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산업은행과 정상화 계약을 체결하며 새로운 출발을 다짐했던 한국GM이 재차 ‘먹튀’ 논란의 주인공이 됐다. 디자인센터와 기술연구소, 파워트레인 등의 부서를 묶어 별도의 연구개발(R&D) 신설법인으로 분리하려는 GM측의 계획이 단계적으로 한국을 철수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노조 측의 반대에 부딪히고 있는 것. KDB산업은행은 몇달 전의 합의에 어긋난다며 주주총회 가처분 신청까지 냈지만 법원에서 기각됐고, 마침내 19일 열린 주주총회에서 분리안이 통과되면서 법인분리는 돌이킬 수 없는 단계로 진입한 분위기다.
합의 두달 만에 ‘법인분리’ 카드 꺼낸 GM
19일 열린 한국GM 주주총회에서 연구개발 신설법인 ‘GM 코리아 테크니컬센터 주식회사’(가칭) 설립 안건이 통과됐다. 2대 주주인 KDB산업은행과 노조의 강력한 반대 의사 표명에도 불구하고 GM 본사 측이 연구개발(R&D) 부문의 법인분리 계획을 강행하면서 올 초부터 인천‧군산 지역사회와 국내 자동차업계를 뜨겁게 달군 ‘한국GM 먹튀 논란’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번 논란은 최근 수년간 영업실적 악화에 시달리던 한국GM이 지난 2월 군산공장을 폐쇄하겠다고 밝히면서 불거졌다. 이후 한국GM 노사와 정부, 지역사회가 머리를 맞대고 지리한 협상을 전개했고, 마침내 5월 10일 정부는 한국GM 정상화를 위해 7.7조 원을 투입하는 자금지원 방안을 확정했다. 5월 18일 산업은행과 미국 제너럴모터스(GM)가 한국GM 관련 기본계약서(Framework Agreement)를 합의하면서 상황은 최종 정리됐다.
당시 GM은 10년간 한국GM 지분을 매각하지 않기로 했다. 최초 5년간은 지분 매각이 전면 금지되고, 이후 5년간 35% 이상 1대주주 지위를 유지해야 하는 의무가 부과됐다. 산업은행은 한국GM의 주요 경영 의사결정에 대한 비토권(거부권)을 유지하는 한편, 한국GM의 총자산 20%를 초과해 제삼자에게 매각·양도·취득할 때 발휘할 수 있는 비토권을 회복했다. 다양한 논란이 있었지만 양측이 대승적으로 합의한 만큼 ‘먹튀’ 이슈는 일단락될 것으로 비쳐졌다.
하지만 불과 두달도 지나지 않은 지난 7월 한국GM이 글로벌 제품 개발을 위한 연구개발(R&D) 업무를 집중적으로 전담할 신설 법인을 연내에 설립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새로운 논란이 불붙었다.
GM측 “10년 계획 세워놔… 철수 아니다”
한국GM이 밝힌 구상은 현재의 단일 법인 체제를 생산공장과 연구개발 법인 2개로 인적분할하고, 연구개발 부문에 신규 인력을 채용해 글로벌 연구개발 거점으로 키우겠다는 것이다. 연구개발 법인에는 디자인센터와 기술연구소, 파워트레인 등 관련 부서가 포함된다.
기존에 경·소형차 위주로 기능했던 디자인센터의 지위를 격상시켜 GM 본사의 글로벌 베스트셀링 모델인 중형급 스포츠유틸리티차(SUV) 제품의 차세대 디자인 및 차량개발 업무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법인분리가 필수적이라는 게 한국GM측의 주장이었다.
한국GM에 따르면, 제품 연구개발은 GM 글로벌 임원들이 직접 관여하는 구조라 지금처럼 국내에서 생산하는 경차, 소형차 위주로 제품 개발을 맡을 때는 연구개발 부문을 생산공장과 함께 단일 법인 내에 일부로 두더라도 업무상 별다른 제약이 없지만, 앞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생산·판매되는 제품 개발을 주도하려면 GM 글로벌 임원들이 더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본사와 유기적으로 협업할 수 있도록 연구개발 법인을 별도로 둬야 한다는 것이다.
