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이한성 동국대 교수) 겸재의 그림 속 길을 걸으면서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그림은 전해지되 지금은 갈 수 없는 곳을 어떻게 할까 하는 찜찜함이었다. 그 중 하나는 북녘 땅 금강산과 그 주변을 그린 그림들이고, 또 하나는 북악산 아래 일반인이 출입할 수 없는 청와대 구내를 배경으로 한 그림들이다.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장동팔경첩(壯洞八景貼) 여덟 그림인 자하동(紫霞洞), 청송당(聽松堂), 대은암(大隱巖), 독락정(獨樂亭), 취미대(翠微臺), 청풍계(淸風溪), 수성동(水聲洞), 필운대(弼雲臺) 중 대은암, 독락정, 취미대가 그곳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장동팔경첩 여덟 그림, 즉 취미대, 대은암, 독락정, 청송당, 창의문, 백운동, 청휘각(晴暉閣), 청풍계에도 마찬가지로 대은암, 독락정, 취미대가 포함되어 있으나 갈 수 없는 곳이다.
그 밖에 겸재의 그림 백악산(白岳山)도 북악산을 그렸으되 현재 가볼 수 있는 곳이 오직 서울도성을 따라 가는 순성(巡城) 길뿐이다. 또 다른 그림인 은암동록(隱岩東麓)도 대은암 옆 동쪽 언덕을 그렸으니 또한 청와대 구내에 해당된다.
어릴 때 스쳐지나가기만 한 육상궁을 제한 공개 맞아 처음 들어가보니
다행히 육상묘(毓祥廟, 칠궁)를 그린 그림은, 얼마 전부터 인터넷으로 신청하면 제한 인원이지만 해설사 동행 하에 육상궁을 일별(一瞥)할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또 다른 그림 경복궁은 제한이 없지만 마침 겸재 그림의 배경이 되는 경회루 근처 구역이 공사 중이어서 가 보려면 참고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이런 아쉬움을 가지고 육상묘(毓祥廟), 백악산, 대은암, 독락정, 취미대, 경복궁을 생각하며 육상묘를 들려 북악산 한 바퀴 돌아 경복궁을 들려오는 길을 걷기로 했다. 변죽만 울리는 셈이다.
3호선 경복궁역에서 내린다. 다리가 아프면 3번 출구로 나와 버스를 타고 경복고 앞에서 내리면 편하고, 아니면 경복궁길을 걸어 무궁화동산(청와대 사랑채)을 향해 걷는다. 눈을 들어 바라보면 북악산의 준수한 모습이 바로 보인다.
세종로길이나 경복궁 방향에서 바라보는 북악산은 군더더기 없는 모습이다.
여말선초(麗末鮮初) 문신 박의중(朴宜中)은 이런 북악을 간결한 시로 읊었다.
동국여지승람 형승조에 의하면,
北岳後聳 宮殿增輝 南峰前峙 城郭四圍
북악(北岳)이 뒤로 솟아 궁전은 빛을 더하고
남봉(南峯)은 앞으로 솟고 성곽은 사면으로 둘렀네.
임금이 사시는 경복궁은 뒤로 솟은 북악에 등 기대고 있어 더욱 빛을 발한다는 말이다. 무엇이든 뒤가 든든해야 하는 법이다. 북악(北岳)은 경복궁은 물론 서울의 주산이 되는데 뒤로는 조산(祖山) 삼각산이 있고 더 뒤로는 태조산(太祖山) 도봉이 있어 뿌리가 깊다. 더 길게 보면 이 산줄기는 한북정맥(漢北正脈)으로 이어지고 평강의 분수령에서 백두대간을 만나 백두산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조선이 한양에 도읍을 정한 후로는 태조 때부터 백악산단에 제사를 올렸다(有事于白岳山壇). 가뭄이라도 오래 되면 나라에서는 영험한 이곳 신께 기우제도 드렸다(行祈雨祭于木覓山 白嶽山 漢江 三角).
겸재는 피카소의 大선배?
겸재는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 유란동(경복고 자리)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인왕과 북악 사이를 배경으로 무수히 많은 그림을 그렸다. 겸재의 그림 북악산은 물론 그 중 하나다.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겸재는 북악산 구석구석을 자세히도 그렸다. 지금 청와대를 격(隔)해서 바라보는 우리는 미처 알지 못하는 골짜기들도 생생히 그렸고 우측 삼청동 쪽 기슭에 튀어나온 오리 부리같은 바위 부암(鳧岩)과 그 아래쪽 바위도 튼실하게 그려 놓았다. 어찌 보면 남근과 음낭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필자가 여러 번 북악산 사진을 찍어 보아도 오리바위와 그 아래 큰 바위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북악산의 높이도 실제보다 높다. 언젠가 필자가 알게 된 사실이 겸재의 이른바 진경산수(眞景山水)라는 것은 실경(實景)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땅을 눈으로 보되 마음의 눈으로 죽일 것은 죽이고 살릴 것은 살려서(외람된 말이지만 어찌 보면 과장해서) 그리는 것 같다. 이런 것이 전문가들이 말하는 전신(傳神)이나 사의(寫意)라는 것인가 보다.
