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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정 평론가의 더 갤러리 (6) 전주연] 수직적 언어에 주눅들지 않고 수평적 언어와 뛰놀순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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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588-589호 이문정(미술평론가, 컨템포러리 미술연구소 리포에틱 소장)⁄ 2018.05.21 09:31:17

(CNB저널 = 이문정(미술평론가, 컨템포러리 미술연구소 리포에틱 소장))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언어에 둘러싸인다. 나 자신이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존재해온 언어, 그 언어가 지시하는 의미, 의미가 만들어내는 가치관은 나의 삶을 지배한다. 우리는 언어를 배우면서 사회화되고, 공동체가 요구하는 규범을 체화한다. 언어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다. 한 개인의 삶과 가치관은 그 혹은 그녀가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 고스란히 드러난다. 머릿속에서만 이뤄지는 생각의 전개에도 언어는 필수적이다. 언어를 모르는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 발전시킬까? 내가 사용하는 언어는 나의 자화상과 같다. 이는 개인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한 사회의 이데올로기와 가치관 역시 언어를 통해 파악 가능하다. 언어는 우리가 알아야 할 것, 따라야 하는 것, 그리고 추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이처럼 언어는 가장 중요한 의미 생성과 전달의 수단이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우리의 생각을 명확히 지시하고, 전달하고, 타인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다. 언어는 우리가 자신의 생각을 명확히 정리하고, 전달하고, 소통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통로이다. 


그러나 언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모호하고 흐릿하다. 우리는 언어로 전달되는 타인의 생각을 100% 완벽히 이해할 수 없다. 말과 글은 항상 의미의 왜곡을 수반한다. 전주연은 이런 언어(텍스트)를 탐구하는 작가다. 작가는 언어가 담아내지 못하는 무엇, 세상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는 언어의 한계, 그럼에도 언어를 벗어날 수 없는 세상을 시각화하고 물질화한다. 

 

전주연, <간지럼 태우기>, 각목, 연필, 모터, 깃털, 180cm x 160cm, 2018. 도판 제공 = 전주연 작가
전주연, <NO~!>, 나무, 시멘트, 400cm x 240cm 가벽, 2018. 도판 제공 = 전주연 작가

- 대학원을 졸업하고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세 번째 개인전이다. 현재 레지던스777 입주 작가이기도 하다. 2016년에는 CNB저널 표지작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페이퍼 커팅(paper cutting)으로 새겨진 텍스트 구멍 아래에 (텍스트의 의미를 상징하는) 흑연을 깔고 그 위에서 유토(油土)를 굴려 언어(텍스트)의 다양한 의미를 집적시켰던 ‘아나바시스(Anabasis)’(2015-2016) 시리즈가 인상적이었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작품들 중에는 ‘간지럼 태우기’(2018)가 눈길을 끈다. 언어를 대하는 작가의 태도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작업이라 생각한다. 텍스트를 간지럽힌다는 설정은 양가적 의미를 훌륭히 전달한다. 누군가를 간지럼 태우면 웃는다. 긴장된 반듯한 자세가 허물어진다. 그러나 동시에 스스로를 방어하는 자세를 취한다. 이는 언어가 상징하는 형이상학적인 담론의 세계를 감각적인 육체의 영역을 통해 해체하는 것이다. 가벼운 웃음으로 상징계의 엄숙함을 깨뜨리고 저항하는 것이기도 하다. 


“석사 청구전을 포함하여 이번이 3번째 개인전이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아직 경험이 많지 않기 때문에 개인전을 준비하면서 많이 배우고 있다. 작가로서 발전하고 도약하는 데에 개인전의 전 과정이 힘이 된다. 이번 전시는 양주시립미술창작스튜디오 777 레지던스 입주 작가로서 진행하는 것이다. 전시가 진행되는 갤러리777은 총 7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모텔을 개조한 것이라 작품들을 공간에 어울리게 위치시키는 것 자체가 도전이었다. 노출 콘크리트 벽으로 이뤄진 공간이어서 설치와 퍼포먼스 작업이 진행될 때 효과가 극대화되는 것 같다.” 

 

전주연, <우 ← 좌>, 퍼포먼스 영상, 6분 54초 looping, 2018. 도판 제공 = 전주연 작가

“단어 하나를 읽는 순간에도 
우리는 ‘지시’를 읽으려 한다. 
나는 이런 익숙함에 반대한다.” 

 

- 언어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꾸준히 지속되고 있다. 특히 이번 전시 ‘간지럼 태우기와 휘젓기와 때리기와 반전시키기(Tickling, Stirring, Hitting, and Twisting)’에서는 언어와 주체(의 정체성) 사이의 관계에 보다 집중한 것으로 보인다. 작가가 의도하는 바가 이전보다 명확히 드러나는 만큼 이전 작업에 비해 관객이 생각할 여지가 줄어든 것 같기도 하다. 텍스트(text)가 적혀 있는 각목을 쌓아 언어의 벽을 만들고, 줄넘기를 하면서 언어의 벽을 무너뜨리는 <Hitting>(2018)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언어를 배워갈수록, 즉 사회화될수록 자기만의 특수성(본래 모습)을 잃어버리는 상황에 저항한다는 이야기를 단조로워 보일 정도로 직설적으로 보여준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나의 작업이 언어를 해체하려 한 것임에도 지나치게 무겁고 사변적이어서 오히려 언어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는 고민이 있었다.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전 개인전에서 선보였던 ‘Field of Study’(2017)도 같은 맥락이다. 나는 텍스트로 이뤄진 잔디밭 위에서 줄넘기, 배드민턴, 펜싱을 하면서 놀았다. 말 그대로 즐겁게 뛰어 논 것이다. 언어가 만들어내는 엄숙하고 수직적인 위계 구도를 가볍고 수평적인 구도로 전환하고 싶었다. <Hitting>에서는 인공 잔디밭 대신 각목으로 유동적인 벽을 만들고 스스로 무너뜨리는 행위를 했다. 개인의 독특한 정체성은 언어의 구도를 약간 뒤틀거나 다른 방식으로 대치할 때 가장 잘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 ← 좌>(2018)에서는 텍스트를 읽어나가는 방향을 뒤집어 사회 구성원을 지배하는 거대한 언어의 규율에 순응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쉽게 읽히는 작업을 하고 싶었다. 실험을 해나가는 과정으로 봐주면 좋겠다.” 