일각에서 거론되는 ‘철수’ 논란에 대해서는 “이미 산업은행 투자를 확약받고 10년 단위의 정상화 계획을 세워놓은 상태에서 철수할 이유가 없다”며 ‘억측’이라는 입장이다.
노조 “구조조정 수순”… 산은 “비토권 행사하겠다”
하지만 한국GM 노조 측은 이런 설명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노조는 법인 신설 계획이 구조조정을 위한 수순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노조 측의 주장에 따르면, 사측의 법인분리안은 한국GM의 생산 기능을 축소하고 신설 연구개발 법인만 남겨놓은 채 생산공장은 장기적으로 폐쇄하거나 매각하려는 의도다.
이런 논리로 노조는 지난 15∼16일 조합원 파업 찬반투표를 벌여 78%의 동의를 얻었고, 이르면 22일 중앙노동위원회에서 쟁의조정 중단 결정이 나오면 곧바로 파업 일정을 잡겠다는 방침이다.
노조는 19일 주주총회 장소로 알려진 부평 본사의 사장실 입구를 봉쇄하는 등 단체행동도 벌였지만 분리안의 주총 통과는 막지 못했다.
한국GM의 계획을 미심쩍게 보는 건 노조뿐만 아니다. KDB산업은행도 한국GM의 의도를 의심하고 있다.
이미 산업은행은 법인분리안이 거론되기 시작한 당시부터 ‘반대’ 의사를 명확히 밝혔다. 한국GM 주총에서 법인분리가 통과될 경우에는 ‘비토권’(거부권) 행사를 검토하겠다고도 말했다. 다만 산업은행이 보유한 비토권은 한국GM의 주요 경영 의사결정, 한국GM이 총자산 20%를 초과해 제삼자에게 매각·양도·취득할 때 등에만 적용되는 권한이라 이번처럼 한국GM의 R&D 법인분리에도 행사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었다.
결과적으로 산업은행은 19일 주주총회에서 비토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법인분리에 반대하는 노조가 주주총회를 무산시키기 위해 주주총회장으로 알려진 부평 본사 사장실 입구 등을 물리적으로 봉쇄해 산업은행 측 대리인이 가로막힌 사이 별도 장소에서 기습적으로 주총 의결이 이뤄진 것. 산업은행 참여 없이 단독으로 주주총회 개최와 안건 의결을 진행한 것에 대해 한국GM 측은 “절차상으로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GM의 지분 구조를 살펴보면 GM 본사와 계열사가 76.96%를 보유한 압도적 1대 주주이고, 산업은행의 보유 지분은 17.02%에 불과해 비토권을 행사할 상황이 아니면 분리안 통과를 막기 어려웠다.
양측 대립 격화… 정면충돌 향방은?
한국GM의 일방적 분리 추진과 노조‧산업은행의 강경한 반대 입장이 맞붙으며 향후 한국GM을 둘러싼 논란은 한층 격화될 전망이다.
우선 노조는 파업을 포함한 강력한 반대 행동을 이어가겠다는 입장이다. 임한택 전국금속노동조합 한국GM지부장은 “GM은 오늘 대한민국 국민과 우리 조합원들을 무시하고 단독으로 법인분리 안건을 처리했다”며 “끝까지 싸워 법인분리를 막아내겠다”고 말했다.
이미 노조는 중앙노동위원회에 쟁의조정을 신청했으며, 조합원 대상 쟁의행위 찬반 투표도 가결된 상태다. 중노위에서 이달 22일쯤 조정중지 결정을 할 경우 노조는 쟁의권을 확보하게 된다.
산업은행도 주주총회 결과 여부와 관계없이 한국GM의 법인분리에 태클을 걸겠다는 입장이다. 업계에서는 산업은행이 조만간 주주총회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이나 본안 소송을 내 법인분리 작업을 지연시킬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