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건스탠리, 골드만삭스 등 글로벌 투자은행들의 반도체 업황에 대한 부정적 보고서가 이어지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주가가 직격탄을 맞았다. 지난해 불거졌던 ‘반도체 고점론’의 재탕이라는 폄하와 이번에야말로 슈퍼 사이클이 끝나는 것 아니냐는 비관이 교차하는 가운데 국내 반도체 빅2를 이끄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각기 다른 난국 타개책을 내놔 관심을 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점증하는 위기론을 돌파할 수 있을까?
해외 투자은행들 “반도체, 봄날은 갔다”
이번에도 군불을 지핀 건 모건스탠리였다. 지난해 11월 반도체 공급 부족이 곧 해소될 것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주요 반도체 주의 하락세를 유발했던 모건스탠리가 올해도 비슷한 보고서를 발표한 것.
지난달 9일(미국 현지시간) 글로벌 투자은행 모건스탠리의 분석가 조지프 무어는 반도체 업종에 대한 투자의견을 ‘신중’으로 낮춘 보고서를 고객들에게 배포했다. 투자의견 ‘신중’은 반도체 주가가 향후 12∼18개월 동안 시장 평균을 밑돌 것으로 본다는 의미로, 모건스탠리의 투자의견 중 최하 단계다. 근거는 주요 반도체 유통상들이 안고 있는 재고의 증가였다.
무어는 보고서에서 “반도체 경기가 과열 조짐을 보이고 있다. 경기 지표에도 빨간 불이 켜지고 있다”고 경고하면서 “리드타임(제품의 주문 일시와 인도 일시 사이에 걸린 시간)의 단축이나 수요 둔화가 상당한 재고 조정을 초래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유통상들이 안고 있는 재고가 10년 만에 최고 수준”이라며 “반도체 주식의 위험보상비율도 3년 만에 최저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8월 6일 “D램 호황이 끝나간다”며 SK하이닉스에 대한 투자 의견을 ‘비중 확대’에서 ‘비중 축소’로 두 단계 낮췄던 모건스탠리가 아예 반도체 업종 전체에 부정적 의견을 담은 보고서를 발표하자 반도체 기업들의 주가는 바로 영향을 받았다. 보고서 발표 다음날인 8월 10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주가는 전날보다 3% 가량 하락했다.
이어 8월 16일 글로벌 투자은행 웰스 파고가 D램, 낸드플래시 등 메모리 반도체가 가격 하락 압박을 받고 있다며 D램 3위 업체 마이크론테크놀로지의 목표주가를 하향 조정했고, 1‧2위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주가도 직격타를 맞았다.
한달 후인 9월 7일 모건스탠리는 재차 반도체 업종에 대한 경계 경보를 발령했다. D램 수요는 줄고 재고는 늘어나는 등 가격 인하 압력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 특히 메모리 반도체의 3대 수요처인 PC와 모바일, 데이터센터의 수요가 줄어 3분기 가격이 낮아질 것으로 예상했다.
글로벌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도 비관론에 가세했다. 12일(현지 시간) 골드만삭스는 반도체 자본설비 분야에 대한 투자의견을 ‘매력적’(attractive)에서 ‘중립적’(neutral)으로 하향 조정하는 보고서를 내놨다. 반도체 제조업체들 사이에 공급과 가격조정 이슈가 계속되고 있으며 내년에는 상황이 더 악화할 수 있다는 것. 이에 따라 SK하이닉스에 대해 ‘매수’에서 ‘중립’으로 투자의견을 낮췄으며 삼성전자는 우선 매수 추천종목 명단(conviction list)에서 제외했다.
쟁쟁한 글로벌 투자은행들의 분석처럼 지난 수년간 이어졌던 반도체 업계의 ‘슈퍼 사이클’(초호황)은 이제 끝물인 것일까?
국내 전문가들 “슈퍼 사이클, 건재하다”
해외와 달리 국내 분석가들은 비관론보다는 낙관론에 손을 들어주는 분위기다.
이승우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현재의 메모리 슈퍼사이클의 원인은 매우 심플하다”며 “AI(인공지능)과 빅데이터 산업의 본격 개화로 수요의 가격탄력성이 낮아진 반면, 공급 증가는 적절히 조절되고 있어, 과거와 달리 가격의 안정적 흐름이 길게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구조적으로 메모리 반도체 산업의 변동성이 줄어들고 안정성은 크게 높아졌다는 것.
‘재고 증가’가 문제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결과적으로 재고일수가 증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번 분기 들어서면서 갑자기 높아진 게 아니라 2015년 이후부터 추세적으로 계속 증가하고 있었던 것”이라며 “단순한 재고일수 증가가 반도체 업황 부진의 시그널로 해석될 수 있다면, 2015년 이후의 반도체 슈퍼 사이클을 설명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아마존,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페이스북 등 거대 IT 기업들의 서버용 D램 수요 증가율이 둔화됐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데이터센터의 본격적 투자 증가를 불러일으킨 딥러닝 기반 AI 기술이 여전히 걸음마 단계이며 이들 기업들이 AI 기술에 대한 투자 속도를 줄일 가능성은 낮다”며 “메모리 슈퍼 사이클을 견인했던 두 가지 핵심 요인인 ‘AI 시장의 개화’와 ‘메모리 공급 안정화’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어 일정 기간의 숨고르기 단계를 지나면 메모리 시장은 다시 안정화될 것”이라고 낙관했다.
