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도기천 기자) 최근 들어 재계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인물은 구광모 LG그룹 회장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다. 두 사람 모두 부친 시대를 마감하고 그룹의 ‘시즌2’를 열었지만 희비가 엇갈린다. 구 회장은 왕성한 투자에 나서고 있지만, 신 회장은 영어(令圄)의 몸이 돼 2심 판결을 앞두고 있다. 두 사람의 앞날은 어찌될까.
경기 침체가 깊어지면서 문재인 정부가 대기업을 상대로 투자·고용에 나서줄 것을 주문하고 있는 가운데, 재계 서열 4위, 5위인 LG와 롯데가 상반된 행보를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지난 6월 ㈜LG 대표이사 회장에 취임해 LG그룹을 이끌고 있는 구광모 회장은 만40세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과감한 투자와 파격적인 행보로 주목받고 있다.
우선 LG화학은 기초소재부문에 2조8000억원을 투자할 것으로 알려졌다. 전남 여수공장 단지 내 33만㎡(약10만평) 부지에 2조6000억원을 투자해 나프타분해시설(NCC)과 고부가 폴리올레핀(PP)시설을 증설할 계획이다. 증설이 완료되는 3년 후에는 NCC 생산능력이 현재 220만t에서 330만t으로 늘어난다. 또 충남 당진공장에는 산업용 초단열·경량화·고강도 소재 양산에 2000억원 이상을 투자한다.
그룹 차원에서 밀어붙이고 있는 전장(電裝)부품 사업도 주목된다. LG전자는 지난 4월 오스트리아의 차량용 헤드램프 업체 ZKW를 1조4440억원에 인수했으며, 네덜란드의 히어, 미국의 헬라 등 글로벌 업체들과의 협업을 강화하고 있다.
앞서 LG그룹은 작년 말 19조원의 신규 투자와 1만명을 신규 채용하겠다는 플랜을 발표해 글로벌 경쟁사들을 긴장 시켰는데, 최근의 투자들은 당시 선언을 구체화한 것이다.
재계에서는 구 회장이 4차산업혁명의 핵심 분야로 꼽히는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5G(5세대 이동통신), 빅데이터, 로봇 등 분야에서 그룹의 미래 먹거리를 찾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미 LG전자, LG유플러스, LG CNS 등이 이 분야에 치중하고 있는데다, 구 회장 본인이 ICT 전문가라는 점에서다. 구 회장은 미국 로체스터 공대 시절 IT(정보기술) 분야를 전공했다.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MBA(경영학석사) 과정을 밟다가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으로 옮겨 실전 경험을 쌓았다.
특히 5G는 구 회장이 가장 공을 들이는 분야다. 스마트폰, 가전, AI(인공지능), 전장부품, 화학 등 주력사업들 간의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매개체라는 점에서 그룹의 핵심 사업으로 부상했다.
구 회장은 LG의 각 사업군이 5G를 통해 서로 윈윈할 수 있는 전략을 고심 하고 있다. 5G 단말기를 경쟁사보다 한발 앞서 내놓는다는 목표 하에 북미·유럽 등의 통신기업들과 긴밀히 협력하고 있다. 보안 논란이 일고 있는 중국기업 화웨이로부터 5G 장비를 도입할 지에 대해서는 내달까지 최종 결단을 내릴 것으로 알려졌다.
AI분야에서는 이미 가시적인 성과가 드러나고 있다. 지난 3일 호주 비영리소비자 매거진인 ‘초이스’ 성능평가에서 ‘LG 올레드 TV AI 씽큐’ 2종이 나란히 최고점인 86점을 받아 1위를 차지했다. 이는 구 회장이 취임 두 달 만에 해외에서 거둔 첫 성과다.
이처럼 LG가 미래먹거리 확보에 사활을 걸며 공격적인 투자에 나서고 있는 반면 롯데는 신동빈 회장의 구속으로 투자가 줄줄이 올스톱 된 상태다.
롯데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해외사업과 국내외 인수합병(M&A) 등에 공격적으로 투자하며 덩치를 키워왔다. 최근 10년간 롯데그룹의 투자액을 보면 2009년 5조1천억원에서 2016년 10조4천억원으로 크게 늘었다. 지난해에는 7조원 안팎을 투자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쪽 지주사’로 멈춰 선 롯데
특히 신 회장은 형인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과의 경영권 분쟁이 마무리되고 부친인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이 은퇴하자, 작년 10월 유통·식품 부문 42개 계열사를 편입한 롯데지주를 창립해 ‘뉴롯데’를 출범시켰다. 이후 롯데지주에 주요 계열사들을 합병하는 형태로 한때 수만 개에 달했던 순환출자 고리를 모두 해소하는 등 지배구조 개혁에 속도를 냈었다.