그런데 이 오리바위는 정면에서 보이는 모습이 아니라 동쪽 삼청동 쪽 기슭에서 바라보아야 비로소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겸재는 동쪽에서 볼 수 있는 오리바위를 남쪽에서 바라보면서 그것도 크게 그려 놓았으니 면(面)을 분해해서 옮겨다 그린 것이다. 원초적 입체파였던 것일까?
인터넷 신청 거쳐 30분간 관람
북악산을 바라보며 걷다 보니 어느덧 무궁화동산에 다다른다. 이곳은 암울했던 시대에 안가(安家)들이 자리하고 있던 지역이다. 남쪽으로는 청와대 사랑채라 해서 청와대를 알리는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이제 인터넷으로 신청한 육상궁(毓祥宮)을 관람하는 날이다. 관람 시간은 30분이다. 우리 10대 때에는 매일 두 차례씩 지나다니던 곳이다. 등하교길 버스 정류장이 칠궁 바로 옆이었으니 그리된 것이다. 음침하고 낡은 한옥 가옥에 언제나 문이 닫혀 있었다. 칠궁(七宮)이라 했는데 학창시절 그곳이 무엇인지 알려 주는 사람도 없고 우리 누구도 그 음침한 건물에 대해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단지 칠궁 그 이름이 궁금했을 뿐이다.
칠궁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어른이 되고 역사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부터였다. 그러면서 들어가 보고 싶었는데 1968년 김신조 무리가 오고 나서는 아예 근처도 갈 수 없는 곳이 되었다. 다행히 30분 짧은 시간이지만 이제 육상궁에 들어가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름도 어려운 육상궁(毓祥宮)이란 무엇 하는 곳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조선 시대에 자신이 낳은 아들이 임금이 된 후궁 7인을 모신 사당이다. 영조는 숙종의 후궁인 숙빈 최씨의 소생인데 야사에 떠돌 듯이 무수리(궁궐에서 막일을 하던 여종)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다른 이야기는 침방나인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어찌 되었거나 신분이 낮은 출신에서 정1품 숙빈(淑嬪)이 되었고 아들이 왕위에까지 올랐으니 성공한 여인인 셈이다.
후궁 출신 어머니에 대한 영조의 애틋한 효심
영조는 어머니의 신분에 대한 콤플렉스도 가지고 있었고 그런 어머니에 대해 가슴 아파하며 효성도 지극하였다. 그래서 어머니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신 사당을 건립했는데(영조 1년1725) 당초에는 숙빈묘(淑嬪廟)라 하다가 뒤에 육상묘(毓祥廟)로 바꾸었으며, 영조 29년(1753) 묘를 승격하여 육상궁(毓祥宮)으로 개칭하였다. 그 뒤 고종 19년(1882) 화재가 발생하여 건물이 소실된 것을 그 다음해에 복구하였다.
육상궁을 칠궁이라 부르는 이유는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던 임금의 어머니 후궁들 사당을 1908년 이곳에 합설하였기 때문이다. 저경궁(儲慶宮)·대빈궁(大嬪宮)·연호궁(延祜宮)·선희궁(宣禧宮)·경우궁(景祐宮)을 1908년 육상궁 경내로 옮겼고 1929년에는 덕안궁(德安宮)이 옮겨와 7궁이 되었다.
저경궁은 선조의 후궁이며 추존된 왕 원종의 생모인 인빈 김씨의 신궁이다. 대빈궁은 숙종의 후궁이며 경종의 생모인 희빈 장씨의 신궁이다. 연우궁은 영조의 후궁이며 추존된 왕 진종의 생모인 정빈 이씨의 신궁이다. 선희궁은 역시 영조의 후궁이며 추존된 장조의 생모인 영빈 이씨의 신궁이며 경우궁은 정조의 후궁이며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신궁이다. 덕안궁은 고종의 후궁이며 영친왕의 생모인 엄씨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그런데 육상(毓祥)이란 말은 무슨 뜻일까?
육(毓)은 육(育)과 같은 뜻이니 ‘기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상(祥)은 대상(大祥), 소상(小祥)에서 알 수 있듯이 제사를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육상(毓祥)이란 ‘제사를 모신다’는 말을 정중하게 표현한 것이다.
그런 곳이어서 그런지 오늘의 해설사는 군더더기 없는 간결명확한 해설로 육상궁의 내력을 설명해 나간다. 오랜만에 듣는 좋은 해설이었다.
