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에 개입 입장을 밝힌 엘리엇이 구체적 요구를 드러낸 홈페이지를 공개하면서 양사의 공방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현대모비스와 현대글로비스를 합병하려는 현대차의 계획에 엘리엇은 현대차와 현대모비스를 합병하라며 딴지를 걸었다. 이에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위법 소지가 있다며 현대차의 손을 들어주자 엘리엇은 현대차의 금융계열사를 매각하면 된다고 맞대응했다. 일단 1라운드에서는 현대차가 승기를 잡았다는 평이 우세하지만 헤지 펀드의 속성상 엘리엇이 쉽게 철수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전망이다.
엘리엇 “현대차‧현대모비스 합병, 지주사 전환하라”
지난 23일 행동주의 헤지 펀드로 잘 알려진 ‘엘리엇 매니지먼트’는 ‘액셀러레이트 현대’(www.acceleratehyundai.com)라는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현대차그룹에 대한 구체적 요구사항을 공개했다. 지난 4일 약 1조 500억 원에 해당하는 현대차그룹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며 현대차그룹 지배구조 개편 과정에 개입하겠다고 운을 뗀 지 약 20여 일 만의 일이다.
이번에 공개된 ‘현대 가속화 제안’(Accelerate Hyundai Proposals)의 핵심은 ‘현대차와 현대모비스의 합병’이다. 원래 현대차그룹은 현대모비스와 현대글로비스의 합병을 통해 현대모비스가 지주사는 아니지만 그룹 지배구조 최상단에 자리하는 구조를 계획했다. 하지만 엘리엇은 “지주사를 경쟁력 있는 글로벌 완성차 제조업체로 재탄생시킴으로써 현재의 복잡한 지분 구조를 효율적으로 간소화할 수 있다”며 현대모비스와 합병한 현대차를 그룹 지주사로 만드는 방안을 제안했다.
엘리엇이 밝힌 현대차와 현대모비스의 합병 및 지주회사 전환은 총 4단계로 구성됐다. 1단계에서 현대차와 현대모비스를 합병한 합병회사를 구축하고, 2단계에서는 합병회사를 상장지주회사(현대차 HoldCo)와 별도의 상장사업회사(현대차 OpCo)로 분할한다. 3단계에서는 현대차 HoldCo가 현대차 OpCo 주식을 공개매수한다. 마지막으로 기아차가 보유한 현대차 HoldCo와 현대차 OpCo 지분을 팔면서 순환출자를 해소하고 대신 기아차의 자본을 확충하면 모든 절차가 마무리된다.
이외에도 엘리엇은 현대모비스와 현대차의 자사주 소각, 배당 지급률을 순이익 기준 40~50% 수준으로 대폭 개선, 사외이사 3인 추가 선임 등의 요구 조건을 제시했다.
엘리엇은 현대차그룹의 기존 지배구조 개편안에 대해 “소액주주에 돌아갈 이익이 분명하지 않고, 순환출자 고리를 해소하는 것만으로 기업경영구조가 개선됐다고 하기 어렵다”며 비판했다. 반면 자사의 제안에 대해서는 “이 제안을 받아본 현대차그룹 주주 대부분이 개선점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며 “제안서를 채택하면 현대차그룹의 모든 이해 관계인들에게 유익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상조 공정위 “법 위반” vs 엘리엇 “매각하면 문제없어”
제대로 된 지배구조 개편보다는 엘리엇이 보유한 주가 부양에 초점이 맞춰진 이 제안에 대해 현대차그룹 측은 원론적이면서도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엘리엇을 포함한 국내외 주요 주주와 투자자들에게 앞서 발표한 출자구조 재편의 취지와 당위성을 계속 설명하고 소통해 나가겠다”는 사실상 엘리엇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입장 표명이었다.
답답한 현대차그룹의 속을 풀어준 건 평소 ‘재벌저승사자’로 알려졌던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다. 김 위원장은 26일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2018 아시아미래기업포럼’ 행사장에서 기자들과 만나 “엘리엇의 요구는 부당하다”며 “이에 따르면 공정거래법을 위반하게 된다”며 현대차의 손을 들어줬다.
김 위원장이 공정거래법 위반을 거론한 것은 현재 현대차가 산하에 현대카드, 현대캐피탈 등 금융사를 자회사로 두고 있기 때문이다. 엘리엇의 요구에 따라 현대모비스와 현대차를 합병하면, 지주사 산하에 이 두 회사가 자회사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산업자본 지주회사가 금융회사 주식을 소유할 수 없다는 공정거래법을 위반하게 된다.
