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한국 디자인에 대해 날카롭게 질문하며 담론의 장을 형성해온 디자인 평론가 최범. 이 책은 최범이 한국인으로서 처음 쓴 서양 디자인사다. 지은이는 디자인사를 다룬 기출간 도서 대부분이 서양인이나 일본인이 쓴 책의 번역본임을 지적한다. 또한 그 내용은 모두 서양 디자인사지만 ‘디자인사’라는 이름을 달고 있음을 강조한다.
이 책은 바로 여기서 논의를 출발한다. 저자는 “우리가 서양의 디자인사를 절대적 보편으로 받아들였기에 이제 서양 디자인사를 타자화하고 상대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서양 디자인사가 한국 디자인사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지만, 서로의 역사와 현실이 많이 다르기에 더 이상 서양 디자인사만으로 우리의 것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 책은 역사적 사건을 나열하기보다는 서양 디자인사의 전반적인 흐름과 특성을 개념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리고 드로잉과 뉴미디어를 기반으로 일러스트레이션과 회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권민호가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을 했다. 그는 각 장을 대표하는 인물과 작업 그리고 주제를 해석해 역사적 맥락 위에 배치한다. 장에서 대비를 이루는 내용은 과감하게 전면에 드러냈고 펼친 지면의 특성을 활용해 그리기도 했다. 지은이 최범은 그의 일러스트레이션을 가리켜 “건축적 역사화”라며 “역사적 순간을 포착하는 사진과 시간의 흐름을 담고 있는 영화의 특성을 하나의 화면에 엮어내는 그의 작업은 역사의 중층적 의미를 잘 드러내는 도큐먼트”라고 표했다.
최범 지음, 권민호 그림 / 1만 5000원 / 안그라픽스 펴냄 / 21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