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이한성 동국대 교수) 백세청풍(百世淸風) 각자가 새겨져 있는 청풍계를 떠나 이제 세심대(洗心臺)로 향한다. 청풍계 길을 끝까지 오르면 철문이 앞을 막아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는데 다행히 길이 왼쪽으로 꺾이면서 오르막길이 계속된다. 이 철문 집은 ㅎ 재벌가 집이라는데 철문 사이로 흘깃 보면, 청풍계의 계곡 상류를 포장했을 진입로가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장동 김씨의 청풍계, 겸재의 청풍계는 이제 모두 땅속 어둠 속에 갇혀 버렸다.
언덕 마루에 올라서면 고관대작이 살고 있을 것 같은 집들이 있고, 그 너머로 서민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미로 같은 길이 나타난다. 차는 물론 자전거 하나 오토바이 하나 다니기 어려운 길이다. 몇 번 지날 때마다 나이 좀 드신 주민과 마주치게 되는데 옛 흔적이 무엇 없을까 두리번거리는 필자가 이상한 모양이다.
빈부차 커 보여도 살기 좋다는 마을
오늘은 나이 지긋한 두 내외가 손바닥만 한 텃밭을 일구시길래 먼저 말을 붙여보았다. 수십 년째 사는데 살기가 좋다고 한다. 시내 가깝고, 물 잘 나오고, 생활비도 적게 드는 데다가 이렇게 산기슭에 텃밭을 일구면 반찬값도 줄고 신선한 채소를 많이 먹을 수 있으니 별 불편이 없다고 한다. 이 미로 같은 곳에서 어찌 살까 이런 걱정은 나의 기우였다.
가파른 층계길, 골목길을 내려오면 우뚝 선 교회, 경복교회가 자리 잡고 있다. 머릿돌이 보인다. 환갑은 넘은 교회다. 여기에서 길을 조금 내려가면 맹학교(盲學校), 농학교(聾學校)가 자리 잡고 있는데 이 학교 안에 궁금증을 돋우는 옛 흔적들이 있다. 요즈음은 외부인들에 의한 학생들 피해 사례가 많다 보니 학교의 안전 보안관이 학생들을 보호하고 있다. 맹학교 안전 지킴이를 하시는 분은 학교 선생님 출신 은퇴자로서 문화재에도 조예가 깊고, 답사를 좋아하는 분이라 도움도 받을 수 있는데 단체로 방문할 때는 사전에 허락을 받고 방문하는 게 안전하다.
심상치 않은 각자 ‘후천’ 의미는?
맹학교 뒤 후원으로 돌아가면 바위 언덕이 있다. 바위 언덕에는 두 개의 각자(刻字)가 보인다. 후천(后泉), 감류천(甘流泉)이 그것이다. 감류천은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에 누가 새긴 것 같고, 후천(后泉)은 새김이 범상치 않은 데다가 의미(왕후의 샘)도 만만치 않다. 그 이유를 추측해볼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이 정조실록 15년(1791년) 3월조에 기록되어 있다.
“육상궁(毓祥宮: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 사당. 그녀는 정조의 증조모로, 후에 칠궁이 되었다)을 참배하고 봉안각(奉安閣)을 받들어 살피고, 선희궁(宣禧宮: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 사당. 정조의 할머니)ㆍ연호궁(延祜宮: 추존왕 진종 즉 효장세자의 생모 정빈 이씨 사당)ㆍ의소묘(懿昭廟: 요절한 정조의 형님 의소세손 사당)에 잔을 올리는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장보각(藏譜閣)을 살펴보았다. 임금께서 가까운 신하들과 함께 세심대(洗心臺)에 올라 잠시 쉬면서 술과 음식을 내렸다. 임금께서 오언근체시(五言近體詩) 1수를 짓고는 여러 신하들에게 화답하는 시를 짓도록 하였다. … 누대(洗心臺)는 선희궁 북쪽 동산 뒤 1백여 보 가량 되는 곳에 있다.
