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도기천 기자) 구한말 격변기를 소재로 한 tvN 인기주말극 ‘미스터 션샤인’에는 한국계 미국인 유진 초이(이병헌 분)와 사대부 영애 고애신(김태리 분)이 동시에 미국인 로건테일러를 암살하려는 장면이 나온다. 로건테일러가 한반도 정세와 관련된 미국의 고급정보를 일본에 팔아 넘겼기 때문이다.
이 장면은 당시 미국이 우리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짐작케 한다. 일본의 침략만큼은 막아야 했던 조선의 마지막 황제 고종(재위 1863∼1907)은 미국을 비롯한 러시아, 중국 등 강대국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미국 땅에 대한제국의 공사관을 열었다.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맺으면서 당시로서는 거액인 2만5000달러를 들여 워싱턴 DC의 한 건물을 매입한 뒤, 1889년부터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에게 외교권을 뺏길 때까지 주미공사관으로 사용했다.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워싱턴 정가를 상대로 활발한 자주외교를 펼쳤다.
당시 작은 조선이 초강대국의 본토에 공사관을 세웠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일본은 공사관의 존재가 국제사회에 알려지는 것을 막고자 미국의 일반인에게 1만 달러에 매각해 버렸다.
이후 건물주가 여러 차례 바뀌었다. 우리 정부와 현지 교민들이 수차례 매입을 시도했지만 건물의 가치를 알아 챈 주인이 가격을 높여 부르는 등 버티기에 들어가는 바람에 번번이 무산됐다. 실제 2003년 150만 달러였던 집값은 2010년도에 630만 달러까지 치솟았다.
그러다가 2102년 문화재청이 이 건물의 매입에 성공한다. 이후 6년간 실측조사와 보수복원 공사를 거쳐 지난 5월 22일 박물관 형태로 다시 문을 열었다. 따라서 오늘(15일)이 113년 만에 우리 곁에 돌아와 맞는 첫 광복절인 셈이다.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 ‘숨은 공신’
그런데 이 과정에 숨은 공신이 있다. 문화재청이 건물을 사들일 수 있었던 데는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정 부회장은 자금난에 허덕이던 대한제국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건물을 사들였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무려 6개월 동안 건물주를 설득했다. 우리 정부가 최종 매입자임을 눈치 채지 못하도록 하면서, 해외사업에서 축적한 경험과 해외 네트워크를 적극 활용했다.
마침내 협상이 타결되자 현대카드 측은 가계약 상태에서 정부와 집주인이 직접 계약 할 수 있도록 주선했으며, 이 과정에서 발생한 부동산 수수료 3억원도 부담했다.
한마디로 정부와 민간기업인, 문화유산 전문가가 합동으로 비밀작전(?)을 벌인 결과였다.
대한제국 공사관은 최초로 서양국가에 설치한 외교공간이자, 조선 후기 동북아시아의 구질서를 극복하고 외교적 지평을 열고자 했던 고종의 자주자강외교의 상징으로 평가받고 있다. 동시에 망국(亡國)의 한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이 같은 소중한 유물이 민간기업의 새로운 후원 방법으로 재조명 받게 된 것이다.
현대카드는 여기에 대해 일체의 공식입장을 내지 않았다. 사연이 입소문를 타고 전파됐으며, 마침내 공사관이 문을 열자 정 부회장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알리면서 공개됐다.
정 부회장은 페북에서 “정부의 매입예산이 책정됐다는 사실을 건물주와 중간 에이전트들이 바로 알고 가격을 올리면서 매입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상황이었다”며 “미국 네트워크가 있는 현대캐피탈이 사적으로 조용히 낮은 계약에 매입계약을 체결하고 다시 한국 문화재청에 넘김으로써 우리나라 품에 돌아오게 됐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사라진 태극기…‘애국 마케팅’ 진화
이처럼 소리소문 없이 나라사랑을 실천한 기업은 현대카드 만이 아니다.
국내 최초의 신약 활명수를 개발한 동화약품은 약품을 판매한 수익으로 독립운동을 도왔다. 회사를 상해임시정부의 연락망으로 활용했으며, 1909년에는 항일단체인 대동청년당을 결성을 주도했다.
유한양행은 독립 자금 마련을 위해 설립한 회사로 유명하다. 창업자인 유일한 박사는 일제강점기 때 미국 육군의 OSS요원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건강한 국민이 나라를 찾을 수 있다’는 신념으로 제약사를 설립했다. 이 밖에 LG그룹과 GS그룹의 창업주들도 중경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다고 전해진다.
순국선열의 뜻을 기리고자 하는 기업들의 노력은 이번 광복절에도 이어지고 있다.
편의점기업 GS리테일(GS25)은 8월 한 달간 ‘독립운동가 기억하기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판매 중인 도시락에 부착된 스티커에는 윤봉길, 유관순, 신채호 등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 100인의 이름과 활동이 적혀있다. 매출이 40%이상 오르는 등 반응이 좋다.
스타벅스코리아는 광복절 때마다 텀블러 등 기념품을 한정 제작하고 있으며, 신세계그룹의 스타필드 코엑스몰은 15일 저녁에 별마당 도서관에서 역사강연을 연다. 롯데아울렛 일부 점포는 광복절을 맞아 ‘태극기 비누 만들기’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과거와 달라진 점은 태극기 같은 상징물을 소재로 한 행사가 거의 사라졌다는 점이다. 기업들은 직접적으로 애국심을 자극하기 보다는 젊은 세대의 감성에 맞춘 ‘조용한 애국심’에 무게를 두고 있다.
보수단체의 태극기 집회로 인해 태극기에 대해 정치적 부담감이 생긴 점도 과거와 다른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실례로 롯데물산이 작년 광복절 때 롯데월드타워 외벽에 초대형 태극기를 내걸었지만 반응은 시원찮았다. 일제강점기 하시마섬에서 고초를 겪은 조선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군함도’ 또한 ‘국뽕(국가+마약)’ 논란에 휩싸이며 흥행에 실패했다.
재계 한 관계자는 CNB에 “요즘은 과도하게 애국심을 강조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며 “태극기를 나눠주는 식의 과거 방식에서 벗어나, 전시회나 역사특강 등 시민들이 스스로 찾아올 수 있는 쪽으로 마케팅의 트렌드가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