깔끔한 해설로 듣는 육상궁의 모든 것
이 육상궁을 그린 겸재의 그림 육상묘도(毓祥廟圖)가 대전에 사는 개인의 소장품으로 전해진다. 전문가들 설명에 따르면 남종화풍(南宗畵風)이라는데 겸재의 진경산수와는 확연히 다른 오밀조밀한 필치로 펼쳐나간 그림이다.
겸재 63세 되던 해인 1739년(영조 15년) 그린 그림으로 상단에는 육상묘를 출범시키기 위해 임시 기구 부묘도감(祔廟都監)에서 애쓴 18명의 관원을 기록한 기록화이다.
아래로는 북악산을 배경으로 소박한 담장 너머에 역시나 소박한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사당이라기보다는 단정한 선비가 방문 열고 책을 읽고 있을 것 같은 분위기이다. 지금의 육상궁과는 차이가 많다. 수작이어서 대한민국 보물 873호로 지정되었다.
이제 창의문 쪽으로 올라간다. 창의문부터는 한양도성이 이어진다. 주위에는 청계천 발원지를 알리는 표석이 자리하고 있다. 150m 위 북악산 샘물이 청계천 발원지라 한다. 어떤 이는 북악산 동록(東麓) 아래 있는 삼청동 쪽 샘이 발원지라는 이도 있다. 발원지를 구별하는 기준은 가장 먼 거리에서 시작하는 샘인데 두 샘이 다 청와대 관리 구역 안이라서 확인할 길은 없다.
중국 사신도 오르고 싶어했던 북악산의 절경
이제 북악산 방향 성 길을 오른다. 가파르기는 해도 층계를 만들어 놓아 편히 오른다. 돌아보면 인왕산 기차바위가 지척(咫尺)이고 그 아래로는 안평대군의 무릉계가 보인다. 북쪽으로는 북한산 비봉능선이 길게 펼쳐진다. 생각보다 멋진 풍경이다.
조선 시대 청나라에서 온 사신 오장(梧將)이라는 사람도 북악산의 우뚝한 모습을 보고는 북악산에 오르고 싶어했다. 역관(譯官)이 막아서 그는 뜻을 못 이루었지만(梧將言望見白岳, 頗爲奇絶, 欲爲往登云. 譯官言登臨, 別無可觀之處, 山路且險, 難於登陟云) 그가 오르고 감회를 적은 기록이 남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조선시대나 개화기 때 사람들도 한양도성에 오르고 싶어했다. 성벽 따라 도는 것을 순성(巡城)이라 했는데 정조 때의 실학자 유득공(柳得恭, 1749~1807)은 경도잡지(京都雜誌) 기록에서 “도성의 둘레는 40리인데, 이를 하루 만에 두루 돌면서 성 안팎의 꽃과 버들 감상하는 것을 좋은 구경거리로 여겼다. 이른 새벽에 오르기 시작하면 해질 무렵에 다 마치게 되는데 산길이 험하여 포기하고 돌아오는 사람도 있다”(都城周四十里 一日遍巡 周覽城內外花柳者爲勝凌晨始登 昏鐘可畢 山路絶險 有委頓而返者)고 했다.
또한 베델(Bethell)이 창간한 매일신보 1916년 5월 14일자 광고에는 한양도성 한 바퀴 도는 행사 ‘금일은 순성하세’라는 이벤트도 펼치고 있다. 조선시대에도 한양도성 한 바퀴 도는 일은 심심치 않게 이루어졌으며, 100년 전 신문사에서도 한양도성 순성을 대중적으로 추진했으니 생각하면 참신한 일이다.
이제 백악산 정상에 닿는다. 해발 342m라고 쓴 정상석이 숨차게 오른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곰곰 살펴보면 깨진 기와 파편이 눈에 띈다. 예전 이곳에 있던 백악신사(白岳神祠)의 흔적이리라. 조선시대에는 북악을 백악(白岳) 또는 면악(面岳)이라 불렀다. 이곳에 자리했던 국가 기도처가 백악신사였다. 마주 보이는 남산에도 기도처가 있었는데 그 이름은 목멱신사(木覓神祠)였다.
서울도성 한 바퀴 돌기, 일제시대 때도 추천됐는데…
계속해서 정상 지나 북악산 순성 길을 간다. 잠시 후 소나무에 심한 총 자국을 만나는데 ‘1.21 사태 소나무’라 명명해 놓았다. 1968년 1월 21일 북한에서 침투한 김신조 무리가 도주 길에 아군과 교전하면서 생긴 총 자국이라 한다.
