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이한성 동국대 교수) 이른 봄 석굴암 앞마당에서 서울 시내를 내려다본다. 인왕제색도에 비갠 후 골짜기에 포말을 일으키며 시원스럽게 계곡수가 흘러내리는 위치 중간쯤 되는 곳이다. 서쪽으로는 인왕산 정상이 있는 치마바위가 웅장하게 내려다보고, 동쪽으로는 기차바위 갈림길이 있는 312봉 사이가 된다. 이곳에서 바라보면 인왕제색도를 그렸다는 정독도서관 앞마당은 너무 동쪽으로 치우쳐 있고, 더욱이 육상궁(칠궁) 뒤 북악산 기슭은 아예 목을 동쪽으로 돌리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인왕산을 자주 올라본 사람에게는 의문이 생긴다. 인왕제색도처럼 인왕산의 정상이 자리한 치마바위(병풍바위)가 비스듬히 모두 보이고, 또 동쪽 기차바위가 뻗어나가는 312봉과 앞쪽으로 흘러내리는 능선이 거의 정면으로 보이면서 그 사이 석굴암 계곡이 훤히 드러나고 그 계곡 위 끝에 성벽이 보이는 위치라면 기존 연구 결과와 달리 훨씬 남쪽에서 그린 것이 아닐까. 더욱이 창의문에서 올라오는 성벽길이 거의 정면으로 고스란히 드러나고 그 성벽길 뒤로는 기차바위가 윗모습만 보이면서 예외 없이 검은 콩알만 한 해골모양 바위가 기차 바위 위에 앉아 있는 곳. 이 글을 쓰면서 필자는 오늘 정독도서관 앞마당과 경복고 교정에 다시 가서 인왕산을 바라보았다. 청와대 경내가 된 육상궁 뒤 북악산 기슭은 갈 수 없기에 거의 같은 시선(視線)인 곳을 택한 것이다. 그런데 결론은 이곳에서 바라본 인왕산 모습은 겸재의 인왕제색도와 많이 달랐다. 우선 이들 위치에서 보면 치마바위가 많이 가린다. 또한 물이 넘쳐흐르던 계곡(석굴암 길)은 보이지 않는다. 또 큰 차이점은 그림에서 성벽길 너머 부끄러운 듯 윗모습만 조금 드러내던 기차바위는 전모를 드러내고 있다. 기존 연구자들이 너무 동쪽에 그 시선을 둔 것 같다.
인왕제색 그린 지점이 오락가락 하는 이유
그 이유는 정확히 모르지만 이런 이유는 아닐까?
겸재와 둘도 없이 막역하게 지낸 사천 이병연(槎川 李秉淵)이 1751년 음력 윤5월 29일 세상을 떠났음을 자료를 통해 연구자들이 밝혀냈다(실록을 찾아보니, 영조실록에 사천의 졸기가 실려 있다. 漢城右尹李秉淵卒 秉淵, 字一源, 韓山人, 號槎川 性淸曠, 少從金昌翕遊 賦詩數萬首, 其詩道健奇崛, 往往有逼古者, 世之爲詩學者, 多取則焉 從蔭仕, 至亞卿而止). 또 하나 찾아낸 것이 승정원일기에 이 해 5월 19일에서 25일까지 비가 내렸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인왕제색도 화제(畵題)에 辛未閏月下浣(1751년 신미년 윤5월 하순)이라 썼으니 사천이 졸한(숨진) 29일보다 4일 쯤 앞선 25일 비가 그친 후 그린 그림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막역한 사천을 위해 ‘비 그친 인왕산처럼 시원스레 병석에서 일어나라’는 염원을 담은 그림이라는 결론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그러다 보니 인왕제색도 우측 하단에 있는 집이 육상궁 뒷담 쪽(즉 대은암 남쪽)에 있었다는 사천의 집 취록헌(翠麓軒)이라는 추론이 가능하고 취록헌에 집착하다보니 자연스레 취록헌을 바라볼 수 있는 지점을 인왕제색도를 그린 위치로 추정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인왕제색도는 정독도서관이나 육상궁 쪽에서 바라본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조심스럽지만 이 집은 취록헌이 아닐 것이다.
