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초 신동빈 회장이 구속수감되면서 시작된 롯데그룹의 ‘비상 경영’이 100여 일 넘게 순항 중이다. 지난 4월 1일 롯데지주가 6개 비상장 계열사를 분할 합병하며 그간의 숙원이던 순환출자 고리를 죄다 정리했고, 우려됐던 롯데홈쇼핑 재승인도 3년 연장에 성공했다. 이에 롯데그룹은 8개 온라인 몰을 통폐합하고 3조 원을 투자하는 이커머스 사업 구상을 발표하는 한편 롯데지주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롯데정보통신 상장도 추진 중이다. 다만 총수 부재로 대형 M&A나 해외사업이 답보 상태여서 그룹 임직원들은 5월 30일부터 시작되는 2심 재판의 희소식을 기대하는 분위기다.
비상 경영위, 주요 현안 성공적 처리
지난 2월 13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재판 1심에서 뇌물수수 혐의 유죄를 인정받아 징역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창사 51년 만에 ‘총수 부재’라는 위기를 맞은 롯데그룹은 현재까지 황각규 부회장이 이끄는 비상경영위원회를 중심으로 운영 중이다.
비상경영위원회 구성원은 롯데지주 공동대표인 황 부회장과 민형기 컴플라이언스위원장, 이원준 유통BU(사업부문)장, 이재혁 식품BU장, 허수영 화학BU장, 송용덕 호텔&서비스BU장 등 6인의 부회장단이다. 이들은 매주 화요일 회의를 열어 그룹 및 계열사의 핵심 경영 현안을 체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는 과거 그룹의 대소사를 만기친람했던 신 회장의 경영 스타일을 감안, 총수 부재의 공백이 매우 클 것이라 우려했다. 하지만 롯데그룹은 별다른 잡음 없이 여러 고비를 순조롭게 돌파했고 오히려 신 회장의 지배력이 강화된 상황이라 “위기를 기회로 바꿨다”는 평까지 나온다.
첫 번째 고비는 2월의 롯데지주-6개 계열사 분할합병안 처리였다. 순환출자 해소와 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신 회장은 일찍부터 지주회사 체제 전환을 추진해왔고, 그 핵심 절차가 롯데지알에스, 한국후지필름, 롯데로지스틱스, 롯데상사, 대홍기획, 롯데아이티테크 등 6개 비상장 계열사의 투자 부문을 지난해 10월 출범한 롯데지주가 흡수하는 것이었다.
2월 27일 롯데지주는 임시주주총회를 열고 6개 비상장 계열사의 분할합병 승인 안건을 87.03%라는 압도적 표차로 통과시켰다. 그 결과 지난 4월 1일 롯데지주는 2014년 6월 당시 74만 8963개에 달하던 순환출자 고리를 모두 해소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롯데지주 특수관계인과 신동빈 회장의 지분율은 더 높아졌다. 의결권이 없는 자사주 비중이 37.3%에 달해 나머지 주주들의 의결권 지분율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의결권을 기준으로 한 롯데지주 특수관계인 지분율은 기존 54.3%에서 60.9%로 높아졌고, 신 회장의 지분율도 기존 13.0%에서 13.8%로 올라갔다.
5월의 롯데홈쇼핑 재승인은 두 번째 고비로 지목된다. 롯데홈쇼핑은 유통그룹 롯데로서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채널이었으나 지난해 말 전병헌 전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과 관련된 뇌물 의혹 사건에 연루되면서 재승인 여부가 불투명해진 상황이었다.
전 전 수석은 국회 미래창조과학통신위원회 소속 의원이었을 때 롯데홈쇼핑으로부터 한국 e스포츠협회 대회 협찬비 명목으로 3억 원의 금품을 받은 혐의로 기소돼 재판 중이다. 게다가 강현구 전 롯데홈쇼핑 대표 역시 홈쇼핑 재승인을 받기 위해 허위 사업계약서를 제출하고 로비와 불법자금을 제공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어서 롯데로서는 재승인에 실패하더라도 이의를 제기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다행히 5월 3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TV홈쇼핑 재승인 심사위원회가 롯데홈쇼핑에 대해 올해 5월 28일부터 2021년 5월 27일까지 3년간 재승인하기로 했다는 심사결과를 발표하면서 롯데홈쇼핑은 최악의 위기를 피하게 됐다.
