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이한성 동국대 교수) 겸재의 집 인곡정사가 자리했던 자수궁터는 국가기관을 지키는 이들과 가족들의 보금자리 아파트로 바뀐 지 오래 되었는데 다행히도 그 앞길이 겸재길로 이름 붙여지고, 자수궁터와 겸재에 대한 안내판도 붙어 있기에 아쉽기는 하지만 마음을 놓고 자리를 뜬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어서 인연 따라 왔다가 인연 따라 가는 일은 어찌 할 수가 없다. 등등한 기세로 보아 영원할 것 같았던 옥류동 주인들도 인연 다하는 날 참으로 허망하게 그 땅을 내주었고, 기세 좋게 그곳을 얻은 사람들도 또 그렇게 인연 다하는 날 그곳을 떠나야 했다. 이곳 서촌 길은 그런 이치를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발길을 돌려 통인시장 쪽 세종마루 정자 방향으로 향한다. 베이커리 앞에 오늘도 사람들이 줄을 섰다. 얼마나 맛있는 빵을 만들기에 저렇게 사람 발길을 모으는 것일까? 정자 앞에 이르면 북서에서 동남으로 구불구불 흘러가는 옥류동천 물길 위를 복개한 길을 만난다. 자하문 터널 가는 자하문로에서 지금은 우리은행이 있는 옛 준수방 모퉁이에서 갈라지는 길이다. 도로 표지는 옥류동천길이다. 이제는 사람들과 차들이 다니는 길이 되었다. 심지어는 수성동으로 데려다주는 마을버스도 다니는 길이 되었으니 이른바 한길(大路)인 셈이다. 사실은 옥류동 물길, 수성동(인왕동) 물길, 누각동 물길이 합쳐 내려 오는 물길이다.
능선 있으면 물길 있고, 사람 산 흔적 있고
이 세 물길은 대부분의 옛 지도에도 잘 그려져 있지 않은데 다행히 리움이 소장한 한양도성도(漢陽都城圖)나 선교사 게일(Gale)이 만든 것으로 알려진 한성부지도에는 잘 나뉘어져 있다. 전호(前號)에서 이야기했듯이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을 오역하면 ‘산은 스스로 물길을 구분 짓는 것’인데 인왕산 동남쪽 마을 서촌은 예부터 사람들의 삶이 산등성이와 그것이 갈라놓은 물길을 따라 이루어졌다. 자하동, 백운동, 청풍계, 세심대 아랫마을, 옥류동, 수성동, 누각골, 사직동 이 마을들이 능선이 갈라놓은 물길 따라 형성되었음은 발길 따라 다녀 보면 곧 알게 된다. 그 말은 능선이 있으면 그 너머에 물길이 있고 사람들이 산 흔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수성동 물길을 그리면서 자연스럽게 구부러진 길을 따라 올라간다.
잠시 후 La paisible이라는 상호가 붙은 아트샵을 만나는데 그곳에서 물길은 좌로 한 줄기 갈라진 곳에서 흘러오는 물길이 합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눈에 보이는 것은 포장된 구불구불 도로이지만 좌우로 고도가 높은 지형이 보이고 그 사이에 구불구불 낮게 이어진 길을 보면 이제 서촌 탐방 중견이 된 우리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수준은 되었다.
이 좌측 물길이 누각동 물길이다. 여기서 잠시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리면 아담한 양옥집이 보인다. 남정 박노수 화백이 40여 년 간 살면서 작업했던 집이다. 지금은 종로구에 인도되어 ‘구립 박노수미술관’으로 운영하고 있는 서촌 명소 중 하나이다. 미술관은 철저히 관람 인원을 통제해 가면서 깔끔하게 운영하고 있다. 정원도 아주 예쁘게 가꾸어져 있다. 정원석도 옛 석물(石物)로 분위기를 차분하게 유지하는데, 그 정원석들을 곰곰 살피면 마음이 아프다. 평평한 정원석들은 무덤 앞 제물(祭物)을 올리는 상석(床石)이고, 북 같이 생긴 명품 돌은 그 상석을 받치는 고석(鼓石)이었으며, 석등도 무덤 앞 혼령들 밤길을 밝혀주는 등불인데, 아 언제 어느 혼령의 유택(幽宅: 무덤)이 수난을 당한 것일까?