동쪽 시선에서 본 겸재의 또 다른 그림 인왕산도와 수성구지(壽城舊地)를 보면 그 시점을 비교할 수 있다.
인왕산에는 동남으로 흘러내리는 세 개의 골짜기가 있다. 제일 남쪽이 석굴암 계곡수가 흘러내리는 기린교 쪽 수성동(水聲洞, 일명 仁王洞), 그 북쪽이 노가재(老稼齋) 김창업(金昌業)이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청휘각이 있던 골짜기인 옥류동(玉流洞), 다음은 옥류동 북쪽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의 청풍계(淸風溪)이다. 다시 인왕제색도를 곰곰이 들여다본다. 산봉우리 아래쪽으로는 산등성이 사이로 세 개의 운무 낀 골짜기가 보인다. 좌측의 큰 운무 낀 골짜기는 석굴암 계곡 아래쪽이니 수성동(水聲洞)이 분명하다. 또 건물의 좌측 작은 운무는 수성동의 일부인지 옥류동(玉流洞)인지는 불분명하다. 건물 오른쪽 운무 낀 큰 골짜기는 가운데 운무가 수성동의 일부라면 옥류동일 것이며, 가운데 운무가 옥류동이라면 청풍계가 된다. 따라서 이 집은 지금 옥인동 주택재개발지구로 지정된 옥류동의 남쪽 능선이거나(수성동 경계), 북쪽 능선(청풍계 경계)에 있었던 집으로 여겨진다. 그러다 보니 자연 인왕제색도를 그린 시점(視點)도 이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홍선 스님의 사리 모셨다는
사리공엔 공허만이 가득하고
이제 석굴암 경내를 살펴보자. 치마바위 남쪽 바위 면에 특이한 마애불이 선각으로 조각되어 있다. 연대는 그다지 오래된 것 같지 않은데 상당히 토속적이다. 彌勒尊佛(미륵존불)이라 했으니 미래를 책임지실 메시아다. 그윽한 눈길로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면서 당신이 언젠가 열 용화세계(龍華世界)를 꿈꾸고 계시다. 김신조 부대 침투 후 인왕산이 출입금지되었기에 믿음을 달리하는 과격한 이들에게 훼손되지 않고 온전한 모습으로 있다.
그 옆으로는 인왕산 산신령(山神靈)이 동자와 호랑이를 데리고 계신다. 마애불 옆과 산신각에 각각 조각되어 있는데 부조(浮彫)로 조각한 모습은 상당히 토속적이다. 우리 민간신앙의 한 면을 보여 주는 소중한 산신상이다.
또 하나 석굴암에서 관심가질 만한 유적이 있다. 어느 스님의 사리(舍利)를 모셨던 바위구멍이다.
흔히 자료에는 마애부도(磨崖浮屠)나 마애사리탑(磨崖舍利塔)이라 하는데 다비(茶毘: 화장)한 육신에서 나온 사리를 바위에 구멍을 뚫고 모신 일종의 납골함이다. 필자와 함께 다니는 우리 답사길 동무들은 굳이 없는 탑을 마애사리탑이라 부르기 거북하여 마애사리공(磨崖舍利孔)이라 부르고 있다. 마애사리공은 전국에 있으나 주로 서울 경인 지역에 많이 남아 있다. 선사(승려의 높임말)들이 입적하면 응당 다비하여 나온 사리를 부도(浮屠: 사리 탑)를 만들어 봉안했었는데 절 살림이 어려워진 조선 중기 이후에는 부도를 만들 경제적 형편이 안 되는 선사들은 이렇게 사리공을 뚫어 봉안했던 것이다. 이곳에 모셔진 이는 洪善(홍선)이라 쓰여 있는데 기록이 없어 이분에 대한 내용은 알 수가 없다. 이제는 사리공도 누군가 훼손하여 뻥 뚫린 구멍만 알아보는 방문자를 바라보고 있다.
아마도 누군가 사리를 넣었을 사리함(舍利函)이 탐나서 그리 했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홍선스님.