김 위원장이 엘리엇의 요구를 콕 집어 비판하자 엘리엇은 즉각 반론을 제기했다. 엘리엇은 27일 “금융 자회사를 지주사 밑에 두면 법률 위반 소지가 있다는 김 위원장의 발언에 주목하고 있다”며 “그래서 엘리엇은 23일 보도자료에서도 2년 동안의 유예기간 내에 이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고 명확하게 밝힌 바 있다”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공개했다.
엘리엇의 주장의 골자는 현대차가 지주회사로 전환한 후 2년 이내에 현대카드와 현대캐피탈 주식을 매각하면 법적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 현재 두 회사의 최대주주는 모두 현대차로 각각 36.96%와 56.68%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엘리엇의 반론에 대해 업계에서는 부정적 반응이 다수를 이룬다. 한 업계 관계자는 “자동차 산업의 특성상 해외에서도 자동차회사가 금융 자회사를 거느리는 것은 일반적인데 현대차만 이를 매각해 경쟁력을 제한할 이유가 없다”며 “엘리엇의 경영 개입이 지나친 감이 있다”고 비판했다.
현대차‧모비스 반격 전략은?
현대차 측은 엘리엇의 논리에 반격하고 주주들의 동요를 막기 위한 전략 마련에 나섰다. 먼저 현대모비스와 관련해서는 미래기술에 집중하는 회사로 거듭나 2025년 매출 44조원 달성하겠다는 내용의 ‘중장기 미래성장 사업전략’을 26일 발표했다.
올해 25조 원으로 예상되는 존속 모비스의 매출 규모를 매년 8%씩 성장시켜 2022년 36조 원, 2025년 44조 원까지 확대하겠다는 것. 특히 자율주행·커넥티비티카와 같은 미래차 사업 부문과 제동·조향·전장 등 차세대 핵심부품 부문을 강화하고 해외법인 등 투자사업 부문에서도 매출을 늘리겠다고 밝혔다.
이는 엘리엇의 공격에 맞서 기업 가치를 적극적으로 알리고 외부 공세에 정면 대응하겠다는 뜻을 드러낸 것으로 평가됐다. 결정적으로 다음달 29일 현대모비스의 분할‧합병을 결정할 주주총회가 열리는 이상, 제기될 수 있는 현대모비스 존속부문의 사업성에 대한 우려를 미리 해소하겠다는 의도로 읽혀졌다.
현대차의 경우 주주가치 제고를 위한 주식 소각을 추진하기로 했다. 27일 현대차가 밝힌 자사주 소각 계획에 따르면 소각 대상은 보통주 661만 주, 우선주 193만 주 등 총 854만 주로 발행 주식 총수의 3%에 해당한다. 금액으로는 총 9600억 원에 달하는 규모다.
우선은 보유 중인 자사주 중 보통주 441만 주, 우선주 128만 주 등 569만 주를 오는 7월 27일 소각하고, 다시 보통주 220만 주, 우선주 65만 주 등 총 285만 주에 대해서는 매입이 완료되는 대로 소각한다는 계획이다.
이번에 현대차의 자사주 소각 계획에 대해 업계 일각에서는 “엘리엇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냐”는 주장도 나온다. 현대차 측은 “이번과 같은 대규모의 자사주 소각 결정은 사나흘 만에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엘리엇이 등장하기 전부터 주주가치를 높이기 위해 내부적으로 오랫동안 검토했던 사안”이라고 공식 입장을 밝혔다.
현대차 vs 엘리엇… 5월 29일 승패 갈린다
이렇듯 엘리엇의 첫 번째 요구조건 공개와 이에 대한 현대차와 공정위의 반론, 엘리엇의 재반론이 이어지며 1라운드는 현대차의 판정승으로 마무리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가장 큰 이유는 심판 역할인 공정위가 현대차의 손을 들어준 때문이다.
애초에 엘리엇의 목표가 지주사 체제 전환보다는 주가 부양에 초점이 맞춰져 있을 거라는 분석도 나온다. 엘리엇이 주장하는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필요한 보유 지분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다는 판단 때문이다.
증권가의 분석도 비슷한 결론이다. 대다수는 “결과적으로 현대 계열사 주가가 오를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고 실제로 주가는 소폭 올랐다. 다만 일각에서는 “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에 불확실성이 확대될 수 있다”며 우려하는 분위기다. 다음달 29일 현대모비스와 현대글로비스 주주총회에서 최종적으로 분할‧합병안이 통과되기 전까지는 엘리엇發 불확실성이 이어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