다니다보면 살만한 집 정원을 꾸민 석물들을 만난다. 대개는 문인석, 상석, 고석, 장명등, 망주석, 부도(浮屠), 석탑 이런 것들인데 하나같이 무덤 앞에 세우거나 설치한 석물들이다. 제사상인 상석 뒤에 있는 집, 문인석이 지키는 집은 유택(幽宅: 무덤)뿐이다. 부도는 고승들의 유골함이고, 석탑은 석가모니의 유골(사리)을 모시거나 고승의 유골을 봉안한 유골함이니 유골을 보관하는 곳은 납골당밖에 없다. 삼국, 고려, 조선에는 이런 문화가 없었는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식 정원을 높이 보다보니 생긴 난센스가 아닐까?
사실 이 미술관 건물엔 사연이 있다. 앞서 소개한 친일파 윤덕영이 1938년 지어 딸과 사위 부부에게 준 집이다. 배화여고 교정 방향에서 찍은 옛 사진이 남아 있다. 좌측 아래 흰 집이 지금의 박노수 미술관이고, 그 뒤 언덕 위 대저택은 윤덕영의 벽수산장이다. 후에 언커크 건물로 쓰이다가 화재로 무용지물이 된 뒤 철거됐다. 연전 지금의 미술관 근처로 추정되는 위치에서 찍은 윤덕영의 사진이 발굴되었다. 바위가 있는 암벽 아래 비스듬히 빗겨 있는 작은 흙길 위에서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뒤 암벽에는 벽수산장(碧樹山莊), 송석원(松石園)이라는 각자가 보인다.
나라 팔아먹은 윤덕영 뒤로 보이는 두 글씨
벽수산장이라는 글자는 언덕 위에 아방궁을 지은 윤덕영의 재종숙 윤용구가 새긴 글씨이니 우리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지만, 송석원(松石園)은 사뭇 다르다. 송석원 시사의 천수경 시절 추사 김정희가 쓴 글씨이다. 이 송석원이라고 쓴 글씨는 ‘서울 600년’이라는 주요한 서울의 역사 자료를 촬영한 바 있는 김영상 씨가 찍은 자료가 남아 있어 선명한 글씨를 확인할 수 있다. 김영상 씨는 서울시 지명위원회 임시직 위원을 한 분이지만 서울의 지명을 짓고 중요한 유적을 촬영한 우리 시대의 한 증인이다.
그 사진을 살펴보면 ‘松石園 丁丑淸和月小蓬萊書’란 글씨를 확인할 수 있다.
송석원시사의 천수경은 당대의 명필 추사에게 글씨를 써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이때 약수터 우혜천(又惠泉)과 함께 쓴 글씨가 바로 위의 松石園이다. 정축년은 1817년(순조 17년) 추사 나이 32세 때이고 淸和(청화)란 다산의 자제 정학유 선생의 농가월령가 4월조에 보듯이 음력 4월이다.
‘사월이라 孟夏 되니 立夏 小滿 절기로다
비온 끝에 볕이 나니 일기도 淸和하다’.
송석원은 미술관 주변의 평지이거나 아래쪽
小蓬萊(소봉래)는 무슨 뜻일까? 추사는 많은 아호를 사용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소봉래였다. 화암사가 있는 예산 고향집 뒷산(烏石山)을 추사는 소봉래라 했는데 옛사람들이 자신의 고향이나 거처 근처의 자연산천의 지명을 아호로 사용했듯이 추사도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아쉽게도 이 松石園이라는 글씨를 찾을 수가 없다. 연구자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지금의 박노수 미술관 내 흙에 묻혀 있는 암벽 안에 있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그렇다면 천수경의 송석원도 지금 미술관 주변의 평지이거나 아니면 능선의 낮은 아래쪽이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송석원 시사를 소개할 때 이인문의 ‘송석원시사 아회도’를 이야기한 바 있는데 그 그림에도 바위벽에는 松石園이라 쓰고 바위벽 아래에는 시사(詩社) 멤버들이 모여 아마도 시를 주고받는 모습을 그려져 있다.
