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6호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2018.07.16 10:02:23
(CNB저널 =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5일차 (이스탄불 → 다카르 → 생루이 도착)
바람의 도시 누악쇼트
자정이 막 지난 시각에 이스탄불을 이륙하는 터키항공기는 아프리카인들로 가득 찼다. 항공기는 사하라 사막 위를 남서 방향으로 6시간 20분 날아 모리타니아(Mauritania) 수도 누악쇼트(Nouakchott) 공항에 기착, 승객 일부를 내리고 또 그만큼을 새로 태운다. 도시와 도시를 직항으로 잇기에는 승객 수요가 부족한 아프리카에서 항공기들은 시외버스처럼 여러 도시들을 차례로 들르며 승객을 내려주고 태운다. 아랍 아프리카와 블랙 아프리카의 접점에 있는 만큼 내리고 타는 승객들의 용모가 오묘하게 복잡하다.
사막 한가운데 지은 현대식 공항에는 베르베르어로 ‘바람의 도시’라는 이름답게 황량한 모래 바람이 분다. 사하라 사막 남쪽 끝, 열대 습윤 지대와 닿은 대서양 항구 도시이다. 항공기에서 밖으로 나가지는 못했지만 졸지에 아프리카 오지 깊숙한 곳에 발을 딛는 기록을 하나 남긴다. 사하라 아프리카와 대서양 서부 아프리카의 경계 지역에 자리 잡은 도시는 원래 1만 5000명을 수용할 예정으로 설계, 건설되었으나 주변 지역의 가뭄과 사막화로 인구 100만 명이 몰려들어 사는 도시가 되고 말았다. 아프리카의 많은 대도시가 그렇듯 온갖 종류의 도시 과밀 문제가 발생하는 건 당연한 결과이다. 도시에 좀 더 접근하지 못하고 새벽녘 먼발치에서 잠깐 기착했다 떠나야 하니 아쉬울 뿐이다.
드디어 서부 아프리카
누악쇼트를 이륙한 항공기는 한 시간을 더 날아 세네갈(Senegal) 수도 다카르(Dakar)에 도착했다. 에어컨이 불충분한 공항 건물은 오전 7시인데 이미 후끈한 열기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미지의 세계를 앞두고 가슴이 뛰는 것은 여행자의 본능인가 보다. 남한의 2배 면적, 인구 1500만 명의 세네갈은 구대륙 또는 Afro-Eurasian 대륙에서 가장 서쪽에 자리 잡은 나라이다. 15세기 중엽 이후 포르투갈을 시작으로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 유럽의 여러 세력들이 대서양 아프리카 무역권을 놓고 각축을 벌인 곳이다. 해안 지역 무역권은 점차 아프리카 대륙 전체로 번져 나가면서 유럽의 아프리카 식민지화의 전진 기지 역할을 하였다.
고통스런 합승 택시 여행
간단한 입국 심사 후, 택시를 타고 시내 외곽 가르 퐁피에(Gare Pompiere) 버스터미널로 이동하여 생루이(Saint-Louis) 행 셉트플라스(Sept Place) 7인승 합승 택시에 오른다. 족히 30~40년은 되었을 아주 낡은 프랑스제 푸조 스테이션 왜건의 뒤쪽 짐칸에 간이 의자를 놓고 세 자리를 더 만들어 7인승으로 꾸민 셉트 택시는 역한 디젤 매연을 뿜으며 북행한다.
에어컨은 당연히 없다. 도로는 의외로 잘 닦여 있다. 해가 곧 중천에 떠오르니 짐칸에 억지로 꾸민 비좁은 뒷자리는 견딜 수 없이 더워진다. 이곳의 더위는 한국의 삼복 중에서도 가장 더운 날을 능가한다.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할 무렵 택시는 280km, 5시간의 운행을 무사히 마치고 생루이에 도착한다. 바닷가이지만 여기 또한 어지러울 정도로 덥다.