지아비 왕 향한 왕비의 눈물어린 치마바위에
일본 청년들 잔치했다고 글자 마구 새겼으니
이제 골짜기를 통하여 인왕산 정상 길을 향한다. 인왕제색도에는 물길이 시원스레 쏟아지던 길이다. 김신조 부대 침투 후 이 길은 물론 인왕산 길 대부분이 폐쇄되었는데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많은 길이 열렸다. 이 골짜기 길은 인왕산 정상으로 가는 지름길인데 길이 험하고 외져서 거의 다니지 않는 길이다. 게다가 인왕산 생태 보호나 멧돼지 출몰 위험으로 인해 요즈음은 통행을 자제하는 길이기도 하다. 되도록이면 다시 내려가 경비 근무자가 있는 초소에서 만수천 약수 방향으로 우회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골짜기길 좌측은 인왕산 치마바위가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그 장대함에 잠시 외경스러움도 느낀다. 나의 산악반 친구들이 오래전 바위타기 훈련을 하던 바위이다. 요즈음도 운영하는지 잘은 모르겠는데 낡은 바위타기 안내판도 서 있다.
치마바위를 올려다보며 가슴 아프고 울분 터지는 일도 떠오른다.
가슴 아픈 일은 중종비 단경왕후 신씨의 사연이다. 주지하다시피, 중종이 반정 세력의 등에 업혀 임금이 되자 아버지 신수근이 연산군과 처남 매부 사이라는 이유로 반정 세력의 제척(배제하여 물리침)을 받아 7일 만에 폐출당한 단경왕후. 야사에 전하기를 경복궁이 바라보이는 이곳 인왕산 병풍바위에 붉은치마를 걸어 지아비 중종이 볼 수 있게 했다는 게 바로 이 바위다. 그래서 나중에는 치마바위로 불렸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끝내 지아비 중종을 만나지 못하고 폐서인(신분적 특권을 빼앗겨 서민이 된 사람)으로 생을 마감했는데, 후세에 영조가 복위시켜 벽제 온릉(溫陵)에 묻었다. 능이라고는 없는 외딴 곳에 아직도 초라한 능에 잠들어 계시는 단경왕후를 보면 지아비 중종이란 이가 참 미워진다. 그 놈의 임금 자리가 뭐라고 신하들에 밀려 조강지처를 7일 만에 버린단 말이냐.
또 하나 울분을 참을 수 없는 일은 이 치마바위에 일제(日帝)가 글씨를 새긴 일이다. 해방 후 그 글씨들을 파내기는 하였으나 아픈 상처의 흔적은 아직도 역력하다.
이와 관련해 국립중앙박물관에 일제 강점기 유리 원판 자료사진이 그대로 남아 있어, 그 당시의 광경을 생생히 엿볼 수 있다고 한다. 이 자료에 따르면 바위 오른쪽부터 첫째 열에 東亞靑年團結(동아청년단결), 둘째 열에는 皇紀 二千五百九十九年 九月 十六日(황기 이천오백구십구년 구월 십육일), 셋째 열에는 朝鮮總督 南次郞(조선 총독 미나미 지로)라는 큰 글씨의 순서로 쓰여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보다 약간 왼쪽으로 사이를 띄어 ‘한 열에 28글자씩, 네 줄 길이’로 대일본청년단대회를 개최한다는 사실과 기념 각자(글자를 새김)를 남기는 연유를 서술한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는 것이다. 1939년 9월 16일, 17일 양일간에 걸쳐 대일본청년단대회가 경성(현 서울)에서 열렸는데 이것을 기념한 글씨를 학무국이 주도하여 인왕산의 얼굴인 치마바위에 새겼던 것이다.
논리의 정도전이 실질의 무학대사 이겼다지만
골짜기 길을 오르다 보면 인왕제색도에 그려진 넓은 바위를 연상케 하는 너럭바위가 있다. 겸재는 지름길로 오르는 이 골짜기 길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에 치고 오르는 이 길 끝에 닿을 무렵 만나는 인왕산 성벽도 생생히 그려 놓았다. 숨이 가파를 즈음 성벽을 만나는 능선길에 닿는다. 여기에서 좌향좌. 이내 정상으로 오른다. 높이 339m의 인왕산이다. 서울을 안에서 호위하는 내사산(內四山: 북악, 낙산, 남산, 인왕) 중 서백호(西白虎)에 해당하는 산이다.
