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주행거리 300㎞ 이상의 국산 전기차가 출시되며 국내에서 전기차 대중화 시대가 곧 열릴 거라는 기대가 팽배하지만 정작 제조사와 소비자들은 전기차 보조금 규모에 일희일비하며 눈치작전에 한창이다. 전기차 업계는 정부가 과감하게 보조금 규모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추가경정을 통해 보조금 규모가 지난해의 2배 가까이 늘어난 만큼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정부의 보조금 정책이 전기차 대중화를 앞당길지, 발목을 잡을지 업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예상 판매량 3만대… 보조금 규모 2만 8000대
#1. 전기차 구매를 고민하던 K씨. 그는 최근 공개된 현대차의 신형 전기차 ‘코나 일렉트릭’에 꽂혔다. 미래에서 온 듯한 세련된 디자인과 여태까지의 국산 전기차보다 확연히 길어진 주행거리(1회 충전 시 406㎞)가 맘에 들었다. 하지만 A씨의 들뜬 마음은 금새 가라앉았다. 구매 방법을 알아보니 이미 사전예약이 마감됐다는 뉴스가 눈에 들어온 것. 심지어 예약대수는 1만 8000여 대를 넘었는데 현대차는 올해 1만 2000대 밖에 생산하지 않는다고 한다. 나머지 예약분은 내년에 생산해 출고한다니 이러다간 내년에도 구매가 쉽지 않을 것 같다.
#2. 수소차 구매를 검토하던 J씨 역시 마찬가지다. 현대차의 수소전기차 ‘넥쏘’를 구입하기 위해 사전예약에 참여했지만 간발의 차이로 늦어 보조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됐다. 사전예약 첫날에만 700여 명이 넘게 신청했는데 보조금 지급 대상이 240대에 불과했다. 게다가 추가경정 예산에도 수소차는 포함되지 않는다니 암담하다.
올초부터 주행거리가 늘어난 신형 전기차들이 속속 출시되면서 사전예약이 폭증, 2018년이 국내 전기차 대중화의 원년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국내 최초로 주행거리 406㎞(64kWh 배터리 기준)를 달성한 현대차의 소형SUV 전기차 ‘코나 일렉트릭’은 지난 1월 15일부터 한 달간 사전예약을 진행한 결과 1만 8000대가 계약됐다. 현대차는 이 중 1만 2000대를 올해 출고할 예정이다.
기아차의 니로와 한국지엠의 볼트EV도 올해 약 5000대의 예약판매분을 출고할 예정이다. 이외에도 현대차의 아이오닉, 기아차의 소울, 르노삼성차의 SM3, BMW의 i3 등 다양한 전기차가 예약판매를 마무리한 상황이다.
업계에 따르면 올해 국내 전기차 판매는 3만 대를 넘어설 전망이다. 지난해 약 1만 3826대(수소차 포함)가 판매된 것을 감안하면 2배가 넘는 성장 속도다. 다만 정부의 전기차 보조금 예산 규모는 이에 미치지 못해 모처럼 찾아온 대중화 호기를 놓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정부가 책정한 올해 전기차 보조금 예산은 약 3590억 원으로 총 2만 8000대 규모다. 원래는 2400억 원, 2만 대 규모였으나 추가경정을 통해 1190억 원, 8000대가 늘었다. 정부 보조금 최대 1200만 원(주행거리 기준)에 지자체 보조금 500~800만 원을 합해 총 보조금 지급 규모는 승용차 기준 약 1700만 원(서울, 부산 등)에서 최대 2200만 원(청주, 계룡 등)이다.
일단은 업계의 예상치 3만 대와 정부의 보조금 지급 규모 2만 8000대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으므로 올해 전기차 수요를 감당하기 충분하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더딘 보조금 지급… 출시지연‧눈치작전 때문?
실제 전기차 보조금 지급 현황을 살펴봐도 비슷한 결론이 나온다. 한국환경공단 자동차환경계획팀이 운영하는 친환경차 종합정보 지원시스템 사이트(hybridbonus.or.kr)에 접속하면 전국 각 지자체의 전기차 구매보조금 지급 현황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사이트에 따르면 올해 전국 지자체의 지원금 지급 예정 대수는 일단 총 1만 6334대다. 하지만 지원금 신청 접수 합계는 24일 기준 4769대에 불과해 아직 1만 1560대의 신청이 가능하다. 게다가 출고 대수 합계는 1686대에 불과해 실제 보조금이 지급된 건 10.32%밖에 되지 않는다. 즉 이 데이터만 놓고 보면 전기차 보조금 규모는 수요에 비해 넉넉하다고 여겨진다.
전문가들은 드러난 데이터의 이면을 들여다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기차 사전예약자 규모에 비해 실제 보조금 지원 내역이 턱없이 부족한 것은 코나, 넥쏘, 볼트EV 등 소비자가 선호하는 주요 전기차의 출시나 수입이 늦어진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올해부터 환경부가 정식 계약 후 2개월 내 출고가 이뤄진 경우에만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한 것도 보조금 신청이 많지 않은 요인이다. 지난해까지는 전기차 구매 계약서만으로 보조금 지급이 이뤄졌지만 올해부터는 계약 후 인도가 2개월 이내에 이뤄지지 않으면 보조금을 받을 수 없다. 사전예약자라 하더라도 섣불리 지원금 신청을 접수하기가 꺼려지는 상황인 것이다.
이에 사전예약자들은 물론 제조사들도 출고 일정을 체크하며 지원금 신청이 가능한 시기를 가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원금을 확실히 받기 위해 다양한 눈치작전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지역별로 불균등한 지원 규모도 전기차 구매를 망설이게 하는 요인 중 하나로 지목된다. 친환경차 종합정보 지원시스템에 따르면 서울, 제주, 대구의 지원 규모는 각기 2254대, 3912대, 1929대 등으로 여유가 있고 광주와 인천은 536대, 496대로 적정하지만 부산은 대도시임에도 지원 대수가 161대에 불과하다. 그 외의 지방도시들은 대부분 10~50대 수준이다. 몇몇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방도시 사람이라면 얼마 되지 않는 지원 대수 증감 현황을 면밀히 체크해야 보조금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전기차 대중화 호기, 놓치지 말아야”
전기차 업계는 모처럼 상품성이 있는 국산 전기차가 등장해 소비자의 관심이 높아진 호기를 놓치지 않으려면 정부가 지원금 규모를 좀더 확대하는 전향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각 지자체의 상이한 지원 규모를 탄력적으로 운영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한국전기차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자동차 전문가 김필수 대림대 교수는 CNB와 통화에서 “전국 지자체의 전기차 예상 수요를 파악한 결과 올해 전기차 수요는 약 5만 대 규모”라며 “1월도 가기 전에 2만 대의 사전예약이 이뤄진 것이 그 증거”라고 설명했다. 그는 “지난해의 경우 1만 4000대에 대한 보조금이 소진되기까지 약 10개월 이상이 걸렸지만 올해는 그 속도가 훨씬 빨라질 것”이라며 “가장 중요한 시기를 놓치지 않으려면 보조금 증액은 물론 다양한 충전 인프라 건설, 전문가 양성 등을 서둘러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