(展拜于毓祥宮, 奉審奉安閣, 行酌獻禮于宣禧宮、延祜宮、懿昭廟, 審藏譜閣. 上與近臣, 登洗心臺少憩, 宣醞宣飯, 上賦五言近體詩一篇, 命諸臣賡進. … 臺在宣禧宮北園後百餘步)
바로 선희궁 뒤 백보쯤 되는 이 후천 각자가 있는 바위 위가 정조가 올랐던 세심대였을 것이다. 그러니 세심대 아래에서 나는 샘물은 정조의 할머니 영빈 이씨의 사당 선희궁 뒤 샘이라서 누군가 후천(后泉)이라 각자(刻字)했을 것이다.
세심대 위치 알아야 겸재의 시점 파악
세심대의 위치 파악이 중요한 이유는 겸재의 그림이 어디에서 그려졌으며, 어디를 그렸느냐를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랜드마크이기 때문이다. 앞선 회차에서 이야기했듯이 겸재의 장동팔경첩은 수십 년간 간송본, 국립박물관본이 알려져 세상에 익숙했는데 몇 년 전 불쑥 또 하나의 장동팔경첩이 나타나 세 장동팔경첩 그림을 합치면 모두 15 개의 그림이 되었다. 새로 나타난 장동팔경첩에는 앞에 두 팔경첩에는 포함되지 않은 세심대(洗心臺)가 포함되어 있다.
후천 각자 바위에는 세심대로 오를 수 있는 계단길이 잘 만들어져 있고 세심대 누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위치에는 간이 정자를 만들어 놓았다. 정자에서는 사대문 안 서울 시내가 비교적 잘 보인다. 겸재의 시대에는 고층건물이 없었으니 한양도성 안이 훤히 더 잘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정자 앞에는 겸재의 ‘한양전경’이라는 그림이 세워져 있다. 그림 이름이 낯설어 살펴보니 그동안 ‘삼승조망(서원조망)’으로 알려져 왔던 그림이다.
그림의 스토리는 일단 나중에 살피기로 하고 이 그림이 그려진 시각(視角)과 현재 눈으로 보이는 서울의 전경이 매우 비슷하다. 안내판에 붙어 있듯이 이 서원조망도는 아마도 세심대 능선에서 그렸을 것 같다.
이 그림은 도승지를 지낸 겸재의 이웃 이춘제(李春躋)가 자신의 집 서원(西園)에 있던 작은 정자(小亭)인 삼승정(三勝亭)에서 한가로이 1700년대 한양 시내를 바라보는 있는 그림이다. 작가의 시각은 위에서 비스듬히 우측 아래에 있는 작은 정자를 보는 것이다. 정자의 기둥을 보면 그리는 이의 시선이 정자보다 좌측에 있다. 그렇다면 서원소정(삼승정)은 시선을 동쪽으로 보았을 때 그 위치가 세심정의 우측 아래에 있었다는 말이다. 그림에는 친절하게 작가가 무엇을 그렸는지 몇 개의 힌트가 쓰여 있다. 회맹단, 삼청, 남한, 관악, 사직, 인경 등. 초년의 신묘년풍악도첩에서처럼 기록을 위한 그림이라서 그렇게 한 것 같은데 신묘년 그때에 비하면 65세의 그림은 완숙하기 이를 데 없다.
영조 사랑 듬뿍받은 사도세자 母 영빈이씨
이웃 이춘제의 부탁에 의해 그려준 서원(아회)첩(西園雅會帖) 전반은 다시 보기로 하고 세심대를 내려간다. 정조실록의 기록처럼 세심대 아래 농학교(聾學校) 뒤 후미진 곳에는 선희궁(宣禧宮) 유지가 있다. 사도세자의 어머니이니 정조의 할머니 영빈 이씨를 모셨던 사당이다. 이 사당을 만들면서 놓았던 다리가 신교(新橋)였음은 이미 이야기한 바 있다.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신교로 인해 이 지역 지명이 신교동이 되었으니 선희궁 영빈 이씨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게 되었다. 선희궁의 위패는 고종 때 한 번 육상궁(칠궁)으로 옮겼다가 되돌아온 후 순종 때인 1908년 육상궁으로 옮긴 후 이 자리에는 유지(遺址)만 남게 되었다.