온라인몰 통합 3조 원 투자… 롯데정보통신 상장도 추진
잇따른 위기를 순조롭게 넘기자 비상경영위원회는 좀더 과감한 투자에 나섰다.
5월 15일 롯데쇼핑은 향후 5년간 온라인 사업에 3조 원을 투자하고, 백화점·마트·홈쇼핑·면세점 등 계열사별로 운영하던 8개의 온라인몰을 통합 운영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2022년까지 온라인 매출 20조 원을 달성하고, 오프라인뿐 아니라 온라인에서도 유통업계 1위 자리를 굳히겠다는 목표도 공개했다.
롯데 계열사들의 통합 온라인몰 앱을 2020년 선보이고, 계열사별로 흩어져 있던 고객 정보를 하나로 통합해 온·오프라인이나 계열사 간 경계 없이 고객에게 맞춤형 정보와 서비스를 제공하며, 1만 1000여 개 오프라인 채널을 배송 거점으로 활용하고, 롯데의 물류·택배 계열사를 활용해 차별화된 배송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계획과 옴니채널 체험 매장, 무인점포 확대 계획 등을 담았다.
이를 위해 롯데는 계열사별 시스템 인력과 연구·개발(R&D) 조직을 통합한 ‘e커머스 사업본부’를 오는 8월 출범시킬 예정이다.
롯데지주의 기업가치 제고를 위해 롯데정보통신 상장도 추진 중이다.
롯데정보통신은 지난 1996년 설립된 SI(시스템통합) 계열사로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빅데이터, 클라우드, 블록체인, 핀테크 등 최신 기술을 활용한 IT 서비스를 운영한다. 2017년 기준 매출 6913억 원, 영업이익 327억 원을 기록한 이 회사는 지난해 11월 투자부문과 사업부문으로 물적분할된 이후 4월 1일을 기해 투자부문이 롯데지주로 합병됐다.
남은 존속법인은 롯데지주의 100% 자회사다. 지난 3월 15일 한국거래소 유가증권시장본부에 상장예비심사 신청서를 제출한 이 회사가 상장에 성공할 경우 롯데지주 자회사의 첫 번째 상장으로 기록된다.
앞서 롯데지주는 기업 및 주주가치 상승을 위해 지속적인 자회사 상장을 검토하겠다고 밝힌 바 있어 롯데지알에스, 코리아세븐, 롯데건설 등이 추가 상장 후보로 꼽히고 있다. 이들 비상장 계열사가 지속적으로 상장에 성공할 경우 롯데지주의 기업가치는 크게 상승할 것으로 예상된다.
해외사업‧대형 M&A 부진 해결 안돼
이처럼 롯데그룹의 비상경영체제가 순항하면서 업계는 ‘총수 공백’의 여파가 예상보다 크지 않다는 평을 내리지만, 그룹 안팎에서는 대규모 투자나 글로벌 진출, 인수·합병(M&A) 등 굵직한 현안 대응에 한계가 있다는 반응이 많다.
특히 우려가 큰 분야는 해외 사업이다. 롯데그룹이 미국, 중국, 유럽,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에서 진행 중이거나 추진되고 있는 해외 사업 규모가 약 100억 달러(10조 원)에 달하는데 최종 의사 결정권자가 부재한 상황이라 대규모 투자나 전략적 접근이 원활하지 못한 상황이라는 것.
업계 관계자는 “국가 단위 프로젝트의 경우 행정 수반 등 현지 최고위층과 협의가 필수적일 때가 많다”며 “해외 정‧재계 인사들과 네트워크가 많은 신 회장의 공백이 계속 이어질 경우 자칫 중요한 사업 기회를 눈뜨고 놓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