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13일차 (그린델발트 → 리히텐슈타인 → 안데르마트 → 글루링겐 도착)
한국인의 로망
호텔 조식 장소에는 아시아인, 특히 한국인이 많다. 한국, 중국은 주로 단체, 일본은 개별 관광객들로 보인다. 스위스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관광지 아닌가? 영리한 스위스인의 해외 소재 관광청 사무소를 통한 현지 미디어 홍보 탓에 스위스는 한국인에게는 지상 낙원 쯤으로 포장된 곳 아닌가?
게다가 여기는 융프라우 초입 전진 기지다. 어젯밤 비오고 을씨년스럽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해가 난다. 그린델발트 열차역에서 바로 보이는 쉬렉호른(Schreckhorn, 4078m) 봉우리가 눈을 머리에 이고 우뚝 서 있다. 그린델발트 열차역 부근에서 스키 리프트를 타고 피르스트(First) 봉우리(2166m)로 가면 아이거 북벽의 장엄한 풍경을 가장 가까이서 접할 수 있기 때문에 늘 방문자들로 북적인다.
인근 마을 라우터브루넨(Lauterbrunnen)을 지나 스테첼베르크(Stechelberg)까지 차를 몬다. 더 이상은 차가 올라갈 수 없는 지점이다. 등산복 차림의 방문객들이 차를 세우고 트레킹을 시작한다. 폭포 수십 개를 연이어 본다. 떨어졌다 하면 보통 몇 백 미터씩 수직 낙하다. 설산, 빙하, 폭포, 계류…. 알프스 하면 떠오르는 풍경들을 모두 만난다. 라우터브루넨은 인터라켄과 융프라우요흐(Jungfraujoch)를 잇는 산악 철도의 중간 역이자 여러 다른 산악 철도 또는 케이블카를 통해 인근 산봉우리들과 연결되는 산악 교통의 요충이다.
더는 시간을 끌 수 없음을 아쉬워하며 북동 방향으로 차를 몰아 루체른(Luzern)으로 길을 재촉한다. 참으로 아름다운 길이다. 룽게른(Lungern)을 앞두고 높은 언덕을 넘자 호수와 함께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이미지가 돼 가슴에 박히는 순간이다. 루체른 도심을 통과한다. 산과 강과 호수가 현대적인 도시와 어우러져 가장 스위스다운 풍경을 연출하는 것으로 평가받는 곳이다.
리히텐슈타인? 룩셈부르크?
동쪽으로 약 두 시간 더 달려 리히텐슈타인(Liechtenstein)에 닿는다. 면적 160㎢, 인구 3만 7000명, 서울의 1/4 면적이지만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 중 하나다. 여행 초기에 들렀던 룩셈부르크와 자꾸만 혼동된다.
산 언덕에 자리 잡은 동화 마을, 이 나라의 수도 바두츠(Vaduz)에는 의외로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들이닥쳐 사진을 찍느라 요란을 피운다. 유럽에서 관광객 혐오증이 생긴 까닭을 짐작하는 순간이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중국인 관광객들이 해마다 무서운 속도로 증가하면서 생겨난 현상 아닐까 생각해 본다.
19번 산악도로
쿠어(Chur)에서 고속도로를 벗어나 안데르마트(Andermatt)로 넘어가는 19번 도로로 길을 바꾼다. 스위스 산악도로의 백미 구간이다. 영화에서나 봤을 그림 같은 산중 마을들을 수없이 지난다. 사람들 생김새도, 언어도, 분위기도 지중해 분위기를 풍기기 시작한다. 이탈리아 국경이 멀지 않다는 뜻이다.
오베르알프 고개(Oberalp Pass)를 넘어 안데르마트에 닿는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해발 2000m, 산중 오지 마을이다. 어느 방향에서 오든 해발 2000m가 넘는 고개를 여러 개 넘어야 닿을 수 있는 곳이다. 지금은 편안하게 바깥 세계와 연결되지만 수천 년 이 땅을 지켜온 사람들에게 스위스는 얼마나 척박한 땅이었을까? 수천 미터 산으로 둘러싸여 기후마저 사나운 이곳은 키울 수 있는 농작물도 고작 옥수수 정도였다. 척박한 자연 환경을 딛고 문명을 일군 스위스인에게 경의를 표한다.
고개를 넘고 또 넘어
마을을 빠져 나가 오늘 밤 숙박지로 향하기 위해서 이번에는 고타드 고개(Gotthard Pass)를 넘는다. 험한 산악 도로이지만 지금은 이 밑으로 길이 57km, 세계 최장 철도 터널이 뚫려 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아득히 높은 2346m 높이의 후르카 고개(Furka Pass)를 마저 넘어야 바깥 지역으로 나올 수 있었다.