이에 관련하여 이긍익의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는 조선 건국 초기 수도 건설과 관련하여 자초 무학대사와 삼봉 정도전 간의 진산(鎭山) 논쟁이 벌어진다. 그 내용은 무학은 이곳 인왕을 진산으로 삼아 대궐을 동쪽을 향해 앉혀야 한다는 것이었고, 삼봉은 백악(북악)을 진산으로 삼아 궁궐을 남쪽을 향해 앉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내용을 옮기면 이런 것이다.
무학(無學)이 마침내 한양에 이르러 말하기를, “인왕산(仁王山)으로 뒷진산(鎭山)을 삼고, 백악(白岳, 북악산)ㆍ남산(南山)이 좌우(左右)의 용호(龍虎)가 되어야 합니다” 했는데 정도전이 반대하기를, “예로부터 제왕은 모두 다 남면(南面)하여 앉아 다스렸으니, 동향을 하였다는 말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무학이 말하기를,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이후 2백 년에 걸쳐 반드시 내 말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신라 의명대사(義明大師)가 일찍이 말하기를, ‘한양에 도읍을 택할 적에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시비를 건다면 곧 5세(五世)를 지나지 못해서 왕위를 찬탈당하는 화가 일어날 것이며, 2백년 만에 전국이 혼란스러운 난리가 올 것이라’ 한 말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무학이 볼 때 북악을 진산으로 궁궐을 남면해 앉히면 좌청룡(左靑龍)은 낙산(駱山)이 되어 산세가 너무 빈약하며, 우백호(右白虎)는 인왕이 되기에 균형이 안 맞고 청룡이 약하면 장자(長子), 남자가 힘을 못 받을까 걱정했던 것이다. 반면 삼봉은 유교적 논리로 제왕은 남면(南面)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결국은 삼봉의 뜻을 따라 궁궐(경복궁)이 건설되었는데 조선 건국 200년 뒤인 1592년 임진란이 일어났기에 호사가들은 무학의 말이 맞았다 하여 정감록 등 비기(秘記)에 힘을 실어 주었다.
인왕제색도에 인왕상 정상이 없는 이유
그런데 인왕제색도에는 인왕산 정상이 그려져 있지 않다. 어떤 이는 일부러 구도를 정상을 그리지 않게 배치했다고도 하는데 일반적인 견해는 잘려 나갔다는 견해가 강하다. 정조의 정적이며 정치 파트너였던 노론 영수 만포(晩圃) 심환지(沈煥之)가 이 그림을 소유했는데 상단에 종이를 덧붙여 칠언절구를 적어 놓았었다 한다. 후에 임자가 바뀌면서 제시(題詩)를 썼던 그 종이도 없어지면서 그 과정에서 그림의 상단이 잘려 나갔다는 것이다.
이제 성벽길을 따라 무학동/사직동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무너졌던 성은 잘 보수되어 있고 하산하는 등산로도 안전하게 정비되어 있다. 주봉(主峰)을 거의 내려올 즈음 인왕제색도의 가장 좌측에 있는 봉우리가 내려다보인다. 이 즈음 하산길 바위에 또 하나의 성혈(星穴)이 발견된다. 아마 눈비비고 찾으면 인왕산 곳곳에서 성혈을 만나리라. 아래로 보이는 봉우리 옆으로는 국가시설물이 자리잡고 있어서 하산로는 멀찌감치 멀리 내려가는데 이윽고 작은 초소를 만나면서 성밖으로 연결되는 길로 나선다. 이 길은 앞산인 안산(鞍山, 毋岳)으로 이어지는 새 다리인 하늘다리로 연결되는 길이다. 하산 길 잠시 지나 기도처에 닿으면 정성 들이는 향단(香壇) 앞 암벽에 자그만 마애불을 만난다. 전혀 전문성이 없는 이가 정성 하나로 새긴 마애불 같다. 너무 서툴러서 사랑스럽다.