우월한 신체조건 때문에
체격이 출중한 세네갈 사람들, 특히 여성들의 늘씬한 체격이 눈길을 끈다. 갈 수만 있다면 뉴욕이나 파리에 가서 당장 세계적인 패션모델로 활동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왜 자꾸만 슬퍼지는가? 바로 이 월등한 신체조건 때문에 지난 시절(17~19세기) 그들은 대서양 노예무역(Atlantic slave trade)의 희생자가 되어야만 했던 슬픈 역사가 떠오르는 탓이다. 신대륙이 가장 가까운 아프리카 서쪽 끝이라는 지리적 조건과 함께 더위에 잘 견디는 기후 적응력까지 갖춘 그들은 중남미 카리브해, 브라질의 사탕수수 밭과 미국 남부 농장 노동에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작은 섬에서 시작한 유럽의 아프리카 찬탈
생루이의 도시 중심은 본토와 다리로 연결된 엔다르 섬(Ile de N’Dar)이다. 남북 2km, 동서 400m 폭에 불과한 작은 섬이지만 역사적 의미 덕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659년, 프랑스 루이 14세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도시는 유럽인들이 아프리카 서부 해안에 처음으로 건설한 도시이고, 1872년부터 1957년까지 85년간 프랑스 세네갈의 수도였다. 알록달록 밝은 색 외벽과 겹창문의 열대 콜로니얼식 건물들이 잘 보존되었다는 것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이유이다.
진짜 아프리카 여행
이방인을 졸졸 따라다니는 어린이들의 호기심어린 큰 눈은 보면 볼수록 왠지 모를 아련함과 서러움이 깃들인 듯하다. 오가는 사람들의 밝은 얼굴과 이방인을 향한 환대의 눈빛, 그리고 그들이 던지는 ‘봉쥬르’ 인사말을 통해 오히려 내가 위안 받는다. 오후의 태양은 참혹하게 뜨겁다. 일기를 정리하는 지금 시각 밤 8시, 오늘 지나온 골목 안 누추한 천막 학교, 그래도 빛나는 아이들의 눈동자가 오버랩되어 머릿속을 맴돈다.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보았고, 고통 속에서 행복을 꿈꾸는 ‘진짜’ 아프리카 여행이다. 이미 해는 져서 어두워진 지 오래지만 여름 내내 달구어진 대지는 아직도 열기를 내뿜고 있다. ‘열대야’라는 단어의 의미를 제대로 체험한다. 한국의 삼복더위가 견딜 수 없다고 불평하며 살아온 나는 반성의 시간을 갖는다.
6일차 (생루이 → 다카르 도착)
차라리 지중해의 물귀신이 될지언정
다카르로 돌아가기 위하여 터미널로 향한다. 아무데나 버리고 또 버린 쓰레기는 가는 곳마다 산을 이루어 토양 침식은 차치하고 냄새가 마을에 진동한다. 그 바로 옆에서 사람들이 살고 아이들이 뛰놀고 염소와 소가 자란다. 식민지 수탈은 참혹했다. 교육도, 학교도, 철도도, 위생도 없이 오로지 빼앗아만 갔다. 수탈해 가는 것의 단지 1/10이라도 이 땅에 남겼더라면 이렇게까지 참혹한 지경은 아니 됐을 것이다. 갑자기 맞은 독립, 아무 것도 준비한 것 없이 어느 날 찾아온 독립은 약보다는 독이 되었을지 모른다. 스스로 나라를 키우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참으로 슬픈 서부 아프리카 여행이다.
다시 셉트플라스를 타고 다카르까지 고통스러운 길에 오른다. 그래도 현지인들에게 셉트는 럭셔리 교통수단이다. 신이 얄밉다. 인간이 이렇게 살 수는 없다. 유럽 땅을 밟기 위하여 지중해를 건너다 한 해 5천명의 아프리카인들이 수장된다. 필사의 탈출이라고 하는 게 낫겠다. 이 땅에서 힘들게 살다 죽느니 가는 길에 죽더라도 유럽을 꿈꾸는 것 아닐까?
