정에 거액의 리베이트가 있었다는 진위를 조사한 정황이 알려지면서 이런 의혹은 증폭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2월 26일 청와대 본관 충무실에서 열린 국무회의 구성원 초청 만찬 행사에 임종석 비서질장과 입장하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특히 한국전력의 반박에도 불구하고 핵폐기물 처리를 약속했을 가능성이 쉬 가라앉지 않고 있다. 원전 건설 계약 때 핵폐기물 처리를 조건으로 내거는 일이 국제사회에서 종종 있는 일이기 때문. 업계 관계자는 “러시아 등 일부 국가는 수주에서 유리한 조건을 따내기 위해 핵폐기물의 자국 내 처리를 먼저 입찰조건으로 제시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같은 상황을 뒤늦게 알게 된 문재인 정부가 급히 임 실장을 UAE에 보냈다는 것이다.
진실이 중요한 게 아니다?
따라서 어느 가설이 맞든지 간에 국정조사가 열리게 되면 ‘원전 게이트’로 비화할 소지가 있다. 이렇게 되면 한국 기업들은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예상된다.
중동 지역에서 플랜트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한 건설사 임원은 CNB에 “비공개와 비밀을 중시하는 중동국가들의 외교관례로 볼 때, 사실규명 여부와 상관없이 국정조사 자체가 외교 문제가 될 수 있다”며 “사실상 왕권국가인 UAE는 의사결정권을 왕실이 갖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계약이 뒤집어 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특히 중동 시장이 우리 건설사들의 수주 텃밭이라는 점에서 우려가 커지고 있다. 해외건설협회에 따르면 2017년 한 해 동안 해외시장에서 총 287억 달러를 수주했는데, 이중 중동 수주가 143억 달러에 이른다. 건설업계가 해외사업 다각화에 나서고 있지만 여전히 전체 물량의 절반은 중동에 몰려있다. 주로 현대건설 대우건설 GS건설 한화건설 대림산업 SK건설 등 대기업들이 진출해 있다.
이 중에서도 이란으로부터의 수주액이 가장 큰데, 공교롭게도 시아파 국가인 이란은 수니파 국가인 UAE와 걸프 섬 3개를 둘러싸고 영유권 분쟁을 겪는 등 대립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 UAE 방문 의혹이 불거지면서 박근혜 정부 시절 UAE와 상호군수지원협정(MLSA)을 체결한 사실이 드러난 상태다. 이 협정이 원전 거래의 대가로 밝혀질 경우, UAE와 대립하고 있는 이란 등과 사업을 추진 중인 한국기업들의 피해가 우려된다.
▲UAE 원전 의혹을 다루는 국정조사가 열릴 경우, 중동에 진출한 한국기업들이 애먼 피해를 입을 수 있다. 지난 2016년 11월 사우디의 사빅 본사를 방문해 유세프 알 벤얀 부회장(가운데)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최태원 SK 회장. 사진 = 연합뉴스
최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예루살렘 이스라엘 수도 선언’ 이후 이란에 진출한 한국기업들이 피해를 본 사례는 이런 가능성의 근거가 되고 있다. 현대엔지니어링이 2017년 3월 이란에서 수주한 사우스파 12단계 프로젝트는 미국과 이란의 긴장관계로 공사비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고, 대림산업이 2016년 가계약을 체결한 2조2800억원 규모의 이란 박티아리 댐·수력발전 플랜트 공사는 본계약이 미뤄졌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임 실장을 만난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을 것이란 추측을 낳고 있다. 최 회장은 임 실장의 UAE 방문 직전에 임 실장을 만나 기업현안 등에 관한 애로점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SK 측은 “두 사람의 회동이 UAE 사업과 관련된 것은 아니다”며 선을 그었지만, 재계 안팎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중동 관련 사업의 어려움을 호소한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SK그룹은 SK이노베이션·SK건설·SK플래닛·SK네트웍스 등 계열사별로 중동에서 건설, 에너지, 해운 등의 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최근 사업 확장을 위해 현지 정부 및 기업 관계자들과 지속적으로 접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포스트차이나’ 찾기에 분주한 국내 유통업계도 이번 사태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 중동 지역은 다른 지역과 달리 높은 인구증가율을 유지하고 있어, 유통대기업들에게는 성장 잠재력이 풍부한 미래먹거리로 꼽힌다.
최근 이란 테헤란에 편의점 브랜드 CU 1호 매장을 오픈한 BGF리테일은 사업확장을 노리고 있으며, 이마트는 이란, 사우디 등지에서 화장품 전문점브랜드 ‘센텐스’ 매장을 올해 안에 5~6곳 개점할 계획이다. 아모레퍼시픽은 2016년 두바이에 ‘아모레퍼시픽 중동법인’을 설립해 최근 에뛰드하우스 1호점을 열었으며, 가장 먼저 진출한 LG생활건강은 이미 중동에서 약 60여개의 매장을 운영 중이다.
유통업계 한 관계자는 CNB에 “중국의 사드 보복 장기화 등으로 중동으로 눈을 돌리고 있던 차에 UAE 원전 의혹, 미국의 예루살렘 (이스라엘) 수도 선언 등으로 현지 분위기가 악화되고 있어 고민이 크다”고 전했다.
건설업계 관계자는 “세계경기 호조와 국제유가 강세에 힘입어 중동산유국들의 발주량이 올해 약 30%가량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이처럼 해외사업의 중요성이 커진 때에 UAE 의혹이 터져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다. 정치권이 국익을 먼저 생각하는 지혜를 발휘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도기천 기자 babsigy@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