영조가 많이 사랑했던 영빈 이씨의 사당 선희궁은 상당한 규모였던 것 같다. 농학교 운동장 기단이나, 밖으로 나와 담장 아래를 살펴보면 석축이 아직도 그 규모를 알 수 있게 한다. 자신의 DNA를 조선 왕통에 남기고 지아비의 큰 사랑도 받은 여인은 행복한 여인이다.
이제 앞으로 갈 길 설명을 위해 두 장의 이정표를 만들었다. 하나는 세종마을에서 탐방객을 위해 만든 문화 지도에 앞으로 답사할 곳을 수기(手記)로 기록해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참고용으로 조선 후기 화가 강희언(1738~ ?)의 인왕산도에 구획을 구분하여 표시해본 것이다. 사실 겸재 그림의 배경이 된 장소와, 그림을 그린 위치를 찾아가고 다른 이에게 전달하는 일은 필자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다. 가장 큰 이유는 파악하기도 어렵지만 알더라도 그 위치를 GPS 좌표로 표시하지 않는 한 잘 전달하기가 어려웠다.
세심대능선, 옥동능선 그리고 언커크 능선
옛 지도에 의거해 인왕산 동록(東麓)을 세 구역으로 나누어 표시하였다. 청풍계, 옥류동, 수성동(인왕동, 인왕곡)으로. 그리고 그곳을 구분하는 능선(崗)을 되도록 겸재의 그림을 따라 표시해 보았다. 세심대를 그린 청풍계 남쪽 능선은 세심대능선, 옥동척강(玉洞陟崗) 유산(遊山)이 이루어진 능선은 옥동능선, 옥류동과 수성동을 구분하는 능선을 언커크(UNCURK)능선으로 구분해보았다. 사실은 옛날 송석원 시사의 천수경 집 유지를 알면 그 이름을 붙일 터인데 이 언덕에 있던 친일파 윤덕영의 벽수산장 이름으로 부를 수는 없기에 언커크 능선이라 한 것이다.
이에 따라서 입체적으로 이해를 돕기 위해 강희언의 인왕산도에도 능선을 따라 구분했다. 앞으로 답사길 설명을 이 구분으로 할 생각이다.
이제 농학교를 벗어나 길을 건넌다. 잠시 우당기념관에 들러 가자. 우리 세대는 자라면서 이 시리즈 1회에서 소개한 동농 김가진 선생이나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선생 가(家)에 대해 배워보지 못하고 자랐고, 지금의 젊은 세대도 그다지 이런 분들을 알지 못하고 지내고 있다. 선생은 백사 이항복 선생의 10세손으로 10명의 영의정을 배출한 집안이라 한다. 1910년 나라를 빼앗기는 경술국치(庚戌國恥)가 일어나자 선생의 6형제는 그 많던 전 재산을 처분하고, 온 가족 40여 명이 만주 땅으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사재를 다 털어 교육에 앞장서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무장투쟁을 할 수 있도록 3500여 명의 독립군 간부를 양성했다 한다. 재산은 모두 바닥났고, 해방이 되었을 때 솔가해 간 가족은 일제의 압박에 반도 살아남지 못했고, 선생 6형제도 동생 시영(始榮)을 빼고는 5형제가 희생되었다. 지도층이 마땅히 가야 할 길, 즉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의 전형을 보여준 가문이었다.
인왕산 산 타고 오른 선비 7인
우당기념관을 나와 서촌 중심부를 향해 언덕길을 오른다. 다시 길 건너로는 경복교회가 보이고 가는 길 옆으로는 청운경로당이다.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GS리더십 센터가 자리 잡고 있다. 여기에서 걸음을 멈추고 겸재 나이 64세(1739년), 65세(1740년)에 이춘제(李春躋)의 부탁으로 그린 서원첩(西園帖)의 그림들에 접근해보자. 길 답사를 위해서는 적어도 이들 그림에 대한 기본지식이 필요하다. 미술에 조예가 없는 필자로서는 주로 간송의 최완수 선생의 이론과 겸재정선기념관의 간행물, 유홍준 선생의 저서 등을 참조해서 내용을 전달하고자 한다.
