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2호 정의식⁄ 2018.10.30 13:08:48
‘세계 최초 5G 상용화’ 타이틀을 노리는 국내외 이동통신사들의 경쟁이 날로 치열해지고 있다. 국내 이통 3사는 지난 7월 17일 최고경영자들이 만나 내년 3월에 5G 서비스를 동시에 실시하기로 합의했지만, 해외의 여러 이통사들이 ‘세계 최초 5G’ 마케팅에 열을 올리면서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 정부가 올해 12월 ‘5G 모바일 라우터’를 활용한 5G 상용화 추진 계획을 밝히며 일정을 앞당겼고, SK텔레콤은 내년 2월 중에 경쟁사보다 한 달 빠르게 5G 스마트폰 상용화를 실시하겠다는 계획을 공개했다.
이통 3사, ‘코리아 5G 데이’ 합의
지난 7월 17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매리어트파크센터에서 유영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과 박정호 SK텔레콤 사장, 황창규 KT 회장, 하현회 LG유플러스 부회장 등 국내 이동통신 3사 최고경영자(CEO)가 만났다. 정부와 민간의 5G 상용화 추진 상황을 점검하고 향후 일정을 조율하기 위해서였다.
이날 만남의 핵심은 유 장관의 모두 발언에 담겨 있었다. 유 장관은 “대한민국이 세계 최초 5G 상용화 국가가 돼 글로벌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서는 사업자 간 ‘최초’ 경쟁을 지양하고 우리나라가 최초가 되는 ‘코리아 5G 데이(Korea 5G Day)’를 만들 필요가 있다”며 “3사가 보조를 맞춰달라”고 당부했다.
이에 따라 이통 3사는 그간 이어오던 5G 상용화 ‘최초’ 경쟁에서 한 발 물러나 내년 3월에 5G 상용화를 동시에 진행하기로 합의했고, 통신장비 선정 및 네트워크 구축, 5G 스마트폰 수급 등의 일정도 보조를 맞추기로 했다.
하지만 이달 들어 주변 여건이 바뀌면서 정부와 이통 3사도 계획을 수정하게 됐다. 10월 2일 과기정통부는 내년 3월로 예정됐던 5G 상용화 일정을 앞당겨 올해 12월부터 ‘5G 모바일 라우터(네트워크 중계장치·동글)’를 활용한 5G 상용화를 추진한다고 밝혔다.
5G 상용화, 4G 때처럼 ‘모바일 라우터’ 먼저?
업계에 따르면, 정부가 일정을 조정한 건 ‘세계 최초’ 타이틀 때문이다. 10월 1일 미국 이통사 버라이즌이 미국 일부 지역에서 고정형 5G 서비스를 시작하며 ‘세계 최초 5G’를 선언했고, 미국 AT&T도 올해 말 ‘5G 라우터’를 활용한 5G 상용화를 예고했기 때문이다. 정부가 추진했던 ‘대한민국을 세계 최초 5G 상용화 국가로 만드는 계획’이 실패할 가능성이 높아진 것.
이에 정부가 내놓은 해법은 5G 상용화의 정의를 바꾸는 것이었다. 그간의 정부 방침에 따르면 5G 상용화는 ▲기지국 장비 인증 및 설치 ▲단말 공급 및 인증 ▲약관 인가 등의 단계를 거쳐야 정상적으로 마무리된다. 여기서 단말기의 종류에 따라 5G 상용화의 수준이 달라진다.
가장 단순한 ‘고정형 단말’을 이용한 5G 서비스가 1단계라면, 이동 가능한 모바일 단말(라우터 류)을 이용한 ‘5G 모바일 라우터 상용화’는 2단계다. USB 동글 형태의 수신기를 노트북 등에 장착해 사용하는 방식이다. 5G를 지원하는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5G 스마트폰 상용화’야말로 최종 3단계다. 그간 정부와 이통 3사가 추진한 5G 정식 서비스는 이 3단계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하지만 버라이즌에 이어 AT&T도 비슷한 방식의 5G 상용화 경쟁에 뛰어들고, 중국, 이탈리아, 호주, 네덜란드 등 각국의 이통사들까지 합세하면서 정부도 이전까지의 방식을 고수하기 어려워졌다.
이에 과기정통부는 지난 6월 18일 이뤄진 주파수 경매 결과에 따라 이통사의 5G 주파수 사용이 12월 1일부터 가능해진 것을 감안, 이 시점에 이동통신사가 스마트폰이든 이동성(mobility)을 갖춘 모바일 단말로 5G 서비스를 한다면 이것을 상용화로 간주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5G 모바일 라우터를 활용한 상용화를 정식 5G 상용화로 인정하겠다는 논리다.