앞쪽 계곡수는 수성동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계류(溪流)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 그림에 써 넣은 松石園이라는 글씨는 세로로 쓴 글씨로, 시대로 보나 가로 세로의 차이로 보나 추사의 글씨와는 관련이 없다. 아마도 옛날, 기록을 위한 산수화에서 지도의 기법을 활용하여 그림 속에 지형지물의 이름을 적어 넣곤 하는데 이 글씨도 실제 각자는 아니고 송석원의 위치 표시를 위해 적어 넣은 글씨일 것이다. 이 그림에 의한다면 능선이 끝나는 곳에 가까이 있었다고 보인다. 그림 속 작은 집들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이제 박노수 미술관을 떠나 수성동 길을 버리고 길 밑으로는 누각동 계류(溪流)가 흐를 누상동 쪽 골목으로 들어간다. 지명사전에 따르면,
‘동국여지비고에 누각동은 인왕산 아래에 있고 연산군 때에 누각을 지었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연산군 때에는 이 지역에 누각을 세운 사실이 확인되지 않아 잘못 전해진 것으로 보이며, 광해군 때 세우다 완성되지 못한 채 폐기된 仁慶宮(인경궁)의 누각이 있어서 생긴 이름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래서 이 누각의 윗동네를 누상동(樓上洞), 아래를 누하동이라 했다는 것이다.
이곳은 그야말로 중인(中人)과 서인(庶人)들이 많이 살던 사람냄새 나는 곳이었다. 이 누상동 길을 걸으면 우측으로 수성동과 물길을 가르는 가파른 능선이 느껴진다. 능선 위는 이미 일반 주택과 빌라가 가득 들어서 있다. 이 번에는 어렵겠지만 차근차근 시간을 가지고 한 번은 물길로, 또 한 번은 능선길로 해서 서촌 구석구석을 다녀보기를 권해본다. 그렇게 하면 비로소 남의 글이나 자료 따라 가던 서촌 답사길을 내 길로 가볼 수 있게 된다.
잠시 물길 따라 골목길 끝에 이르면 배화여고 높은 축대 담이 길을 막는다. 그 축대 아래에는 이미 퇴락하여 마실 수 없는 약수가 있다. 약수 위 바위 벽 위에는 중후한 글씨로 쓴 각자 白虎亭(백호정)이 기다리고 있다. 이제는 활을 쏘는 이도, 약수를 마시러 오는 사람도 없이 백호정 터는 너무나도 쓸쓸히 그 시간에 머물러 있다. 안내판이 서 있는데 이런 내용을 담고 있다.
‘백호정’ 글씨에서 느껴지는 무인의 풍모
‘백호정은 인왕산 기슭에 있었던 무인의 궁술 연습장으로 유명했던 조선 전기의 오사정(五射亭)의 한 곳으로 북촌 제일의 활터였으며, 바위의 백호정이란 각자는 숙종 때 명필가 엄한평(1685~ 1759)의 글씨로 추정된다’고 쓰여 있다.
오사정은 졸고 황학정 소개 글에서 언급했듯이 인왕과 북악 주변에 자리 잡았던 5개의 활터(五射亭: △옥인동 登龍亭 △누상동 白虎亭 또는 風嘯亭 △사직동 大松亭 또는 太極亭 △삼청동 雲龍亭 △이곳 登科亭) 중 하나였다.
글씨는 해서체로 반듯하고 강직하여 무골(武骨)의 풍모가 느껴진다. 아쉬운 것은 사정(射亭)의 모습은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다는 점이다.
약수에 대해서는 ‘인왕산 호랑이가 많던 시절에, 병이 든 한 호랑이가 이 물을 마시고 병이 나았다’는 이야기가 쓰여 있다. 예전에는 전국에서 폐질환자가 몰려오던 유명한 약수였다고도 한다.