대륙의 ‘진짜’ 서쪽 끝
숙소에 도착하여 원기를 회복한 뒤 알라메디 곶(Pointe des Alamedies)으로 향한다. 아프리카-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이다. 영화로울 것 없는 땅인 듯, 그 흔한 기념비 하나 없다. 기념비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허름한 음식점들이 가득하다. 해변에는 겁 없는 서퍼(surfer) 몇 명이 대서양의 거친 파도에 몸을 맡긴다. 오늘도 여지없이 야속한 석양은 사연 많은 수평선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7일차 (고레 섬 탐방)
이미 머나먼 타향
택시를 타고 다카르 항구(Port de Dakar)로 나가 고레 섬(Ile de Gorée) 가는 페리를 기다린다. 페리로 20분, 육지에서 지척이지만 머나먼 대륙으로 팔려갈 노예들이 송출되었던 곳이다. 고향 땅을 바로 코앞에 두고도 갈 수 없어 몸부림치는, 장차 펼쳐질 가혹한 운명조차 알지 못한 채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대서양의 거센 파도뿐이었다. 그나마 살아서 대서양을 건너간다면 다행이다. 항해 중 15∼30%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험한 바닷길이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대서양 노예무역
길이 900m, 폭 350m의 작디작은 섬이 인류 역사를 통하여 가장 잔인했던 시절을 겪었다. 다카르 북쪽 생루이(Saint-Louis)에서 행해지던 노예 중계 무역을 이어받아 지난 수백 년 간 송출한 노예가 도대체 몇 명인가? 혹자는 당시 세네갈 인구의 1/3이, 혹자는 1200만∼2000만 명으로 추산되는 노예들이 15세기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약 400년간 팔려 나갔다고 주장한다. <뿌리>(Roots, 소설 1976년, 미국 ABC-TV 미니시리즈는 1977년)의 작가 알렉스 헤일리(Alex Haley)의 조상 쿤타 킨테가 노예로 잡혀 온 곳도 세네갈 인접 갬비아(Gambia) 어디쯤으로 설정되어 있다.
노예선이 작아 그나마 이 정도 숫자로 멈추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때로는 부족 간 전쟁에서 패배한 포로로, 때로는 납치로 끌려와 신대륙으로 팔려 나갔다. 부족 간 전쟁이 없을 때는 일부러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고 한다. 이 섬은 처음 발을 디딘 포르투갈인들이 1536년 노예 송출 중계항으로 이용한 이후 네덜란드와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17세기 중엽에는 영국, 그리고 프랑스의 손으로 넘어갔다.
인류 역사의 가장 잔인했던 시절
육지에서 불과 3km, 그러나 뱃길은 험하고 섬 주위는 험한 암석과 절벽으로 둘러싸여 절해고도 같은 느낌을 준다. 선착장에 내려 섬 일주를 시작한다. 섬에는 1000명 정도의 주민들이 주로 폐허가 된 옛 포르투갈식 건물에서 살고 있다. 지금은 돌담길과 꽃이 어우러진 고즈넉한 정취의 섬이지만 이 땅에서 탄식했을 수백, 수천만의 노예들을 생각하면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섬에는 바다를 조망하는 언덕마다 포대가 설치되어 있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섬을 놓고 여러 유럽 세력들이 다투었음을 말해 준다.
견딜 수 없이 덥더니 요란한 폭풍우가 들이 닥친다. 바다는 무섭게 격랑을 치지만 동네 청년들은 비가 오자 시원해진 틈을 타 축구에 여념이 없다. 물론 맨발이지만 몸은 날렵하고 개인기는 절묘하다. 축구 강국 세네갈은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닌가 보다.