메모리 공급 과잉과 국내 반도체 기업의 경쟁력 상실을 가져올 것으로 우려됐던 ‘중국 반도체 굴기’에 대해서도 “메모리 반도체 산업에서 자본보다 기술의 중요성이 커졌다”며 “200조 원에 달한다는 중국의 메모리 투자 계획이 중국 메모리 반도체의 성공을 담보할 수 있는 충분조건은 아니다”고 분석했다. 중국 3대 메모리 반도체 기업으로 불리는 이노트론, 진화IC, YMTC 등이 아직은 많은 기술적 난관에 직면해있어 국내 빅2와의 기술적 간극이 여전히 크다는 것.
이같은 분석에 따라 이 연구원은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것이지만, 그마저도 이미 주가에 상당 부분 반영된 것으로 판단된다”며 “반도체 업종에 대해 비중확대 의견을 유지하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대해 투자의견 ‘buy’를 유지한다”고 결론내렸다.
김일태 메리츠종금증권 연구원도 “글로벌 수요는 견조하다고 보는 게 맞다”며 “공급 측면도 과거와 같이 치킨게임 이후에 공급 경쟁이 일어날 가능성도 낮다. 이익이 안정적으로 나면서 변동 폭도 줄어드는 컨슈머 비즈니스로 변화됐다”고 봤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슈퍼 사이클’ 논쟁은 해묵은 감이 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D램의 고점이 지났다”는 주장이 나왔지만 2018년 9월 현재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분석가들의 가장 낙관적인 전망 보고서보다 더 양호한 상황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
이재용 “기술 초격차” vs 최태원 “협력사 상생”
그럼에도 ‘반도체 고점론’, ‘슈퍼 사이클 끝물론’은 국내 반도체 2강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주가에 지속적인 악영향을 주고 있다. 논란을 불식시킬 전략이 필요한 것은 불문가지다.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이끄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최태원 SK 회장은 각기 차별화된 전략을 제시하고 있다.
먼저 이 부회장은 ‘초격차’ 전략을 강조한다. 지난달 6일 이 부회장은 김동연 부총리 겸 경제기획부 장관과 간담회를 가진 후 경기도 화성 반도체 사업장 내 반도체 연구소를 깜짝 방문했다. 반도체 부문 경영진과 간담회 자리에서 이 부회장은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하고 미래 반도체 수요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기술 초격차가 반드시 유지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지속적인 중국의 ‘반도체 굴기’에 대한 대응책으로 분석된다. 지속적으로 후발기업들과의 기술 격차를 유지해야 현재의 입지를 유지할 수 있으므로, 반도체 산업에 대한 투자를 대대적으로 확대하겠다는 전략이다. 이미 삼성은 “반도체 등 핵심 산업에 앞으로 3년 간 180조 원을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은 바 있다. 이는 180조 투자의 상당 부분이 반도체 부분에 집중될 것임을 시사한다.
사실 ‘초격차’ 전략은 과거 이건희 회장이 반도체 사업의 핵심 경영목표로 세우고 추진했던 전략이다. 이 부회장이 이를 재차 강조한 건 삼성전자가 초심으로 돌아가 기술 경쟁력 확보에 매진하겠다는 다짐인 셈이다.
한편, 최태원 SK 회장은 ‘협력사와의 상생’을 강조하고 나섰다. 이는 ‘기업의 사회적 가치’와 ‘공유 인프라’를 중요하게 보는 최 회장의 경영철학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막고 장기적으로 한국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SK하이닉스 혼자만의 역량 강화가 아닌 국내 반도체 장비‧소재 협력사 전체의 경쟁력 강화가 필요하다는 것.
실제로 SK하이닉스는 올초부터 3대 중점 추진 과제로 ▲지식공유 플랫폼 ▲기술협력 플랫폼 ▲전략적 협력사 육성 등을 선정하고 관련 협력 사업을 적극 추진해왔다.
지난 7월 SK하이닉스가 협력사와 전문 지식을 서로 공유하기 위한 플랫폼 ‘반도체 아카데미 2.0’을 추진하기로 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 과정에서 SK하이닉스는 협력사 직원들에게 반도체 기술 교육을 제공하고, 협력사 최고경영자에게 반도체 지식을 전파하거나, 공동 기술개발을 추진하고, 협력사 제품의 성능 평가를 해주는 한편 최소 구매 물량을 보장해주는 등 다양한 협력 모델을 발굴했다.
자체 기술 경쟁력 강화를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는 삼성전자와 협력사와 상생을 통한 생태계 구축에 집중하는 SK하이닉스 중 어느 쪽이 점증하는 반도체 위기론의 압박을 이겨낼 수 있을지 업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