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도기천 기자) 북미 간 핵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북한과의 교역을 준비하고 있는 우리 기업들이 ‘넛 크래커(Nut-Cracker)’ 처지가 되고 있다. 평양정상회담 특별수행원 자격으로 북한을 다녀온 재계 총수들은 미국 정부와 야권으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고, 시중은행들은 미 재무부로부터 대북 금융거래와 관련해 ‘주의’ 메시지를 받았다. 이러다보니 재계는 북한 문제에 대해 극도로 말을 아끼며, 속된 말로 ‘납작 엎드린’ 모양새다.
“이런 분위기에서 남북경협에 나설 기업이 어디 있겠나. 다들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이미 만들어둔 대북사업 테스크포스(TF)까지 축소하거나 없애고 있다. 사실상 올스톱 됐다고 보면 된다”(한 대기업 홍보임원)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를 이룰 때까지 대북제재를 유지하겠다는 ‘선(先) 비핵화 후(後) 제재해제’ 원칙을 재차 천명하면서 그동안 남북경협에 대비해온 국내 기업들의 분위기가 180도 바뀌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지난 9월 평양회담 때까지만 해도 재계는 장밋빛 청사진을 그렸다.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의 정상화, 남북 철도와 도로 연결을 위한 착공식 추진 등 ‘4.27 판문점 선언’을 구체화한 경제협력 방안이 평양공동선언에 담기면서 기업들의 분위기가 한껏 고무됐었다.
하지만 미국 중간선거에 북한 이슈가 작용하지 않자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국들에게 대북제재를 유지할 것을 욕구하는 메시지를 보냈으며, 이란 제재를 본보기로 북한을 압박하는듯한 액션을 취했다.
여기에다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 등 일부 야권은 지난달 국정감사 때부터 평양회담 당시 리선권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장의 태도를 문제 삼으며 연일 북한지도부를 비판하고 있다. 리 위원장은 당시 방북한 기업인들에게 “냉면이 목구멍으로 넘어 갑니까”,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에게는 “배 나온 사람한테 예산 맡기면 안 된다”고 발언한 것으로 전해진다.
대북제재 신경전…불똥 맞은 기업들
미국은 한발 더 나가 한국기업을 직접 압박하고 있다.
미 재무부는 최근 국책·시중은행 7곳(우리·하나·국민·신한·농협·기업·산업은행)에 콘퍼런스 콜(전화 회의)을 요청했고, 이 회의에서 강력한 대북제재 준수를 요청한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미국 측이 은행 내부의 대북관련 업무를 구체적으로 언급해 해당 은행들이 당혹스러워했다는 후문이다. 미 재무부는 농협은행의 ‘금강산 지점’의 영업재개 추진 여부, KB금융경영연구소 산하 ‘북한 연구센터’의 설립 목적, 산업은행의 ‘한반도 신경제센터’와 ‘남북경협연구단’, 기업은행의 ‘북한경제연구센터’, 신한은행 내 통일연구모임인 ‘북한을 연구하는 COP(Community of Practice)’ 등을 거론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상황에 대해 시중은행의 한 고위관계자는 CNB에 “콘퍼런스 콜에서 논의된 사항은 비공개라 내용을 밝힐 수는 없지만, 미국 측은 은행 내의 북한 관련 테스크포스와 연구모임, 심지어 사내 동아리까지 훤히 꿰뚫고 있었다”고 말했다.
콘퍼런스 콜은 미 재무부 내 테러·금융정보국(TFI)이 주관했는데 이 기관은 국내 대북정보 수집을 담당하고 있는 미 CIA 코리아미션센터(KMC)와 밀접한 협조관계에 있다.
이런 분위기이다 보니 금융권에서는 미국 정보당국이 오래전부터 시중은행들의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는 얘기가 돌고 있다. 증권가에는 최근 미 재무부가 한국국적의 은행에 대해 ‘세컨더리 보이콧(대북제재를 위반했을때 받는 경제제재)’을 시사했고, 이로 인해 외국인들이 국내 주식시장에서 ‘묻지마 매도’를 한다는 등의 소문이 확산되기도 했다.
이에 금융위원회가 지난달 31일 “확인 결과 사실이 아니었다”며 직접 진화에 나섰지만 금융권의 긴장감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실례로 미국이 지난 5일 이란의 석유·금융·해운업종에 대한 거래금지 조치(2차 이란 제재)를 취하기 직전에 일부 국내은행은 미국의 요청이 없었는데도 이란인들의 국내 계좌를 선제적으로 동결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CNB에 “CIA 개입설, 세컨더리 보이콧 소문 등이 돌면서 미국이 나서기 전에 알아서 조심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북한에 다녀온 기업들도 사실상 미국의 ‘표적’이 되고 있다.