마을 어느 모퉁이, 노예들이 갇혔던 집들은 이제 폐허가 되고 대신 아프리카 노예 해방 기념 조형물이 서있다. 손목에 채워졌던 쇠사슬을 끊어 버리고 해방을 맞이하는 노예를 그의 아내가 맞이하는 장면을 형상화한 동상이다. 후덥지근한 바다 내음이 몰려왔을 어느 잔인했던 여름 날 쓰인 인류 역사의 어두운 한 페이지를 웅변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형식만 바뀌었을 뿐 노예 역사는 아직도 지구촌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다시금 가슴이 먹먹해진다.
돌아올 수 없는 문
섬의 북쪽 끝 선착장 부근, 지금은 역사 박물관으로 꾸며진 노예의 집(slave house)에 들른다. 노예의 집 어느 한 귀퉁이 음습한 골목은 곧 바다로 이어져 ‘돌아올 수 없는 문’(Door of No Return)이라고 명명되었다. 이러한 역사성으로 인하여 조지 부시, 클린턴, 오바마 등 미국 대통령과 넬슨 만델라가 방문하기도 했다. 육지로 돌아갈 일이 걱정될 즈음 거친 파도를 헤치고 고마운 배가 들어온다.
8일차 (다카르 시내 탐방 및 휴식)
지독한 매연
느지막이 숙소를 나선다. 오전 10시. 태양은 이미 뜨겁다. 그래도 연중 바닷바람이 식혀주는 다카르 날씨는 그나마 낫다. 내륙으로 들어갈수록 더위가 맹위를 떨쳐 한 여름에는 40도 넘는 날씨가 몇 달간 계속된다고 한다. 더위만큼 힘들게 하는 것이 하나 더 있다. 지독한 매연이다. 기관지가 건강한 편인 나도 목에서 계속 가래가 올라온다. 환경, 위생, 이런 것들을 생각하기에는 이 나라는 아직 여유가 없다.
아프리카 르네상스 기념비
숙소와 도심 사이에 아프리카 르네상스 기념비(Monument de la Renaissance Africanne, African Renaissance Monument)가 우뚝 서있다. 대서양을 내려다보는 목 좋은 언덕 위에 세워진 높이 49m의 기념비는 아프리카를 통틀어 가장 큰 기념탑이다. 유럽 식민 통치의 압제를 벗어나 아프리카의 새 탄생을 염원하기 위하여 2010년 건립되었다. 아프리카에 대한 열등한 이미지를 벗어나고픈 의지를 담은 것이지만 북한의 기술이 동원된 것이어서 여전히 외부 의존이라는 비난도 있기는 하다. 아프리카의 자존심이라는 취지와는 달리 소비에트 스탈린식 거대 조형물의 모습이 왠지 딱 어울리지는 않는다.
서부 대서양 아프리카의 중심
시내 중심 독립 광장(Place de L’Independance)까지 가본다. 헌칠한 선남선녀들이 활보하는 도심은 서부 대서양 아프리카의 중심으로서 손색이 없다. 다만 한때는 우아했을 멋진 콜로니얼 건물들이 관리가 잘되지 않아서 방치되어 있는 모습이 안쓰럽기는 하다. UN 평화유지군 참여 등 세네갈의 활발한 세계무대 활동에 힘입어 다카르에는 UNHCR(유엔난민기구) 등 여러 국제기구 및 NGO의 지역 본부가 있다. 세네갈에는 또 프랑스, 벨기에 등 프랑스 언어권(Francophone) 국가 출신 유럽인들의 커뮤니티도 꽤 크게 형성되어 있고, 프랑스는 공군 기지와 해군 기지를 운영할 정도이다. 내가 머문 숙소의 주인 부부도 2만 명 규모의 재 세네갈 프랑스계이고, 식당이나 휴게실 등 숙소의 공용 공간은 언제나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유럽인들로 북적인다.