 

- 본인에게 언어란 무엇인가?


“내가 원하는 것을 담기에는 항상 부족한 무엇이다.” 

 

- 본인의 작업처럼 언어 그 자체, 언어가 구성하는 사회에 주목하고 고정된 의미를 해체하려는 예술적 시도들은 오래 전부터 있었다. 개념 미술이 전개되면서부터 언어가 미술에서 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본인의 작업만이 갖고 있는 차별화되는 지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나의 작업은 텍스트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 말한다. 텍스트의 의미 자체보다 의미 구조를 물질적으로 바라보려는 시도라 말하고 싶다. 우리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음에도 언어는 너무 모호하고 흐릿하다. 나는 텍스트가 희뿌연 연기 같은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길 바란다.”  
 

전주연, <We can never put enough distance between here and here>, 카메라 렌즈, LED, 철, 가변 설치, 2018. 도판 제공 = 전주연 작가

- 작업이 전개될수록 퍼포먼스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작가는 언어를 물질화하기 위해 육체를 사용한다고도 했다. 언어와 그것이 만들어내는 개념, 혹은 텍스트가 연상시키는 형이상학적 사유의 경직성에 갇히지 않기 위해 그 반대항인 육체를 전면에 드러내는 것인가? 흐르는 시간 속에서 움직임의 과정이 부각된다는 점에서 퍼포먼스는 고정된 의미 체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잘 담아내는 방법으로 보인다. 그런데 한편으로 언어(사유)와 육체를 이분법적으로 분리하여 대립항을 설정하는 작가의 태도는 작가가 벗어나길 원하는 언어로 이루어진 규범의 세계를 답습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건 모순처럼 보인다.  


“퍼포먼스가 아닌 작업들에도 행위와 움직임이 축적되어 있다. 물론 언어를 다루는 작업을 하다 보니 지나치게 관념적인 영역에 함몰될 위험이 있어 의도적으로 직접적인 행위를 보여주고자 했다. 이분법적 대립항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는 지적은 맞다. 나 역시 언어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성장했고 지금도 살고 있다. 나의 모든 인식 구조는 그 안에서 만들어졌기에 언어의 구조 밖에서 사고를 전개하는 게 어렵긴 하다. 그러나 나는 구조 밖의 지점을 생각하려 노력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노력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작업을 계속 이어나가다 보면 언어의 밖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최소한 어떤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거라 믿는다.”  

 

- 언어의 밖에서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사실 언어의 밖으로 나가도 문제다. 그러면 사유나 소통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맞다. 언어의 밖으로 나가는 완벽한 방법은 죽음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육체의 죽음이든, 사회적 죽음이든.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그에 관한 주제도 다룰 것 같다. 현재는 아껴두고 있다. 죽음을 다루기엔 아직 삶에 대한 경험이 많지 않은 것 같다.”  
 

전주연, <때리기>, 각목, 페인트, 200cm x 160cm, 2018. 도판 제공 = 전주연 작가

- 인간이 죽으면 언어로부터 자유로워지는가? 인간은 자신의 죽음 이후에도 언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주장도 충분히 가능하다. 우리에 대한 기억, 평가, 그에 대한 기록 등의 대부분은 언어로 이뤄진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또한 언어를 체화하면서 나 자신의 본래 모습을 잃어버린다고 했는데, 반대로 언어가 나의 모습을 더 명확히 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한계가 존재한다 해도 언어는 개인의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개인의 정체성은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관계를 맺고 발전시키는 것도 언어다. 이것은 매우 난해하고 복잡한 문제다. 언어(와 그것이 상징하는 것들)를 해체하거나 불분명하게 만들어 궁극적으로 무엇을 이끌어내고 싶은 것인가? 


“대부분의 우리는 어떤 텍스트를 읽거나, 심지어 단어 하나를 읽는 순간에도 그것이 지시하는 바가 무엇인지 찾아내려 한다. 무의식적으로 가장 명확한 하나의 의미(정답)를 찾으려 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익숙함에 반대한다. 이처럼 하나의 의미를 규정하는 행위가 반복되면 나 자신을 잃어버리게 된다. 가장 보편적이지만 가장 모호한 의미만을 갖게 되는 것이다. 나의 작업은 (언어의) 의미가 유동하는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와 같다. 하나의 벽을 지나갔을 뿐인데 벽에 새겨진 ‘NO~!’라는 글씨가 뒤집혀 보이는 것처럼, 텍스트의 의미는 언제든 역전되거나 바뀔 수 있다. ‘NO~!’라고 적힌 벽을 오가는 관객들은 ‘아나바시스’ 시리즈에서 텍스트와 유토 사이를 오갔던 흑연과 같다. 흑연이 텍스트의 벽을 넘나들었던 것처럼 관객들은 스스로 의미를 생성하고 역전시키고 해체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나는 사람들이 나의 작업을 통해 언어와 그것이 만들어낸 이 세상에 대해 질문하길 원한다.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언어(텍스트)의 의미를 향해 여행 중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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