이제 아쉬움을 남기고 언덕길을 찾아 오른다. 길은 용운사(龍雲寺) 안내판이 붙어 있는 길을 찾아 층계길로 오른다. 층계를 오르면 천하골든빌라라는 이름이 붙은 제법 규모 있는 빌라를 만나고 좌측 산이 보이면서 나무 계단 길이 나타난다. 인왕산을 다니는 사람들도 이곳과 가까운 이들 말고는 잘 다니지 않는 길이다. 나무 층계를 오르다 보면 좌로는 배화여고의 경계를 막은 담장과 철망이 보인다. 나무층계 중간쯤 오르면 잠시 숨고를 공간이 있는데 그곳 살짝 길에서 비낀 암벽에는 一洗巖(일세암)이라 쓴 또 하나의 각자를 만난다.
세속의 티끌먼지 씻어내고프다는 ‘일세암’
누가 언제 썼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짐작 가는 시 한 편이 있다.
중국 송나라 때 胡憲(호헌)이라는 이가 있었다. 주자(朱子)의 스승뻘 되는 사람인데 산 속에 은거하였다. 주자가 와서 산을 내려가 인간 세상으로 가실 것을 권했다. 그때 호헌이 주자에게 시(詩)로 답한다.
幽人偏愛靑山好(유인편애청산호)
爲是靑山靑不老(위시청산청불로)
山中出雲雨太虛(산중출운우태허)
一洗塵埃山更好(일세진애산갱호)
은둔한 이 유난히 푸른 산 좋아함은
청산은 푸른 대로 늙지 않기 때문일세
산중에 구름 일어 하늘 가득 비 내리니
시원하게 티끌 씻어 산은 다시 곱구려
이곳 인왕산 누각동에 살던 누군가는 이곳에 은거하여 시원하게 티끌먼지 씻어내고(一洗塵埃) 싶었나 보다.
유연하게 날아오르는 택견의 수련장
이어서 언덕길을 계속 오른다. 배화여고가 없었던 시절에는 배화여고 안쪽에 자리 잡고 있는 필운대에서 인왕산 쪽으로 나오던 육각현(六角峴, 육강현)과 이어지는 길이었다. 골짜기에는 이제는 폐쇄된 약수가 잊힌 육각현의 오늘을 말하고 있다. 잠시 뒤 평탄한 능선길 마루금에 닿는다. 능선길 마루답지 않게 제법 넓은 평탄지가 자리 잡고 있다. 뒤쪽은 활터 황학정이 보인다.
운동기구도 보이고 잘 정리된 안내판도 보인다. 이곳이 바로 우리 고유의 무술 택견을 연마하던 수련터였다는 것이다. 안내판에는 택견 하는 사진도 보이고 “외유내강의 우리 무예”라는 설명도 보인다. 명맥도 잊혀 가던 택견을 되살려 제자들을 키운 송덕기 선생도 소개되어 있고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등재된 최초의 무예라는 설명도 있다. 어느 때던가 시연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마치 무용하듯 하더니 순식간에 날아오르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곳 수련장 남쪽으로는 큼직한 바위들이 자리 잡고 있다. 조선의 풍류객들이 필운대에서 살구꽃 구경이나 단풍 구경(弼雲賞花, 弼雲楓光)을 하고 육각현을 올라 다다르던 바위들이다. 안내판에는 감투바위라고 써 놓았다. 조선시대 기록으로는 모암(帽巖)이다. 리움 소장 한양도성도에는 누각동에서 이곳으로 오르는 길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고 帽巖(모암)이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모암과 주변 바위에는 성혈(星穴)이 눈에 띈다. 누각동이라는 이름도 생기기 전 오랜 옛날부터 아랫마을 사람들은 이곳에 올라 하늘의 별자리를 기록하여 정보를 후세에 알리고 한편으로는 소원을 빌었을 것이다.
황학정 팔경 중 하나인 모자바위의 석양
황학정에서 어떤 이는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 여덟 가지를 골라 황학정 팔경이라 부르고 바위에 새겼다. 그 중 하나가 모자바위의 석양빛이다.