메마른 가슴을 채운 여행
내일 머나먼 귀국 길을 앞둔 터라 일찌감치 숙소로 돌아와 휴식의 시간을 갖는다. 화려한 것은 없었지만 저절로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하는 서부 아프리카 여행이 끝났다. 참혹한 더위와 사투를 벌였던 여행이었지만 나의 메마른 가슴, 각박한 마음은 인간에 대한 사랑, 인류에 대한 존경으로 가득 채워진 여행이었다. 세네갈인들의 선한 눈빛을 잊을 수 없다. 이들의 예의바름과 우아함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9일차 (다카르 →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 중국 광저우 → 서울 도착)
아득히 먼 귀국길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아득히 먼 길을 앞두고 마음이 비장해진다. 먼저 다카르에서 아디스아바바까지 3823마일, 9시간. 아디스아바바에서 중국 광저우까지 5000마일, 11시간. 그리고 마지막으로 광저우에서 서울까지 1200 마일, 3시간 30분을 가야 한다. 아프리카 대륙을 서에서 동으로 횡단하는 데에만 9시간 넘게 걸리는 아득히 먼 길이다. 세계 육지 면적의 20%가 넘고, 세계 인구의 15%인 11억 명이 사는 거대한 대륙이다.
덤으로 들른 말리
다카르 공항 출국장에서 이민국 관리가 출국 도장을 찍어 주면서 돈 남은 것 있으면 좀 달라고 한다. 놀라울 것도 없다. 떠나는 그 순간까지 아프리카의 적나라한 모습을 본다. 세네갈 공항을 이륙한 에티오피아 항공기는 두 시간 후 중간 기착지 바마코(Bamako)에 도착한다. 인구 180만, 아프리카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도시 중 하나로서 한때 면화, 금, 소금 교역으로 융성했던 말리(Mali)의 수도이다. 북쪽으로부터의 침입자들로 인하여 왕국이 멸망한 후, 프랑스 통치를 받았던 말리는 1960년 독립 이후 여러 다른 아프리카 국가처럼 사회주의를 표방하기도 했다.
중국의 아프리카 진출
여기 또한 중부 아프리카의 교차로답게 내리고 타는 사람들의 생김새가 다양하다. 중국인 승객들도 여럿 탑승한다. 아프리카 국가들의 인프라를 건설해주고 투자를 아끼지 않는 중국의 아프리카 진출 정책의 현주소이다. 내 뒷좌석에 앉은 중국 젊은이 셋은 세네갈 철도 공사에 투입된 기술자들이다. 한때 식민 통치자였던 프랑스는 자신의 문제를 돌보느라 과거 식민지를 돌볼 겨를이 없는 틈을 중국이 파고든 것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수많은 항공기들이 도착하고 떠나는 한 밤의 아디스아바바 공항은 북새통이다.
중국 광저우 행 에티오피아 항공기는 자정 넘은 시각 아디스아바바 공항을 이룩한다. 항공기는 완전히 만석이다. 중국인과 아프리카인들이 각각 절반쯤 되는 것 같다. 승무원에게 물어 보니 이 노선은 늘 이렇게 만석이라고 한다. 매일 중국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등으로 대형기가 떠나지만 늘 승객들로 붐빈다니 중국과 아프리카의 교류가 어떤 수준인지 알 수 있다. 600년 전 명나라 정화(鄭和)가 남해 원정을 통하여 이루고자 했던 꿈이 마침내 이루어지는 현장을 보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사람들
항공기는 홍해, 인도양을 건너 인도를 횡단하니 곧 중국 땅이다. 5000마일, 11시간을 날아 광저우에 오후 3시 도착했다. 기나긴 공항 대기 시간을 견디어 자정 지난 시각 서울행 항공기에 오른다. 지나온 길들이 아득하고 아련하다. 서부 아프리카는 미지의 땅이다. 그곳에 사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수없이 만났다. 진짜 아프리카를 보았다. 그들의 아픈 역사와 현실에 공감하며 마음속으로 여러 번 울었다. 그들이 좀 더 영악해져서 역사의 피해자, 희생자가 아니라 다음 세상에서는 역사의 지배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너무 멀어서 다시는 갈 수 없을 것 같다. 굿바이 세네갈, 굿바이 아프리카. <다음 회부터는 뉴질랜드 남섬 여행기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