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2호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2018.06.18 09:33:04
(CNB저널 =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18일차 (마나과)
니카라과 운하?
오늘은 낮 최고 섭씨 32도를 예상한다. 도시 탐방에 나선다. 콩나물시루 ‘치킨 버스’를 탈 엄두가 나지 않아 몇 대를 보내니 운 좋게 승객이 뜸한 버스가 온다. 얼른 잡아타고 시내 중심 가까운 곳까지 이동한 후 야자수 우거진 넓은 길을 따라 걸으니 곧 혁명광장(Plaza de la Revolucion)에 닿는다. 광장은 마나과 호수(Lake Managua)를 안고 있고 멀리 호수 건너로는 화산들이 여럿 버티고 서있어서 경관이 빼어나다. 호수는 대형 선박들이 수십 척 오가도 충분할 만큼 넓다.
니카라과에 있는 두 개의 거대 담수호인 마나과 호수와 니카라과 호수(Lake Nicaragua), 그리고 산후안 강(Rio San Juan)을 배로 지나고 짧은 육지 구간만 통과하면 대서양과 태평양 사이를 상대적으로 짧게 덜 힘들이고 오갈 수 있다고 한다. 니카라과는 파나마를 능가하는 운하 입지 조건을 갖추었음을 확인한다.
실제로 이 루트는 미국의 캘리포니아 골드러시(Gold Rush, 1849) 시절 미국 동부에서 서부로 가는 주요 통로로 활용되기도 했다. 사실 19세기 후반 이후 미국과 유럽의 여러 세력들이 니카라과를 통과하는 운하를 건설하려는 계획 또는 시도를 여러 번 했다고 한다. 이러한 시도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중국의 민간 자본이 운하 건설에 뛰어들어 2014년 착공까지는 했으나 경제성이 맞지 않아 더 이상 공사를 진척시키지 못하고 있다.
혁명 광장
산디니스타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이 나라의 자부심을 반영하듯 광장과 도시 중심에는 반미 좌파 혁명 영웅 산디노(Augusto Sandino)의 동상은 물론이고 베네수엘라 차베스(Chavez) 전 대통령, 칠레 아옌데(Allende) 전 대통령 등 남미 좌파 혁명가들의 동상과 각종 기념비, 조형물이 유독 많다. 광장 한켠 호숫가에 아름답게 조성된 공원 길을 따라 호숫가로 접근하면 아옌데 다리(Salvador Puente)를 만난다. 공원 입구에는 ‘존엄의 대통령’(Presidente de la Dignidad)이라고 새겨진 포스터가 서있다. 혁명광장 중앙에는 요한 바오로 Ⅱ세 교황의 두 차례 방문(1983, 1996)을 기념하는 오벨리스크(obelisk)가 서있을 뿐 아직은 정돈되지 않아 황량해서 아쉽다
.
혁명광장에서 호수 반대편 시내 방향으로 조금만 나오면 만나는 중앙공원(Parque Central)에는 산티아고 성당(Catedral de Santigao, Old Cathedral이라고도 부름), 루벤다리오 국립극장(Teatro Nacional Ruben Dario), 대통령 궁(Palacio Nacional de la Cultura) 등 니카라과의 핵심 시설들이 모두 모여 있다. 공원 한 쪽에는 이 나라의 영웅들을 기리는 각종 기념비, 동상들과 함께 꺼지지 않는 불꽃이 있어서 방문자들의 발길을 오래 붙잡는다.
소모사, 산디니스타, 콘트라
도심은 1972년 발생한 대지진이 완전히 복구되지 않아서 빈터로 남은 곳이 많다. 이 참혹했던 자연재해 중에서도 소모사(Somoza) 정권은 해외에서 답지한 재해 성금을 유용했으니 축출과 함께 좌파 사회주의 산디니스타 정권의 출범(1980)은 당시 상황에서는 역사의 필연처럼 느껴진다.
도심에 위치한 메트로폴리탄 성당(Catedral Metropolitana, New Cathedral이라고도 부름)도 마나과의 대표적 건축물로서 묘한 기하학적 모습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성당치고는 매우 독특한 모습인데 성당 건축에 필요한 450만 달러의 대부분은 도미노 피자 회장이 기부했다고 한다.