하지만 신 회장이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에 연루돼 뇌물공여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아 지난 2월 구속된 뒤부터 총수 없는 ‘반쪽 지주사’로 멈춰선 상태다. 올해는 국내외에서 10여 건, 총 11조원 규모의 M&A를 검토했지만 모두 결정을 못 내려 포기하거나 연기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투자액이 약4조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는 인도네시아 유화단지 건설 사업이다. 롯데케미칼은 지난해 인도네시아 국영 철강회사의 소유 부지 50만㎡를 매입하는 등 사업에 속도를 냈었다. 하지만 신 회장 부재로 최종 투자 의사 결정이 늦어지면서 더 이상 진전이 없는 상태다. 경쟁사인 LG화학이 공격적인 신규투자에 나선 것과는 대조적이다.
신 회장은 구속 직전까지 1년의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보낼 정도로 글로벌 사업에 그룹의 미래를 걸었다. 현지 정·재계 인사들과의 네트워크 형성이나 정보 교류에도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그의 부재는 그만큼 충격파가 크다. 황각규 비상경영위원장을 중심으로 한 부회장단이 경영 전반을 이끌고 있지만, 신 회장의 빈자리를 채우기에는 역부족인 상황이다.
‘한 끗 차이’ 두 사람 운명 갈라
롯데의 위기 상황이 길어지면서 재계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다음달 5일로 예정된 항소심 선고에서 신 회장이 집행유예로 풀려나지 못할 경우, 롯데의 각종 신규사업이 한동안 멈출 수 있고, 이런 여파가 산업 생태계 전반을 위축시킬 소지가 크다는 점에서다.
동정론도 고개를 들고 있다. 현재 국정농단 사건으로 수감 중인 재계 총수는 신 회장이 유일하다는 점에서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경제공동체로 지목된 최순실씨가 실소유주인 미르·K스포츠재단에 출연한 기업은 총 53곳으로 출연금 규모는 774억원에 달한다. 하지만 롯데 외 다른 기업들은 뇌물혐의가 적용되지 않았거나, 적용 됐어도 재판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뇌물 혐의의 화근이 된 면세점 청탁 자체가 억울한 측면이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감사원 감사결과에 따르면, 관세청은 2015년 7월과 11월 두 차례에 걸쳐 서울시내 신규면세사업자를 선정하면서 계량 항목 평가 점수를 잘못 산정했고, 이로 인해 두 번 모두 호텔롯데(롯데면세점)에게 불리한 점수가 매겨졌다. 상대적으로 이익을 보게 된 두산(두타면세점)과 한화(한화갤러리아타임월드)가 신규 사업자로 선정됐었다.
동정론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당시 심사가 정당하게 진행됐으면 롯데가 탈락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후 재승인과 관련해 청탁 혐의를 받는 일도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서다.
재계 한 고위관계자는 CNB에 “임원들 간의 식사자리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화두가 신동빈 회장 얘기”라며 “국정농단 재판의 핵심이 박 전 대통령이 최씨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재단을 통해 기업들로부터 강제로 자금을 거둔 것인 만큼, 롯데 사건 또한 단순한 뇌물 사건이 아니라 국정농단이라는 범주에서 해석해주기를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박근혜 정권의 권력남용에서 비롯된 사건인 만큼 기업인에게 선처를 베풀어 달라는 얘기다.
이처럼 비슷한 시기에 ‘제2도약’을 선언했던 구광모 회장과 신동빈 회장은 지금은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다. LG그룹 또한 최씨의 재단에 78억원을 기부했지만 다른 기업들처럼 전경련을 통해 모금됐다는 이유로 처벌을 피했다. 롯데는 전경련 모금 외에 추가로 70억원을 건넨 혐의로 기소됐는데, 신 회장은 재판에서 “사회공헌 차원에서 재단에 기부한 것이며, 최순실의 존재는 모른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최종판단은 법원의 몫이지만, 신 회장 주장대로라면 판단의 한 끗 차이가 두 사람의 운명을 가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