서원첩(西園帖)은 현재 온전히 전해지지 않고 3장(또는 4장)의 그림이 각각 낱장으로 나뉘어져 소장되어 있다 한다. 그림의 내용은 옥동척강도(玉洞陟崗圖), 서원소정도(西園小亭圖, 또는 三勝亭圖), 서원조망도(西園眺望圖, 또는 三勝亭眺望圖)가 있고, 정선기념관 자료들은 풍계임류도(楓溪臨流圖)를 포함하고 있다.
옥동척강도는 7명의 선비가 옥류동 계곡을 낀 언덕길을 오르는 그림이다. 서원소정도는 이춘제 가옥 후원에 새로 지은 모옥(茅屋) 정자인 소정(小亭, 즉 三勝亭)을 그린 그림이며, 서원조망도는 세심대에서 대강을 살폈듯이 서원(삼승정)에 앉아 한양 시내를 내려다보는 선비의 모습을 더 높은 곳에서 그린 그림이다.
우선 옥동척강도를 살펴보자. 7명의 선비가 인왕산 한 줄기를 타고 오르고 있다. 이 줄기는 어느 능선이었을까? 그리고 어디까지 올랐을까? 이춘제가 쓴 그날의 모임, 서원아회(西園雅會)에 대한 기록을 보자.
벼슬을 쉰 이래로 병과 게으름이 다 생겨서 집 뒤 작은 언덕을 넘겨다 보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다. 송원직, 서국보가 심시서, 조군경 두 영감과 작은 모임을 도모했는데 귀록 조대(조현명)가 소식을 듣고 왔다. 그때 소나기가 심한지라 맑아지기를 기다려서 서원에 올라가 앉았다가 그냥 이어서 사립문을 나서서 옥류동의 샘과 바위 사이를 배회했는데 홀연 귀록이 지팡이를 휘저으며 짚신을 신고 가파른 곳을 붙들고 산을 오르는데, 걸음의 민첩함이 젊은이도 못 따를 지경이었다. 여러 사람이 뒤따르는데 몸에는 땀나고 숨차지 않을 수 없었는데 잠깐 사이에 산등성이를 넘고 골짜기를 지날 수 있어서 청풍계의 원심암과 태고정이 홀연 아래로 보였다. 이는 시경에서 이른바 ‘마침내 험한 지경을 넘었으니, 일찍이 생각지 않은 것이다’고 하는 것과 거지반 같다. 급기야 숲을 뚫고 내려가서 시내에 가 앉으니 곧 한 가닥 폭포가 걸쳐 바위 사이를 흐른다. 갓끈을 빨고 발을 씻고 몸의 땀을 씻고 숨찬 것을 다 가라앉힌 후에 모두가 말하기를, “풍원(조현명)이 아니었으면 어찌 이렇게 할 수 있었겠소. 오늘 계곡놀이는 실로 평생에 으뜸일 것이요.” 소요하다보니 저녁이 되어도 돌아가는 것을 잊고 있다가 파할 때가 되어 귀록이 시 한 수를 읊고는 여러 사람에게 이어 화답하라 재촉하였다.
겸재에게 그림을 청하여 풍경과 모임을 그려달라 했는데 그대로 시화첩을 만들어 자손이 수장하게 하려 함이다. 심히 특별한 일이거늘 어찌 기록이 없을 수 있겠는가? 나를 돌아보건대, 어려서부터 시학을 좋아하지 않았고 나이 들어서는 또 눈은 높고 손이(쓰는 데는) 수준 낮은 병이 있어서 무릇 시를 짓는 데 음운과 평측에 익숙하지 않았으니 친구와 만나고 헤어질 때 시를 주고받는 일을 일찍이 한 적이 없다. 그래서 문득 사양하였더니 귀록이 또 ‘시의 규칙’을 어긴 것으로 책망한다. 부득이 파계하여 책망을 막기는 하나 참으로 ‘육담시’라 해야겠구나.