이쯤에서 니카라과 하면 연상되는 소모사(Somoza), 산디니스타(Sandinista), 콘트라(Contra) 등의 의미를 정리하고자 한다. 소모사 가족은 1936년부터 무려 43년 동안 미국의 지원으로 부자(父子) 세습 독재 체제를 유지하다가 1980년 산디니스타(Sandinista, 반미좌파 혁명영웅 산디노Sandino를 추종하는 집단이라는 뜻) 혁명으로 몰락했다. 그러나 니카라과의 공산화를 우려하는 미국이 소모사 잔존 세력들을 지원한 이른바 콘트라(Contra) 내전(1980~1991년)이 10년 넘게 지속되면서 2만 3000명에 달하는 인명 피해는 물론이고 이 나라의 발전은 심각하게 지체되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기점에서 버스를 탔기 때문에 앉아서 떠났으나 갈수록 승객이 늘어나 결국 치킨버스가 되었다. 와중에 온갖 잡상인들이 올라와 좁은 버스를 비집고 돌아다닌다. 그러나 짜증날 것은 없다. 과거 우리나라의 그런 시대를 살았던 나에게는 차라리 정겨운 광경이다.
중남미 현대 정치사의 만화경
잠자리에 누워 짧았던 2박 동안의 니카라과 방문의 의미를 되새김질 해 본다. 이데올로기와 현실의 갈등이었다고나 할까? 시회주의 좌파와 친미 우파의 끊임없는 갈등, 혁명과 반혁명(쿠데타)이 반복되어 온 중남미 근현대 역사가 농축된 현장을 보는 것 같아서 결코 즐겁지만은 않았다. 반미 좌파 산디니스타 혁명으로 미국에게는 굴욕을, 라틴아메리카에는 새로운 희망을 주었던 산디니스타들도 결국 경제 실패로 오래 집권하지는 못했다. 자본주의 상징물들(미국 패스트푸드 체인, 쇼핑몰, 카지노)로 넘쳐나는 오늘날의 마나과를 보면서 물고 물리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새삼 확인한다. 요한 바오로 Ⅱ세 교황이 두 번씩이나 이 작은 나라를 방문했던 의미도 조금은 깨달을 수 있을 것 같다.
19일차. (마나과 → 보고타 환승 → 상파울루)
새벽 비행기로 마나과를 떠나 산살바도르, 보고타에서 환승하며 이번 중남미 여행을 시작했던 브라질 상파울루까지 되돌아가는 머나먼 남행길에 나선다. 자정 가까이 돼서야 상파울루 과룰류스 공항(GRU, Guarulhos)에 닿았지만 장대한 남미 대륙 여행을 무사히 마친 것에 크게 안도한다. 공항에서 멀지 않은 숙소를 찾아 들어간다.
20일차. (상파울루 → 마드리드)
상파울루 나들이
브라질 거주 교민인 대학 동기가 바쁜 중에도 나를 데리러 숙소로 왔다. 그의 차를 타고 봉헤찌로(Bom Retiro) 지역 한인 타운에 나가 함께 식사를 하며 반가운 대화를 나눈다. 정말 오랜만에 맛있는 한국 음식을 먹으니 지난 20일 간의 힘들고 외로웠던 중남미 여행에서 쌓인 몸과 마음의 긴장이 눈 녹듯 사라진다. 상파울루의 떠오르는 보헤미아 거리 빌라 마달레나(Villa Madalena)를 둘러 본 후 친구와 작별하고 마드리드 행 항공기에 오른다. 한국을 떠나 브라질로 올 때와는 달리 계속 동쪽 방향 비행이라서 시간은 훨씬 적게 걸릴 것이고, 무엇보다도 내 나라, 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니 발걸음이 가볍다.
중국인들 때문에…
마드리드 행 에어 차이나(Air China) 항공기는 승객 중 약 2/3 가량이 중국인들이다.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그들의 고약한 습성은 상파울루 공항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시끄러운 것은 기본이고, 역한 냄새를 풍기는 족발을 꺼내 씹는다든지 중년 남성 여럿이 공항 맨 바닥에 둘러 앉아 카드 게임을 하는 모습 등이 그런 것들이다. 그래도 거부할 수 없을 만큼 저렴한 항공 요금 때문에 중국 여객기를 타는 것이니 탓할 것은 그들이 아니라 나 자신인지도 모른다. 참고로, 이번 여행길에서 서울-상파울루 구간 에어차이나 왕복 요금은 귀국길 마드리드 5-6일 스톱오버를 포함하고도 98만 원이었다.
오늘 만난 친구는 상파울루 교민 사회도 하염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중국인들 때문에 좋은 시절은 지났다고 한다. 한국 교민들은 도저히 경쟁할 수 없는 중국인들의 저임금과 저가 물품 공세 때문에 수십 년 공들여 구축했던 상파울루 한국 교민 상권이 심대하게 위협받고 있다는 주장이다. 사드 갈등으로 중국의 민낯을 본 후 한국인들이 중국을 기회보다는 위협과 갈등 요소로 보기 시작한 것은 차라리 잘된 일이라는 역설마저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