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도기천 기자) 지난해 2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구속과 그룹의 컨트롤타워인 미래전략실 해체로 창사 이래 최대 위기를 맞았던 삼성이 1년 반이 지난 현재 변신을 거듭하고 있어 주목된다. 미전실 해체 후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길을 걸었던 계열사들은 일각의 우려와 달리 홀로서기에 성공했다는 평을 받고 있으며, 회사가 거둔 열매를 주주들과 나누겠다는 약속 또한 점차 현실이 되고 있다. 10년 넘게 끌어온 삼성반도체 피해자들과의 분쟁을 마무리 짓고, 일자리창출을 약속하는 등 상생에 나선 모습도 인상적이다. 이 부회장이 생각하는 삼성의 앞날은 어떤 그림일까.
“미래전략실을 해체한다. 계열사 사장단 회의를 폐지한다. 대관(對官) 업무 조직을 없앤다”
지난해 2월 28일 삼성이 내놓은 쇄신안은 재계에 큰 충격을 안겼다. 삼성 창업주인 고(故) 이병철 선대회장이 1959년부터 매주 수요일 실시해온 사장단 회의가 58년 만에 막을 내렸고, 이 선대회장의 비서실에서 출발한 미전실 또한 60여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3대 계열사인 삼성전자와 삼성생명, 삼성물산을 중심축으로 유관 계열사들이 함께 주요 사안을 조정하는 방식의 자율경영이 이뤄져 왔다.
이재용 부회장은 병상에 있는 부친 이건희 회장을 대신해 그룹을 이끌어 왔지만, 이때부터는 위상에 묘한 변화가 생겼다. 지주회사가 없던 삼성 입장에서 미전실의 해체는 연결고리의 상실을 의미한다. 계열사들이 각자 살길을 찾아 나서면서 그에게 ‘삼성그룹의 총수’라는 말은 어색해보이기까지 했다.
변화 ① 계열사별 각개전투 성공적
이렇게 시작된 변화는 여러 계열사들이 고르게 성장하는 첫단추가 됐다. 그룹 전체 이익에서 삼성전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여전히 압도적으로 높긴 하지만 1년 전에 비해 삼성전자에 대한 의존도가 조금씩 낮아지고 있다.
기업 경영성과 평가사이트 CEO스코어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1∼6월) 실적을 발표한 삼성그룹 계열사 12곳의 영업이익 총합계는 32조6204억원으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은 30조5112억원, 삼성전자를 제외한 나머지 계열사들이 벌어들인 영업이익은 2조192억원이었다.
이를 비중으로 환산하면 올 상반기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이 그룹 전체 영업이익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93.5%, 나머지 계열사들의 영업이익 비중은 6.5%다.
지난해 같은 기간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은 23조9649억원으로, 그룹 전체 영업이익에서의 비중이 94.8%였다. 나머지 계열사들의 영업이익(1조3225억원)의 비중은 5.2%였다.
결과적으로 올해 상반기 삼성전자의 영업이익 비중은 1.3%포인트 낮아졌고, 나머지 계열사들의 비중은 그만큼 올라간 셈이다.
더구나 올해 상반기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이 작년 같은 기간보다 크게 증가(27.3%) 했음에도 삼성전자 쏠림 현상이 완화된 것은 그만큼 다른 계열사들의 실적이 호전됐음을 의미한다.
실례로 삼성SDI의 경우 작년 상반기 때는 619억원 적자를 냈지만, 올해 상반기에는 2248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렸다. 삼성전기도 올해 상반기 영업이익이 3608억원으로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3.8배나 많아졌다. 호텔신라도 올 상반기(1137억원)에 지난해 보다 4배 정도 영업이익이 커졌다.
변화 ② ‘성장 열매’ 주주와 함께
하지만 과거 삼성이 원했던 그림은 이처럼 계열사별로 ‘각개전투’하는 게 아니었다.