이렇게 된 건 5G 스마트폰 상용화에 필수적인 5G 지원 스마트폰의 등장이 내년 3월 전후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와 화웨이 등 스마트폰 제조사들의 최초 5G 스마트폰 출시일이 모두 이 시기에 몰려있다.
사실 이런 편법 상용화는 과거 4G(LTE) 도입 당시에도 일어났던 일이다. 이통 3사가 4G 상용화를 선언한 건 2011년 7월이지만 이는 4G 지원 모바일 라우터를 활용한 방식이었고, 실제로 LTE 지원 스마트폰(갤럭시 S2 LTE 등)과 요금제가 출시돼 다수 사용자가 LTE의 속도를 느낄 수 있게 된 건 3개월이 지난 이후의 일이었다.
어쨌든 이런 논리에 따라 버라이즌의 5G 서비스는 ‘정상적인 5G 상용화’가 아닌 것으로 간주됐다. 이동성이 부재한 고정형 무선접속장치(FWA, Fixed Wireless Access)를 사용한 5G 서비스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국제전기통신연합(ITU) 규정도 이동성을 5G의 핵심 요건으로 간주하고 있어서 버라이즌의 경우는 세계 최초 5G로 인정받기 어려울 전망이다.
SK텔레콤, 한 달 빠른 상용화 추진
세계 최초 5G 상용화의 정의가 바뀌면서 이통 3사의 ‘내년 3월 동시 5G 상용화’ 합의도 변동될 조짐이 나타났다.
10월 26일 국회에서 열린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국정감사에 출석한 박정호 SK텔레콤 사장은 기자들과 만나 “5G 상용화 일정이 한 달에서 두 달 정도 앞당겨질 것 같다”며 조기 상용화 가능성을 피력했다. 5G 모바일 라우터 상용화는 12월 초 이통 3사가 동시에 추진하지만, 5G 스마트폰 상용화에서는 경쟁사보다 한 발 앞서겠다는 전략을 공개한 것.
박 사장이 조기 상용화를 추진하는 건 경쟁사들보다 빠른 준비가 이뤄지고 있는 상황을 감안한 것으로 추정된다. SK텔레콤은 이미 지난 9월 14일 장비업체로 삼성전자와 노키아, 에릭슨 등 3사를 선정하고, 이달 15일 장비 연동 및 ‘퍼스트콜(First Call)’에 성공했다. 퍼스트콜은 상용 서비스와 동일한 환경에서 데이터가 정상 송수신되는지 확인하는 최종 단계 테스트다. 앞서 KT가 올초 평창동계올림픽 현장에서 퍼스트콜에 성공했지만 이는 상용 장비를 사용한 테스트가 아니었다.
SK텔레콤이 한 발 앞서가는 반면, KT와 LG유플러스 등은 아직 5G 장비업체 선정조차 마치지 못한 상황이다. 두 회사의 장비업체 선정이 늦어진 건 중국 기업 화웨이를 둘러싼 논란 때문이다. 미국 등에서 화웨이, ZTE 등 중국 기업들이 생산한 네트워크 장비의 보안 문제가 불거지면서 국내 이통사들도 영향을 받게 된 것.
업계에 따르면, KT의 5G 장비업체 선정은 근시일 내에 이뤄질 전망이다. 논란의 초점인 화웨이의 선정 가능성은 극히 낮은 것으로 알려졌다. SK텔레콤과 마찬가지로 삼성전자, 에릭슨, 노키아 3사가 선정될 가능성이 높다.
반면, LG유플러스는 화웨이 선정을 사실상 공식화했다. 이미 4G(LTE) 전국망을 구축할 때 화웨이 장비를 도입했기 때문에 연동성 유지를 위해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지난 7월 이통 3사 CEO가 합의했던 ‘내년 3월 5G 동시 상용화’ 약속은 사실상 의미가 없어진 것일까? 이와 관련 SK텔레콤 관계자는 “5G 상용화에는 여러 단계가 있고, 일단 12월에 모바일 라우터 상용화를 동시 추진한다는 계획은 변함이 없으나, 이 역시 장비의 구체적 수급 일정이 확인된 건 아니다”라며 조심스러운 입장을 보였다.
박 사장의 2월 조기 상용화 언급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공식 발표라기보다는 일종의 목표로 제시한 것”이라면서도 “제조사와 협의를 통해 5G 스마트폰 상용화 일정을 최대한 앞당길 계획”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