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김금영 기자) 사람들이 기억하는 송진화 작가의 작품은 강렬했다. 2009년 UNC갤러리, 2015년 아트사이드 갤러리에서 전시됐던 작품들은 상처투성이로 가득한 모양새였다.
가슴에 칼이 박혔거나 아예 뻥 뚫려버린 여인의 조각상이 있었고, 한 작품의 제목은 ‘날개가 자라고 있어’인데 등에 천사가 아닌 악마의 날개, 그리고 머리 위에도 악마처럼 뿔이 달린 모습이었다. 소주병을 여러 개 잔뜩 바닥에 늘어놓고 고주망태가 된 채로 ‘나랑 놀아줘’라고 이야기를 넌지시 건네는 여인상도 눈길을 끌었다. 강아지를 껴안고 ‘그랬구나’ 하며 위로받는, 다소 부드러운 뉘앙스의 작품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점철된 분노의 이미지가 작가를 강하게 휘감았었다.
그런데 3년 만에 개인전 ‘히어 앤 나우(Here and Now)’로 돌아온 작가에게 변화가 생겼다. 혼자 쓸쓸하게 앉아 있는 ‘고도를 기다리며’, 무언가를 골똘히 고민하는 듯한 ‘생각이 많아’, 그리고 머리에 한가득 짐 덩어리가 쌓인 ‘수고하고 짐진 자’ 등 작가를 휘감은 불안의 그림자가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지만, 분노의 감정이 한층 누그러든 느낌이다. 자신을 둘러싼 불안에 분노하기보다는 이제는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한 느낌이랄까.
작가는 “돌이켜보면 나는 굉장히 기질적으로 예민한, 좋게 말하자면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초등학교 선생님이어서 어렸을 때 1년마다 전학을 다녔다. 아이들과 친해질 만하면 또 떠나야 했고 그렇다보니 사람 사귀는 것에 서툴렀다. 그런 시간이 쌓이고 어른이 되니 내가 사회성이 결여됐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작가는 이 아픔이 단지 ‘여성’이라는 틀 안에 국한돼 이야기되길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작가의 대표 작업이 여인상이다 보니 ‘여성으로서의 아픈 삶’ 식으로 비춰질 때가 많았다는 것. 이에 작가는 “여자로서의 삶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태어나보니 여자였을 뿐이지, 나는 그저 평범한 한 사람이다. 여자로서 특별히 힘든 경험을 했다기보다는, 단지 어렸을 때 바람에 눕는 풀잎에도 마음이 아픈, 그런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였다. 내가 여자라고 누가 칼을 던져서 아프게 한 게 아니라 나라는 사람 자체가 그냥 그런 사람이었다”고 털어놓았다.
이 아픔이 초기작에서는 분노로 표출됐다. 여인상의 머리가 모두 새빨간 이유도 세상에 받은 상처로 피범벅 된 것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 회화를 전공했다가 조각을 하게 된 이유 또한 특별하다. 작가는 “80년대 초 ‘동양화란 무엇인가’라는 화두가 등장했을 때 내 작업에 대해 고민했다. 서양 기법으로 한지에 그림을 그리는 게 동양화인지, 내가 하는 것이 과연 동양화가 맞는지 의구심이 들고, ‘나는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에 답답해져 내 자신까지 싫어졌다”며 “그러다 나무를 깎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내 꽉 찼던 마음을 후벼 파서 덜어내는 것 같은 해소감을 느꼈다. 몸을 한껏 움직이는 이 작업이 내게 맞았다”고 말했다.
‘밑창 없는 공허’를 느끼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 예스!’를 외치다
분노를 깎아내듯 강한 이미지로 자신의 내면을 표출했던 작가의 심적 변화는 이번 전시에서 두드러진다. 전시 제목인 ‘히어 앤 나우’부터 작가의 심경이 녹아 들어갔다. 작가는 “어린 시절 겪었던 불안한 감정이 치유되지 않은 채 성인이 돼버린 나는 그 시절의 기억을 놓지 못하고 계속 불안해하며 분노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현재를 사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눈길을 끄는 작품은 ‘오 예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밑창 없는 공허’다. 세 작품 모두 웃고 있지만 묘하게 다르다. ‘밑창 없는 공허’는 양 손을 아래로 축 내린 채 웃고 있는데 눈가에 살짝 눈물이 보인다. 다음에 서 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눈은 웃고 있지만 가슴엔 구멍이 뚫렸고 무언가를 꽉 참는 듯 안간힘을 쓰다가 손가락에 힘이 한껏 들어간 모양새다. 뻥 뚫린 가슴은 조각상이 받았을 상처를 짐작하게 한다. 하지만 양 손가락에 한껏 힘을 주고 웃는 조각상의 모습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처를 극복하고 세상을 마주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오 예스!’는 정말 신이 난 듯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시원하게 건치를 드러내며 웃고 있다. 세 조각상은 이번 전시에서 가장 작가와 닮았다고 느껴진 작품이기도 하다. ‘밑창 없는 공허’를 느끼는 것부터 시작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고, 비로소 ‘오 예스!’ 하며 진정으로 신나게 웃기 시작하는 작가의 삶을 기록한 느낌이다.
작가는 “내 작품들은 내 심경을 담은 일기와도 같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나를 보내지마’ ‘덤벼!’ ‘내 손 잡아’ 등 작품명에 그때그때의 내 심경을 담았다”며 “이전에 내 안의 감정들이 잘 해소가 되지 않아 작품에 식칼도, 소주병도 넣고 했는데 이제는 편해지고 싶었다. 마냥 식칼을 들고 있을 수는 없지 않나(웃음). 그건 너무도 힘든 일이다. 열심히 살아 온 내 자신을 격려하고 지금을 누리고 싶다”고 말했다.
이정진 아트사이드 갤러리 큐레이터는 “작가 송진화는 인생이란 열심히 살아야 하고 가치 있고 보람차게 살아야 한다고 다짐하며, 정말 그렇게 묵묵히 살아왔다고 말한다. 힘들고 마주하기 싫었던 순간들을 견뎌가며 자신에게는 매우 혹독하게 채찍질했다. 그러나 이제는 열심히 살아온 자신을 격려하고, 자신이 어디에 놓여있는지 바라보고 싶다고 말한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그의 말처럼 이번 작품들은 지난(과거) 것에 대한 해소 과정이자, 삶 속에서 생기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녹여냈다. 작가가 던져주는 자신의 경험과 감정 앞에서 우리 자신도 모르고 지내던 진정한 자신을 바라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신작에서 “송진화만의 강렬함이 빠졌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고 한다. 하지만 작가를 꼭 닮은 조각상이 거친 변화에 눈길이 가며, 앞으로는 또 어떻게 변해갈지 궁금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전시는 아트사이드 갤러리에서 9월 19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