10여년 전 삼성은 삼성전자 중심의 전자 계열사와 삼성생명 중심의 금융 계열사, 신수종 사업인 바이오 분야 등 3대 축을 기반으로 하는 수직계열화를 설계했다.
이를 위해 정리할 곳은 정리하고 키울 곳은 키우는 과감한 사업재편이 수년 간 진행돼 왔다. 종착점은 전자, 금융, 건설(또는 바이오) 분야에 각각 지주사를 세워 사실상 그룹을 분할하는 것. 이 과정에서 이재용, 이부진(호텔신라 대표), 이서현(삼성물산 패션부문 사장) 3남매에 대한 경영승계까지 완성할 심산이었다.
삼성은 크게 두 축에서 이 작업을 진행했다.
우선 2016년에 삼성생명을 금융지주회사로 전환하려 했다. 삼성증권, 삼성카드, 삼성화재, 삼성자산운용 등 여러 금융계열사들을 삼성생명을 중심으로 한데 묶겠다는 것. 하지만 금산분리(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의 분리) 규제로 삼성생명의 비금융계열사 지분율을 5% 아래로 줄여야 하는 점이 부담으로 작용했다. 금융위원회와 협의를 벌였지만 끝내 무산됐다.
또 다른 한 축은 삼성전자를 분할해 ICT계열사들의 지주사로 만들겠다는 구상이었다. 삼성전자를 중심으로 삼성디스플레이, 삼성SDI, 삼성전기, 삼성SDS 등 전자계열사들이 시너지를 내겠다는 그림이었지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여파로 미전실이 해체되면서 백지화 됐다.
삼성전자는 지금은 고유의 사업에만 열중하고 있다. 스마트폰과 반도체, 디스플레이, TV와 가전 등 주력 4축을 기반으로 일부 사업은 매각하고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분야는 확장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반도체 부문이 핵심이다. 지난해 3분기 꿈의 영업이익률인 50%를 달성한 반도체 분야가 올해에도 전체 실적을 견인하고 있다.
이처럼 계열사들이 각자 홀로서기를 하고 있는 가운데, 삼성이 공언했던 주주친화 정책도 조금씩 피부에 와닿고 있다.
삼성전자는 작년 10월 이사회에서 향후 3년 동안 주주들에게 돌아가는 현금배당 규모를 기존보다 2배 이상 확대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이후 첫 리트머스 시험지가 된 올해 중간배당에서 지난해 중간배당액(9653억원) 보다 두 배 이상 증가한 2조4046억원을 지급하겠다고 밝혔다. 이런 흐름이라면 올해 전체 10조원 규모의 사상 최대 배당이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CNB에 “주주이익에 민감한 외국인 투자자들 입장에서 배당 확대는 상당한 매력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며 “한동안 주식 매도세를 보였던 외국인과 기관 투자가들이 다시 돌아서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변화 ③ 노동자·시민…‘사람중심’ 열공 중
삼성전자가 10년 넘게 끌어온 반도체 피해자들과의 분쟁을 최근에 전격적으로 마무리 지은 점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반도체 피해자 문제는 2007년 3월 공장 근로자 황유미 씨가 급성 백혈병으로 숨지면서 불거졌다. 이듬해 ‘반올림’(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이 출범했고 사과와 보상, 예방 대책을 놓고 갈등을 빚어왔다.
삼성은 최근 조정위원회의 중재안을 내용에 관계없이 무조건 수용키로 결정했으며, 피해자 측도 수용 의사를 밝히면서 10년 이상 끌어온 논란이 마침표를 찍게 됐다.
여기에는 지난 2월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난 이재용 부회장의 의중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부회장은 지난 6일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의 ‘현장 소통 간담회’에서도 “젊은이들이 꿈을 가질 수 있고 국민들이 자부심을 갖는 회사가 될 수 있도록 기업 본분을 잊지 않고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이틀 뒤(8일) 삼성은 청년 일자리·협력사 상생방안 등을 포함한 180조원 규모의 투자계획을 내놨다.