정부는 지난 9월 평양정상회담 때 역대 정상회담 중 가장 많은 17명의 경제인을 특별수행원으로 참석시켰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최태원 SK 회장, 구광모 LG 회장, 김용환 현대자동차 부회장 등 4대 그룹 대표들을 비롯,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최정우 포스코 회장, 신한용 개성공단기업 협회장, 이동걸 한국산업은행 총재,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이하 대한상의) 회장,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박성택 중소기업중앙회 회장, 이재웅 쏘카 대표, 장병규 4차산업혁명위원장 등 내로라하는 기업인들이 문 대통령과 동행했다.
이후 미국 대사관은 이달 초 미국 재무부의 지시로 북한을 다녀온 주요그룹 총수들의 기업들에 컨퍼런스 콜을 요청했다. 해당 기업들에게 대북사업 계획과 관련된 자료 및 일정 조율을 요청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며 논란을 빚자 미국 측은 회의 계획을 취소했다.
정치권도 기업들에게 부담을 주고 있다. 최근 국정감사에서 야당은 방북한 재계 총수들을 증인으로 신청했고,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별보좌관은 자신이 주관한 방북 ‘뒤풀이’ 모임에 재계 총수들을 초대했다. 총수들은 곡절 끝에 둘 다 불참했지만 재계에서 체감하는 부담감이 적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런 상황들로 인해 재계는 기존에 만들어진 대북사업 TF팀을 축소하거나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북한 내 철도·도로·항만·통신 등 기반시설(SOC) 건설과 광물자원 공동개발 등이 예상되면서 주로 건설·철강업계의 기대감이 컸었지만 지금은 청사진을 서랍 속에 넣었다.
‘미국 표적될라’ 경협 노코멘트
건설업계에서는 2003년 평양에 ‘류경정주영체육관’을 건립한 경험이 있는 현대건설을 비롯, 삼성물산, GS건설, 롯데건설, 대우건설 등이 각자 TF를 결성해 북한의 핵폐기 이후 본격화될 남북경협에 대비해 왔지만 현재로서는 언제 대북제재가 해제될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라 별다른 활동이 없는 상태다.
철강업계에서는 현대제철이 국내에서 유일하게 철도레일을 생산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 받았고, 포스코는 막대한 양의 북한지역 철광석 개발에 나설 것이라는 기대 속에 그룹차원의 대응책을 마련했지만 지금은 움직임이 없다.
개성공단 개발 사업권과 북한 7대 SOC사업 개발 독점권을 갖고 있는 현대그룹은 대북사업 진행을 위해 현대아산을 앞세워 대기업과 공기업, 국제기금 등이 참여하는 ‘글로벌 컨소시엄’을 추진했지만 별다른 진척이 없다.
문재인 정부 들어 청와대와 밀접한 관계를 가져온 SK그룹도 조용한 분위기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때도 방북한 경험이 있는 최태원 SK 회장은 9월 방북 때 양묘장을 방문했는데 산림사업은 유엔의 대북제재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점에서 국내 최대 규모의 기업 경영림을 관리하고 있는 SK임업이 화두에 올랐었다. SK텔레콤은 지난 7월 CR센터 산하에 ‘남북협력기획팀’을 신설했다.
하지만 최 회장은 최근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지금은 북한 투자에 대해 말할 타이밍은 아니다”며 말을 아꼈다.
최 회장과 함께 평양정상회담에 다녀온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구광모 LG그룹 회장도 대북사업과 관련된 일체의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보수정권으로 바뀌면서 남북경협에서 큰 손실을 본 현대그룹의 과거 사례가 재계에 각인된 만큼, 대부분 기업들은 미국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형국이다.
지난 9월 방북한 기업의 한 관계자는 CNB에 “미국 중간선거에서 북한 이슈가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는 점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굳이 대북제재 해제를 서두를 이유가 없어 보인다”며 “지금같은 분위기에서는 나서다가 역풍을 맞을 수도 있기 때문에 북미, 남북관계의 흐름을 분석하면서 때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다른 재계 관계자는 “우리 정부와 미국 정부가 일치된 목소리로 남북경협의 방향을 제시해 줘야 기업들이 다음 행동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