이 골짜기에서 기도하는 이들은 제석님(帝釋)이라고 부른다. 불법의 세계에서는 33천 세계의 도리천에 계신 분이지만 무속(巫俗)에도 등장하여 福을 주시니 활약이 크신 분이다.
다시 층계를 따라 내려온다. 울긋불긋 국사당에 닿는다. 저곳은 무엇 하는 곳일까? 왕조실록 1395년(태조 4년) 12월 기록에 그 힌트가 있다.
이조에 명하여 백악을 진국백(鎭國伯)으로 삼고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삼아, 경대부(卿大夫)와 사서인(士庶人)은 제사를 올릴 수 없게 하였다.(命吏曹, 封白岳爲鎭國伯, 南山爲木覓大王, 禁卿大夫士庶不得祭)
즉, 백악산(북악산)에는 백악신사, 남산에는 목멱신사를 두어 나라의 제사를 올리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 남산에는 일본신(日本神)을 모시는 조선신궁이 건설되었다. 이때 목멱대왕님은 오백년 넘게 지키시던 당신의 집 남산에서 쫓겨나 이곳 인왕산 골자기에 초라히 이사를 오신 것이다. 국사당(國師堂)이란 이름으로. 변변치 못한 후손들이 나라를 빼앗기니 신들도 수난을 당했던 것이다.
세 마애불이 지키는 이곳이 바로 불국토
국사당 앞 언덕 위로는 높다랗게 선바위가 서 있다. 장삼을 입은 두 분 선사(禪師)님 모습인데 이곳에 기도를 드리면 잘 들어주신다는 이야기가 있다. 특히 아들 낳기를 바라는 이들에게 더 효험이 있다고 한다. 한편 청화도인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 팔도총론에는 태조가 한양도성을 어떤 라인에 쌓을 것인가? 하며 고민하는 상황이 실려 있다.
외성을 쌓으려 하였으나 둘레의 원근을 정하지 못하던 중 어느 날 밤 큰 눈이 내렸다. 그런데 바깥쪽은 눈이 쌓이는데 안쪽은 녹는 것이었다. 태조가 이상하게 여기면서 눈을 따라 성를 세우도록 하였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성이다.(欲築外城未定周圍遠近 一夜天下大雪外積內消 太祖異之命從雪立城址卽今城形也)
그런데 이때 눈 녹는 곳이 선바위를 포함하지 못했다고 한다. 만일 이때 선바위가 선 안으로 들어갔다면 조선의 불교가 융성했을 것이라는 민간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선바위를 지나 길을 따라 내려가면 골목길 우회전한 길 끝 공터에 또 한분의 마애불이 정좌해 있다. 어찌 보면 일본풍의 불상 같기도 한데 오래된 마애불은 아니다.
그래도 인왕산 남쪽에 마애불 세분이 있다는 사실은 이곳이 불국토였음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승려가 천민이 된 조선 사회에서 승려의 도성 출입이 금지되었으니 자연 도성에 가까운 인왕산이 불국토가 되었을 것이다. 이제 아파트 길을 따라 전철역 독립문역으로 내려간다. 예전 의주대로 길에 들어서 있던 많은 주택은 사라지고 거의 대부분 아파트촌으로 변해가고 있다. 연행(중국행)을 떠나던 사신 일행이 전별의 정을 나누던 모화관도 영은문도 이제는 이름으로만 남았다. 또 겸재의 그림을 따라 더듬어 가야할 길이다. <인왕제색도 편 끝>
(정리 = 최인욱 기자)
걷기 코스: 3호선 경복궁역 2번 출구 ~ 금천교 시장 ~ 배화여고/필운대 ~ 사직단 ~ 황학정 ~ 단군성전 ~ 딜쿠샤 ~ 성혈바위 ~ 석굴암 ~ 인왕산 정상 ~ 성벽길 ~ 성벽 넘어 하늘다리 방향 ~ 마애불2 ~ 선바위/국사당 ~ 마애불3 ~ 독립문역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9008-1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