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사회적 가치 추구’를 강조하는 최태원 회장의 경영철학이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최근 1년 간 최 회장은 다보스 포럼, 보아오 포럼, 하노이 포럼, 닛케이 포럼 등 수많은 글로벌 리더 모임에 참석해 사회적 가치 추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SK그룹도 다양한 사회적 실험을 추진하며 최 회장이 주창하는 사회적 가치 기반 비즈니스 모델 혁신에 앞장서고 있으며, 협력사는 물론 경쟁사까지 이에 합류하는 등 재계 전반에 사회적 가치 추구의 큰 흐름이 만들어지는 모습이다.
도쿄, 하노이, 서울 그리고 난징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한 SK의 접근 방식은 DBL(Double Bottom Line) 경영이다. SK가 에너지 분야의 경쟁 기업인 GS칼텍스와 협력해 전국의 주유소에 소포 배달 네트워크를 구축한 것이 좋은 사례다.”
지난 7일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일본 도쿄에서 열린 닛케이 글로벌 매니지먼트 포럼에 참석해 발표한 내용의 일부다. 그는 SK의 사회적 가치 추구가 주주와 주식시장의 압박을 불러올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투자자들은 지속 가능한 기업을 선호한다”며 “SK의 경영 철학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주주라면 장기 성과와 단기 수익 사이의 균형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이틀 후인 9일 최 회장은 베트남을 방문, 하노이 국립대학에서 열린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기후변화 대응’이라는 주제의 제1회 ‘하노이 포럼’에 참석해 축사를 발표했다. 최 회장은 이 자리에서 “환경 보존에 더 적합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과 해법을 찾아야 할 때”라며 경제적 가치 뿐만 아니라 환경 보호·개선 등과 같은 사회적 가치 창출에 집중하는 SK의 ‘딥 체인지(Deep Change)’ 경영 사례를 소개했다.
13일에는 서울 본사에서 조용병 신한금융그룹 회장과 만나 사회적 기업 금융 생태계 활성화를 위한 업무 협약을 체결했다. 양측은 유망 사회적 기업 및 소셜 벤처를 발굴하고, 사회적 기업 금융 생태계를 활성화하기 위해 다음달까지 200억 원 규모의 사회적 기업 전문 사모펀드를 결성키로 했다.
오는 17일에는 중국 난징에서 ‘제3회 난징 포럼’이 열린다. ‘이해와 대화: 아시아·태평양 공동 운명체 구축’을 주제로 열리는 이 행사에서 최 회장은 지속가능 발전을 위한 사회적 가치 추구의 중요성을 강조할 계획이다.
11월 일정만 헤아려봐도 이처럼 빡빡하다. 이외에도 1월의 다보스 포럼, 4월의 보아오 포럼, 5월의 베이징 포럼과 상하이 포럼 등 올초부터 이어진 최 회장의 글로벌 행보는 사회적 가치 추구를 설파하는 각종 행사로 가득했다.
최 회장이 이처럼 ‘사회적 가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글로벌 메신저가 된 이유는 뭘까?
사회적 기업 만들고 키우고 지원하다
기업의 사회적 가치 추구가 기업의 장기적 성과 달성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 현대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유효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그의 경영 철학 때문이다. 최 회장이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미 10여 년 전부터 그는 사회적 기업을 중심으로 사회적 가치 확산에 집중해왔다. 최 회장에 따르면, ‘사회적 기업’이란 사회적 가치와 재무적 가치를 동시에 추구하는 새로운 형태의 기업이다.
최 회장의 사회적 가치 추구 행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지난 2006년 ‘행복도시락’이라는 사회적 기업을 설립하면서부터다. 결식 이웃의 공공 급식과 취약계층의 일자리 창출이라는 과제를 동시에 이룰 목적으로, SK행복나눔재단을 주축으로 정부·지자체·NGO 등이 협력해 설립한 이 회사는 SK그룹 최초의 사회적 기업으로 현재까지 수많은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2008년 최 회장은 영국에서 개최된 사회적 기업 분야의 올림픽 ‘사회적 기업 월드 포럼’에 참석해 사회적 기업의 중요성에 재차 눈떴다. 이후 최 회장은 2010년 사회적기업사업단을 구성해 500억 원 규모의 기금을 조성, 여러 사회적 기업을 지원하는 사업을 본격화했다.
2012년에는 SK그룹의 소모성 자재 구매대행을 담당하던 계열사 MRO코리아를 사회적 기업 ‘행복나래’로 전환했다. 대부분의 사회적 기업이 소규모 영세 기업인 상황에서 연매출 1200억 원의 사회적 기업 행복나래 출범은 많은 반향을 남겼다. 현재까지도 행복나래는 국내에서 가장 큰 사회적 기업이다.
2014년 그는 <새로운 모색, 사회적 기업>이란 저서를 옥중 출간하기에 이른다. 이 책은 사회적 기업의 필요성과 취약한 현실을 지목하며, ‘사회성과 크레딧’ 등 사회적 기업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새로운 해법을 제시했다.
이후 2015년 4월 사회성과 크레딧 개념에 기반한 사회성과 인센티브 제도를 본격 추진했다. 사회적 기업이 만들어 낸 고용·환경·복지·문화 등 각 분야의 성과를 구체적으로 평가하고, 그에 비례해 인센티브를 지급하는 새로운 시도다. 이 제도를 수행할 ‘사회 성과 인센티브 추진단’이 출범했고, 이후 이 단체는 현재까지 수많은 사회적 기업의 사회 성과를 측정하고, 100억 원에 육박하는 인센티브를 지급했다.