기미년 늦여름 서원주인
西園雅會記
休官以來, 病懶相成, 未窺家後小圓者, 久矣, 宋元直, 徐國寶, 約沈時瑞, 趙君受兩令, 以謀小會, 歸鹿趙台, 聞風而至。于時驟雨飜盆, 後晴, 登臨西園, 仍又聯袂, 雨出柴扉, 徘徊於玉流泉石, 歸鹿忽飛筇着芒, 攀崖陟嶺, 步履之捷, 不減小壯, 諸公躋後, 無不膚汙氣喘, 以俄頃之間, 乃能越巒, 而度壑, 楓溪之心庵 古亭, 倏在目下. 此殆詩所謂, 終踰絶險, 曾是不意者也.
及其穿林而下, 臨溪而坐, 卽一條懸瀑, 潺溪石間. 濯纓濯足, 出滌煩襟, 去之膚汙而氣喘, 咸曰 微豊原, 安得務此, 今谷之游, 實冠平生. 於亭逍遙, 竟夕忘歸, 臨罷, 歸鹿, 口呼一律, 屬諸公聯和, 請謙齋筆, 摹寫境會, 仍作帖, 以爲子孫藏, 甚奇事也, 豈可無識.
顧余 自小不好詩學, 老又有眼高手卑之症, 凡於音韻淸濁高低者不經, 與親舊挹別逢歸, 酬唱, 一切未嘗開路。故輒以此謝之, 則歸鹿, 又責之以湋詩令, 不得已 破戒塞責, 眞是肉談詩云乎哉.
己未季夏 西園主人
이날 모임은 미리 계획된 것은 아니었다. 여름 소나기 시원하게 뿌리고 난 후 즉흥적으로 이춘제의 집 후원을 나서서 옥류동 언덕길을 올라 청풍계로 내려왔던 것이다. 이 7인의 선비가 언덕길을 오르는 모습은 윗글에서 보듯이 이춘제가 겸재에게 부탁하여 이른바 ‘옥동척강도’로 남게 되었다. 자, 이 언덕길을 알기 위해서 출발점 서원소정(삼승정)이 어디인지 살펴보자.
서원소정도를 보면 이춘제의 초가집(茅屋) 소정을 아래에서 위로(인왕산 방향)으로 그린 그림이다. 앞서 살펴본 서원조망도(삼승정조망)는 거꾸로 세심대에서 아래(경복궁 방향) 방향을 보고 그린 그림이다. 더욱이 서원소정도에는 좌측에 옥류동, 우측에 세심대라는 겸재의 친절한 위치 설명 메모 글씨가 쓰여 있다. 그렇다면 서원의 위치는 분명해진다. 옥류동과 세심대 사이이면서 세심대보다 낮은 위치에 동쪽 방향(경복궁 방향)에 있었던 것이다. 현재의 위치로 보면 GS 리더십센터 뒤쪽에 있는 신현아파트보다도 더 아래쪽 나지막한 언덕에 있었다고 보인다.
옥동청강을 찾아 걸어보니
필자는 이들이 오른 옥동척강을 걸어보았다. 필자가 수기 지도에 표시한 옥동능선길이다. 이제는 주택가 작은 골목에 그 끝은 서울교회와 작은 주택이 산길을 막고 있었다. 옆으로 우회해 오르면 제대로 된 옥동척강 길이 나타나고 주민에게 물으니 ‘버드나무 약수터’라는 약수터 겸 작은 체육공원에 닿는다. 이곳에서 오른쪽 길을 택하면 이날의 7인처럼 청풍계로 내려갈 수 있다. 아쉬운 것은 주택이 길을 막아 우회해야 한다는 점이다.<다음 회에 계속>
교통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
걷기 코스: 통의동 백송 ~ 자교교회 ~ 청운초교 ~ 백세청풍 각자(청풍계) ~ 맹학교(세심대) ~ 농학교(선희궁터) ~ 우당기념관 ~ 옥류동(청휘각, 가재우물, 송석원, 벽수산장 흔적) ~ 인곡정사터 ~ 박노수 미술관 ~ 백호정터 ~ 택견전수터 ~ 수성동 계곡 ~ 백사실 ~ 세검정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9008-1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