1. 백악청운(白岳晴雲); 백악(북악)산 맑은 구름
2. 자각추월(紫閣秋月); 자하문(창의문) 누각 위의 가을 달
3. 모암석조(帽巖夕照); 모자바위에 석양 빛
4. 방산조휘(榜山朝暉); 인왕산 비추는 아침 햇살
5. 사단노송(社壇老松); 사직단 노송
6. 어구수양(御溝垂楊); 경복궁 배수로 수양버들
7. 금교수성(禁橋水聲); 금천교 물소리
8. 운대풍광(雲臺楓光); 필운대 고운 단풍 빛
또 모암에서 있었던 일이 한두 개가 아니었겠지만 뚜렷이 남은 기록은 시 모임(詩社)이었다. 아쉽게도 일본 세이카도 문고(靜嘉堂文庫)에서 소장하고 있는 모암시회도(帽巖詩會圖)가 그것이다. 이미 송석원 시사를 그린 김홍도와 이인문을 소개할 때 이 그림에 제시(題詩)를 썼던 미산 마성린(眉山 馬聖麟)을 소개했는데 그 마성린이 젊은 시절 모암에서 시회(시회)를 열고 참여 멤버들이 그림과 글을 남겼다. 그림에는 “帽巖歌詠, 庚午孟夏, 眉山馬仁伯寫”라고 적혀 있어 이 그림이 1750년 4월에 마성린이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그의 나이 24살 때이니 얼마나 활기에 찼겠는가? 그들은 도성의 서쪽에서는 최고로 멋진 곳이 모암(城西勝地帽巖最)이라 하면서 지난 해 우리들 이곳에서 놀았지(昔年吾輩此徜徉)라는 기록을 남겼다.
누각당과 모암의 멋이 다시 왔으면…
그림에는 5명의 젊은이들이 모자바위(감투바위)에 모여 있다. 5명의 젊은이들은 바로 최윤창, 마성린, 김순간, 이효원, 이휘선이다. 세 사람이 바위 위에 앉아 있는데 그 중 한 사람은 종이에 붓을 갖다 대고 있고 나머지 두 사람은 그것을 구경하고 있다. 또 바위 아래에는 두 사람이 마주보고 서서 담소를 나누는 듯하다. 이 모임에 참여했던 최윤창은 이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나는 젊었을 때 매년 봄과 여름 사이에 책을 읽다가 싫증이 나면 초연히 밖으로 나가 이효원, 김순간, 마성린, 이휘선과 번번이 서암의 모암에 올랐다. 소나무에 기대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냇가에 가서 시를 짓기도 하며 높은 곳에 기대어 퉁소를 불기도 하고, 박자에 맞춰 춤추기도 하였으니 그 거리낌 없이 노는 모습이 마치 천마가 안장이 풀린 것처럼 구애됨이 없었다. 하루는 마성린이 ‘오늘의 유람은 정말로 즐거워 할만하다. 이곳의 뛰어난 경치와 우리들이 돌아다닌 발자취를 어찌 그림으로 그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고는 마침내 붓으로 그려 작은 폭의 그림 하나를 그렸다. 서로 이를 함께 완상하다가 파하였다.”(어떤 이의 번역을 빌려 옴)
“余於少時, 每當春夏之交, 讀書而意倦, 則超然而出, 與李百行, 金和中, 馬仁伯, 李輝先, 輒登西巖之帽巖, 或倚松而歌, 或臨溪而賦, 或凭高而吹簫, 或擊節而起舞, 其放逸之態, 如天馬之脫鞅而無拘束也. 一日仁伯曰: ‘今日之遊, 信可樂也. 此地勝槩, 吾人浪跡, 盍可以圖爲乎.’ 遂把筆點綴, 而成一小幅圖, 相與之戲玩而罷矣.”
모암은 이렇게 승지(勝地)로 자리매김했었건만 우리 시대에 와서는 육각현과 함께 거의 잊혀졌다. 누각동과 모암이 다시 우리 곁으로 왔으면 좋겠다. 이제 서촌의 능선과 골짜기를 모두 살피며 갈 수 있는 길 인왕산 그늘 길로 출발이다.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