이런 흐름들을 이어보면 문재인 정부가 표방하고 있는 ‘사람중심 경제’에 적극 호응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정부는 대기업 중심의 경제구조를 중소기업 중심으로 전환해 성장의 과실을 골고루 나누자는데 경제정책의 무게를 두고 있다. 이를 위해 양질의 일자리 창출, 최저임금 보장, 본사와 가맹점 간 상생, 골목상권 보호, 재벌지배구조 개편 등을 국정운영의 우선 과제로 추진 중이다.
기로에 선 이 부회장 선택은?
하지만 넘어야할 산은 여전히 높다.
삼성전자의 그룹 내 영업이익 비중이 여전히 90%를 넘고 있고, 그 중에서도 반도체 사업이 속한 DS(디바이스·솔루션) 부문의 영업이익 의존도가 절대적으로 큰 상황은 사업다변화 측면에서 반드시 극복해야할 과제다. 올해 상반기 삼성전자 전체 이익에서 DS의 영업이익(23조4500억원) 비중은 76.9%로 지난해 상반기 비중(72.1%)보다 커졌다.
더구나 반도체 사업의 슈퍼 사이클(장기 호황)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예측하기 힘든 상황이다. ‘반도체 굴기(屈起)’를 선언한 중국 정부는 2025년까지 200조원을 투입해 반도체 자급률을 70% 이상으로 끌어올릴 계획이며, 퀄컴과 브로드컴, SK하이닉스 등 글로벌 기업들의 추격세도 예사롭지 않다. 이에 삼성은 인공지능(AI), 전장(전자장비), 바이오 등을 내세워 미래에 대비하고 있다.
노사협력 등 가치경영의 수준을 높이는 문제도 풀어야할 숙제다. 삼성은 지난 4월 80년간 지속된 ‘무노조 경영’ 역사를 마감하고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업체 직원 8000여명을 직접 고용했으며 이들의 노조 활동 또한 보장키로 했다. 이를 시작으로 향후 봇물처럼 터져 나올 노사 문제를 공유경제라는 틀 안에서 어떻게 녹여낼 것인가에 재계와 노동계는 물론 시민사회가 주목하고 있다.
지배구조 측면에서는 지주회사 체제로의 전환이라는 장기 과제가 남아있다.
지주회사는 그룹 전체의 모(母)회사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곳만 들여다보면 계열회사 간 출자 및 지배구조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과거 정부 때부터 경제민주화의 핵심과제로 이를 권장해왔다.
이에 부응해 LG와 SK, 현대중공업, 한진그룹 등은 최근 몇 년 새 지주사로 전환했으며, 롯데그룹은 작년 10월 42개 계열사를 편입한 롯데지주를 창립해 ‘뉴롯데’를 선언했다. 현대차그룹과 효성 등도 순환출자 논란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주사 전환을 진행 중이다.
삼성의 경우 작년에 미전실이 해체되면서 이에 관한 논의가 중단된 상태다. 삼성 내부에서는 지주사를 다시 추진하기보다는 우선 순환출자 고리를 끊는 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 삼성은 지난 2013년부터 순환출자 구조 해소를 시작해 80건에 달하던 순환출자 고리를 현재 4개까지 줄인 상태다. 삼성전기와 삼성화재, 삼성물산 간 얽혀있는 지분이 정리되면 순환출자 구조는 모두 해소된다.
삼성 계열사 출신의 한 대기업 임원은 CNB에 “쇄신안이 발표된 작년 2월 이후 현재까지 상황을 보면 삼성그룹은 사실상 분해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며 “이 변화가 계열사들의 자생력과 자율경영의 토대가 됐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컨트롤타워의 부재와 시너지의 약화라는 단점도 가져왔다.”고 평가했다.
결국 삼성 앞에 놓인 과제는 내부적으로 어떻게 시너지를 낼 것인가와, 밖으로는 국민들의 사회적 요구에 무엇으로 답하느냐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이 부회장은 어떤 답을 내놓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