‘사회적 가치 추구’를 정관에 반영한 이유
사회적 기업 육성과 후원에만 머무르는 게 아니라 SK그룹 자체도 끊임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적 가치 추구에 참여하고 있다.
지난해 3월 SK는 기업 정관을 변경했다. 기존처럼 주주 가치 창출에만 머무르는 게 아니라 사회적 가치까지 창출해야 한다는 것. ‘회사는 경제 발전에 기여함은 물론, 사회적 가치 창출을 통해 사회와 더불어 성장한다’, ‘회사는 이해관계자 간 행복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도록 노력하고,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하도록 현재와 미래의 행복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등의 내용이 추가됐다.
이어 2017년 6월 열린 그룹 확대 경영회의에서 최 회장은 딥 체인지(근본적 변화) 지속과 함께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다. 각 계열사의 경영성과 평가지표(KPI)에 재무적 가치 외에 사회적 가치 기여도를 반영한다든가, 그룹이 보유한 유·무형의 자산을 사회와 공유함으로써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방안 등을 모색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따라 계열사와의 상생 협약이나 임직원의 봉사활동 참여, 기부 등으로 대표되던 이전까지의 사회적 기여 수준을 넘어선 보다 근본적인 방식의 사회적 가치 추구 움직임이 시작됐다.
2017년 12월 SK이노베이션은 자회사 SK에너지의 배타적 핵심 자산 ‘주유소’를 전 국민과 함께 공유해 사용하는 ‘공유 인프라 경영’을 개시했다. 전국의 3600여 주유소를 공유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 아이디어를 전국민에게 공모하는 ‘주유소 상상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수많은 사업 아이디어가 접수됐고, 이를 취합한 SK에너지는 지난 3월 주유소를 물류 기업, 스타트업 등이 공유와 협업을 함께하는 O2O 서비스 플랫폼으로 바꿔나가기로 결정했다. 국내 최대 물류회사인 CJ대한통운과 협력 계약도 체결했다.
‘뉴 SK’ 원년 선포… 타 기업도 동참
올해 1월 2일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열린 2018년 신년회에서 최 회장은 “껍질을 깨는 방식으로 종전 비즈니스 모델을 근본적으로 혁신하고, 경제적·사회적 가치를 함께 추구하는 ‘뉴 SK’의 원년이 되자”고 강조했다.
이날 최 회장은 임직원이 올해 실천해야 할 4가지 중점 과제로 ▲‘더블 바텀 라인’을 위한 사회적 가치 본격 창출 ▲공유 인프라에 대한 가시적 성과 ▲글로벌 차원의 새 비즈니스 확보 ▲일하는 방식의 혁신 등을 제시했다.
이에 따라 계열사들은 올 한 해 다양한 방식의 사회적 가치 추구에 나섰다. 먼저, SK에너지는 지난 8월 기존 아스팔트보다 수분 저항성을 대폭 개선해 아스팔트 특유의 냄새와 차량 배출가스를 줄인 ‘프리미엄 아스팔트’를 개발 출시했다.
9월에는 SK텔레콤 노사가 임금 인상분 일정액을 사회와 공유해 사회적 가치 창출에 나서기로 합의했다. 임금 인상률 2.5% 중 기본급 인상액의 30%에 해당하는 금액을 사회적 가치 창출을 위한 재원으로 출연하기로 한 것. 회사도 직원과 동일한 금액을 출연해 매년 약 30억 원을 사회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분야에 사용하기로 했다.
지난 5일 SK텔레콤이 발표한 티맵택시 개편계획도 ICT 기술력을 통한 사회적 가치 창출의 일환이다. 티맵 교통 데이터와 고객들의 이용 패턴 데이터를 분석해 실시간으로 승객이 몰리는 지역을 택시 기사에게 알림으로써 승객의 대기시간을 줄이고 택시 기사의 수익을 증대시킬 수 있다는 것.
이외에도 SK그룹 계열사들은 다양한 방식의 사회적 가치 추구에 나서고 있다. 그렇다면 최 회장이 생각하는 다음 단계는 뭘까? 올해 2월 서울 연세대에서 열린 ‘2018 글로벌 지속가능발전 포럼(GEEF)’ 행사 말미에 그는 “SK만의 노력으로는 부족하다”며 “더 많은 영리 기업들이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런 움직임은 이미 시작됐다. 지난 7월 SK에너지는 정유업계의 경쟁사 GS칼텍스와 손잡고 양사의 주유소를 스타트엄 ‘줌마’의 개인간 택배 서비스 ‘홈픽’의 플랫폼으로 활용하는 업무 협약을 체결했다. 최태원 회장의 사회적 가치 추구와 허창수 GS그룹 회장의 ‘상생 경영’이 화학적 결합을 일으킨 첫 사례다.
재계 관계자는 “최태원 회장은 십수년 전부터 사회적 기업과 사회적 가치의 중요성을 강조해왔고, 올해 들어서는 아예 이 분야의 글로벌 리더로 자리매김했다”며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최 회장의 분투에 해외 경제인들도 깊은 공감을 표시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