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보험사들이 손해사정 자회사에 손해사정 업무를 위탁하는 비율이 날로 늘고 있다. 자회사들의 매출 대부분이 모회사를 통해 발생하는 터라 ‘일감 몰아주기’ 논란이 높아지는 것은 물론 최종 소비자에게도 부담이 되고 있어 정치권과 금융감독원, 공정거래위원회 등이 시정을 촉구하고 있지만, 손보사들은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이 늘어나 결과적으로 소비자의 보험료 부담이 높아질 것'이라며 반박하고 있다.
보험 들어도 필요할 때 도움 못받는 이유
A씨는 희귀질병을 앓는 장애인으로 갑작스런 교통사고를 당했다. 무과실 피해자라 자동차보험으로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보험사(DB손해보험)가 피해자의 질병을 치료해줄 이유가 없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이 그 주장을 인정해 A씨는 교통사고 치료비 약 4100만 원을 반환하라는 선고를 받았다. 피해자의 과실이 전혀 없는 무과실 교통사고인 데도 기존 질병 이력 때문에 A씨는 치료비 약 4000만 원, 이자 1000만 원, 보험사 소송 비용과 변호사비 약 1000만 원 등 총 7500만 원의 금전적 손해를 입어 신용불량자가 되고 집이 경매에 넘어가게 됐다.
위 내용은 지난 5월 20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자동차보험사의 횡포’라는 제목으로 올라온 게시물의 주요 내용이다.
사실 이 같은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가입할 때는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줄 것처럼 설득하지만, 정작 가입자가 필요로 하는 시점에는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보험료 지불을 거절하거나 축소한다. 금융감독원 소비자 민원의 60% 이상이 보험 관련 민원일 정도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도가 ‘손해사정’이다. 보험사고가 발생했을 때 손해액 및 보험금 등이 보험사업자에 의해서만 정해질 경우 보험계약자‧피보험자‧보험수익자‧피해자 등의 권익이 침해될 수 있으므로 중립적 위치에 있는 전문자격자가 전문적이고 공정하며 합리적인 보험금을 산출하게 하려는 제도다.
손해사정사는 현장 조사로 손해 사실을 확인하고 유사한 보험 사례와 판례를 검토한 후 실제 손해 정도를 공정하게 판단하는 업무를 맡는다. 이후 보상 청구의 타당성 여부와 적합한 절차에 따라 이루어졌는지 확인하며, 최종적으로 조사 자료와 보험약관 등을 분석‧정리해 지급해야 할 보험금을 산출한다.
보험업 감독규정 제9-16조는 보험 가입자에게 보험사보다 먼저 손해사정사를 선임할 권리를 부여한다. 이 경우 손해사정사 선임 수수료는 보험사가 부담해야 하며 보험사는 손해사정사가 제출하는 손해사정서를 거절할 수 없다.
하지만 현장에서 이 제도는 사실상 유명무실하다. 손해사정 업무 대부분이 보험사에 소속된 자회사를 통해 이뤄지기 때문이다. 손해사정사는 크게 보험사에 고용된 ‘고용손해사정사’와 보험사에 고용되지 않은 ‘독립손해사정사’로 나뉘는데 고용손해사정사가 업무를 맡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자회사 손해보험 위탁률 나날이 상승 중
금융당국에 따르면, 삼성생명, 교보생명, 한화생명 등 대형 생명보험사 3곳과 삼성화재, 현대해상, DB손해보험, KB손해보험 등 대형 손해보험사 4곳이 손해사정 자회사 12곳에 맡긴 손해사정 위탁률은 2017년 기준 93.1%에 달한다. 게다가 이 비율은 2015년 92.4%, 2016년 92.7%로 매년 상승 중이다.
12곳 손해사정 자회사의 2017년 총 수익은 1조 628억 원인데 이 중 모기업 보험사나 그룹 계열사들과의 거래를 통해 올린 수익이 1조 357억 원으로 약 97.5%에 달한다. 2016년의 경우 총 수익은 9770억 원이었으며 이 중 97.5%인 9521억 원을 모회사와의 거래를 통해 얻었다. 수익 규모는 약 8.8%(836억 원) 증가했으나 비중이 97.5%로 동일하다는 건 보험사들이 이 구조를 바꿀 생각이 없음을 방증한다.
특히 삼성생명서비스손해사정, 삼성화재애니카손해사정, 한화손해사정, DB자동차보험손해사정, DBCAS손해사정, DBCSI손해사정 등 6개사의 경우 2017년 수익의 전액이 모기업이나 그룹 계열사들과의 거래로 인한 것이었다.
다른 기업들도 내부거래 의존도가 KB손해사정(99.6%), 현대하이라이프손해사정(99.4%), DBCNS자동차손해사정(97.6%), 현대하이카손해사정(96.6%), KCA손해사정(89.8%), 삼성화재서비스손해사정(87.4%) 등으로 별반 차이가 없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건 보험 가입자들의 불이익이다. 손해사정회사들이 보험사에 사실상 종속된 상태인지라 가입자와 보험사 간 불협화음이 발생할 때 보험사의 편을 들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부 “자기 손해사정 금지해야” vs 보험사 “소비자 부담 늘어”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정부와 정치권은 다양한 방안을 모색 중이다.
우선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 1월 ‘공정한 보험금 산정을 위한 자기손해사정 금지 입법’을 권고하는 공문을 보험사와 금융위원회에 보냈다. 공정위는 공문을 통해 “손해사정사가 소속 보험사나 업무를 위탁한 보험사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어려워 보험사에 편향된 손해사정을 빈번하게 한다”며 “공정한 손해사정을 위해 보험사의 자기 손해사정을 금지할 것”을 권고했다.
금융위원회도 같은 달 보험업계 관계자들을 불러 손해사정 문제 개선을 위한 ‘손해사정 개선방안 태스크포스(TF)’ 회의를 진행하고 보험업법 시행령을 개정했다.
정치권에서도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법안이 논의 중이다. 보험사의 손해사정 결과에 이의가 있을 경우 계약자가 독립손해사정사를 선임, 손해사정을 재산정할 수 있도록 하되 그 비용을 보험사가 부담하게 하는 법안이다.
보험사들은 난색을 표명한다. 보험사가 고객의 별도 손해사정사 선임 비용을 부담할 경우 중복조사가 늘어나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이 늘어날 수 있다는 것. 조사비가 늘어날 경우 결국 보험료가 상승하게 되므로 다른 가입자들이 손해를 입을 수 있다는 논리다.
이에 대해 조연행 금융소비자연맹 회장은 “보험사들의 주장처럼 비용이 늘어나지 않고 오히려 줄어든다. 애초에 상법에는 손해액 산정 비용을 보험자 부담으로 한다고 명시돼 있는데 이를 보험업 감독규정을 통해 소비자가 선임할 경우는 소비자가, 보험사가 동의할 경우에만 보험사가 이를 부담한다고 규정한 것이 문제다. 여태까지 보험사가 이를 동의한 사례가 없다”며 “굳이 새로운 입법을 할 필요도 없고 이 규정만 수정하면 소비자가 자유롭게 손해사정사를 선임하고 보험사가 비용을 부담하게 되는데 금융위가 이를 시정하지 않는 건 문제”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