4000m를 훨씬 넘는 수많은 봉우리들과 어깨를 견준다. 높고 힘든 고개이지만 넉넉한 힘과 출중한 연비까지 갖춘 독일 디젤 승용차의 덕을 톡톡히 본다. 스위스의 고산 지역들은 거의 모두 산악 철도로 연결된다. 자동차가 오를 수 있는 곳이면 거의 예외 없이 철도도 있다는 것에 놀란다. 물론 그냥 일반 철도로는 안 된다. 협궤 철도폭(궤간, 軌間)과 함께 기관차가 바닥에 깔린 톱니를 물고 가는 이른바 ‘아프트식’ 산악 철도 기술 덕분에 가능하다.
14일차 (글루링겐 → 제네바)
빙하 특급
제네바로 돌아가는 길은 알프스의 남쪽 산록을 지난다. 은하수처럼 흘러내리는 빙하 때문에 이른바 빙하 특급(Glacier Express)이라고 불리는 길이다. 멀리 남쪽에서 마테호른이 손짓 해 마테호른을 가까이 볼 수 있는 지점까지 들어갔다 나온다. 마테호른을 아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체르마트(Zermatt)는 차량을 가지고 들어갈 수 없고, 일정 지점까지 차량으로 이동 후 나머지는 열차를 갈아타야만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 여유가 없는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레만 호를 스치고 지나
시옹(Sion)을 지나자 곧 레만 호수를 다시 만난다. 스위스와 프랑스의 국경을 이루는 면적 583㎢, 서울특별시 면적에 버금가는 거대한 호수다. 스위스에 있는 크고 작은 1500여 개의 호수가 유럽 전체 민물의 6%를 담고 있다니 놀랍다. 레만 호는 몽트뢰(Montreux)에서 제네바까지 계속 이어진다. 호수 건너에는 알프스가 수직으로 솟아 있고 그 너머는 프랑스 땅이다.
제네바 공항에서 무사히 차량을 반납한다. 2박 3일, 48시간 동안 980km를 운전했다. 면책금 제로의 풀보험을 포함 렌터카 비용 33만 원, 연료비 10만 원이 들었다. 적지 않은 돈이지만 스위스 전역을 자동차로 누빈 편리함과 기동성을 생각하면 충분히 돈의 가치가 있다고 위안 삼는다.
비열한 상술의 스위스 렌터카 요 주의
기분 좋게 스위스 자동차 일주 여행을 마친 것까지는 좋았으나 문제는 여행이 끝나 한국에 돌아온 뒤 받아본 카드 영수증에서 시작했다. 차량 반납 시 내가 확인한 예상 비용은 260 프랑(한화 33만 원)인데 360프랑이 결제된 것이다. 100프랑(13만 원)이 이유 없이 결제됐다고 판단한 나는 렌터카 회사에 100프랑의 소재를 문의하는 메일을 보냈다. “추가 풀보험 가격이다” “차량 업그레이드 비용이다” 등 핑계에 불과한 답변이 연거푸 돌아왔다. 당연히 내가 예상한 260프랑은 이미 추가 보험과 차량 업그레이드 비용을 포함한 것인데도 말이다.
지루한 공방 끝에 “스위스 내 관련 정부와 소비자 단체에 이 사실을 알리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낸 후에야 100프랑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스위스에 대한 나의 이미지는 망가진 후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일부 스위스 렌터카 회사들은 교활하다. 인터넷에는 누구든 제네바에서 흔히 당하는 일이라는 성토의 글들이 여럿 올라와 있었다. 이미 자기 나라로 돌아와 있는 방문자들에게 100프랑(13만 원)이라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애매한 액수의 손해에 대응하기란 매우 성가신 일이라는 것을 교묘히 이용하는 비열한 상술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다.
국제 도시 제네바
숙소를 예약해 놓은 시내로 이동해 아직 해가 남은 오후 도시 탐방을 시작한다. 제네바는 국제 도시다. 적십자 본부를 비롯해 세계보건기구(WHO), 세계노동기구(ILO)의 본부가 있고 200여 개의 각국 정부 및 민간 국제기구가 있는 만큼 세계 각국 인종의 모습을 다 만난다. 제네바 시내 두 명 중 한 명은 외국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도시는 자그마해서 걷기 그만이다. 몽블랑 다리, 엉글레 가든(영국 정원, Jardin Anglais) 등 도시의 명소를 탐방한 후 숙소로 귀환했다. 참고로, 제네바 시내 숙소에서 묵으면 시내 어디든 접근 가능한 교통카드(TPG: 버스, 트램, 심지어는 제네바 호 페리까지 포함)를 투숙 기간 동안 무료로 제공받으니 잘 기억해 두자.
(정리 = 김금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