이어지는 순성길을 따라 삼청동 방향으로 가다 보면 성벽에 쓴 옛사람들의 글씨도 만난다. 서울도성은 5만 9500 자(尺)로 약 18.6km라는데, 공사에 참여한 각 고을들이 600자(尺)씩 맡아 97 구간에서 ‘공사 실명제’ 작업을 수행하였다. 만약 자신들이 공사한 구간에서 부실이라도 생긴다면 꼼짝없이 다시 불려와 재작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삼청동 쪽 능선을 따라 순성을 계속한다. 북악산 동쪽 줄기에는 겸재의 북악산도에 그려져 있는 부암(鳧岩)이 비로소 보인다. 겸재의 그림에 비하면 상당히 작게 느껴진다. 삼청공원으로 하산해 내려온다. 북악산은 서쪽 능선이 없는 반면에 동쪽 능선은 둘로 갈라진다. 하나는 청와대 동쪽 경계인 북악동록(北岳東麓)이라 할 수 있는 삼청동 서쪽 경계 산줄기이며, 또 하나는 한양도성이 뻗어나간 와룡동, 혜화동 쪽 산줄기이다. 서울의 북촌이라 하는 마을은 이 북악산 동쪽 두 산줄기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독락정’은 혼자 즐기기 위한 정자?
삼청동 지나 청와대 앞길을 지난다. 노란 단풍이 길을 가득 채운다. 우측(北)은 청와대, 좌측(南)은 경복궁이다. 경복궁의 신무문과 청와대 정문은 마주 보고 있다.
경복궁 신무문 밖 지금의 청와대 경내에는 조선시대 임금이 직접 농사를 체험하는 경적진(耕籍陣)이 있었다. 이곳 청와대 안 구역이 포함된 그림들이 취미대(翠微臺), 독락정(獨樂亭), 대은암(大隱岩), 은암동록(隱巖東麓)이다.
취미란 푸른 빛이 희미해진다는 글자로 산 중턱을 뜻하는 말이라 한다. 3점의 취미대 그림이 남아 있는데 개인소장 취미대는 2인의 선비가 경적진을 앞에 두고 경복궁 담 넘어 남산 쪽을 향한 그림이다. 간송본은 비슷한 구도에 3인의 선비가 등장한다. 국립박물관 소장본은 좀 다른 구도로 1인의 선비가 등장한다.
독락정은 오리바위(鳧岩) 아래 골짜기에 모옥(茅屋)으로 그려져 있는 정자 그림이다. 간송본과 국립박물관 본이 있다. 독락(獨樂)이란 홀로 즐긴다는 말이지만 독락의 출전인 맹자 양혜왕 편을 보면 반대의 의미를 갖는다.
“혼자 즐기는 것과 남과 더불어 즐기는 것, 어느 것이 즐겁습니까(獨樂樂 與人樂樂 孰樂?)”라 묻자 “남과 더불어 즐기는 것만 못합니다(曰 不若與人)”는 답이 나온다. 그러니 독락정은 이름과 달리 더불어 즐기기 위해 지은 정자다.
대은암은 청와대 뒤 골짜기 속 큰 바위를 그린 것이고, 은암동록은 대은암 동쪽 언덕에서 남산 쪽을 바라보며 그린 그림이다. 가 볼 수 없는 곳이라서 간략히 짚고 넘어간다. 언젠가 청와대가 오픈하우스라도 열어 전면 개방하는 날이 오면 그림의 배경 되는 장소를 찾아보리라.
경복궁 길을 걸어 내려온다. 노란 은행잎이 예전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공사 관계로 영추문이 문을 닫아 고궁박물관 문을 지나 경복궁으로 들어간다. 겸재의 경복궁도 배경이 되는 경회루 지역을 둘러보려 함이다. 아쉽게도 공사 관계로 담을 막아 놓았다.
‘겸재의 아차 실수’를 보는 재미
겸재의 경복궁도를 보면 경회루 돌기둥들이 보이고 그 앞으로 연못이 보인다. 앞쪽으로는 빈 공터 앞으로 무너진 돌문 기둥만 보인다. 정설은 이 그림이 겸재의 집이 있던 옥인동 쪽에서 본 것이고 문기둥 돌기둥은 영추문이라 한다. 그러나 이 설(說)은 뭔가 이상하다. 경회루 돌기둥과 연못으로 볼 때 이 그림은 분명 남쪽에서 북쪽을 그린 그림이다. 그렇다면 부서진 문 돌기둥은 무엇이란 말인가?
지금과 달리 임진란 이전 경회루 지역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폐쇄된 공간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세 문을 만들었는데 동에는 함홍문(含虹門), 서에는 천일문(天一門), 남에는 경회문(慶會門)이 있었다 한다. 아마도 겸재의 경복궁도는 남쪽 경회문 방향에서 북을 보고 그린 그림일 것이다.
그리고 잠깐, 경복궁도 그림 속 慶福宮은 아차 실수하여 景福宮을 그리 쓴 것인데 그림을 보는 재미 속에는 이런 재미도 있다. 이제 미완(未完)의 길 걷기를 마치고 3호선 경복궁역으로 걸어간다.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