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이성호 기자) 기업의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 ‘차등의결권’ 도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차등의결권이란 상법상 ‘1주 1의결권’ 원칙에 예외를 두자는 것으로, 1주에 복수의 의결권을 부여하는 제도를 뜻한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따르면 정도와 방식의 차이는 있지만 이 제도를 도입하는 나라는 여럿 된다.
미국의 경우 회사가 차등의결권 주식을 발행한 후 상장한 경우에 한해 허용되고, 캐나다는 의결권에 변형을 줄 수 있는 주식을 정관에 규정하면 인정된다. 프랑스·덴마크·네덜란드·아일랜드·헝가리·핀란드·스웨덴·영국 등 주요 유럽 국가들도 차등의결권 제도를 두고 있다.
일본은 일정 수의 주식을 하나의 단원(單元)으로 묶어 하나의 의결권을 부여하는 단원주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데, 주주 간 불균등하게 적용한다는 점에서 차등의결권 주식과 유사한 효과를 내고 있다.
하지만 이 제도가 아직 국내에는 도입되지 않아 일부 행동주의 펀드의 경영간섭 및 경영권 위협을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재계에서는 적극적으로 도입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행동주의 펀드는 일정한 의결권을 확보하고 기업에 자산 매각, 배당 확대, 자사주 매입, 지배구조 개선, 구조조정 등을 요구해 단기간에 수익을 내는 투자 전략을 사용하는 글로벌 헤지펀드를 지칭한다.
2005년 소버린이 SK텔레콤으로부터 약 9000억원, 2006년 ‘기업 사냥꾼’이라 불리는 칼 아이칸이 KT&G로부터 약 1500억원의 차익을 거두고 돌아간 사례가 대표적이다.
한국경제연구원(이하 한경연)에 따르면 최근 글로벌 헤지펀드의 적대적 경영개입이 급증하고 있어 우리기업에 대한 공격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한경연이 ‘액티비스트 인사이트 2018 보고서’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행동주의 펀드가 공개적으로 경영에 개입했던 타겟 기업은 2013년 570개에서 지난해 805개로 약 41% 증가했다.
국내에서도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부당함을 문제 삼아 주주권을 행사하는 바람에 삼성 측이 큰 피해를 본 바 있다. 최근에는 엘리엇이 현대차그룹 구조개편에 개입해 경영권을 흔들고 있다. 또 국내 사모펀드 KCGI는 한진그룹의 지주회사인 한진칼에 대한 경영 참여를 선언하기도 했다.
이런 사례들이 잇따르자 재계에서는 최소한의 방어 장치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커지고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이달 초 국회에 ‘상법 개정안’ 처리를 미루고 차등의결권 법제화를 서둘러 달라는 의견을 전달했다. 상법 개정안은 감사위원 분리선임, 집중투표제 의무화, 다중대표소송제 도입 등을 담고 있는데 통과될 경우, 외국계 투기자본의 공격이 더 쉬워지기 때문에, 상법을 개정하기에 앞서 경영권 방어 수단을 먼저 도입해 달라는 얘기다.
앞서 한국상장회사협의회와 코스닥협회도 “우리나라의 인수합병(M&A) 관련 법제는 전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 봐도 경영권 방어자에게 매우 불리하고 불공정한 제도적 취약점이 있다”며 대책 마련을 촉구한 바 있다.
경영세습 악용 등 부작용도 커
이런 가운데 현재 국회에는 차등의결권 도입을 담은 상법 개정안(정갑윤 의원·윤상직 의원·권성동 의원 각각 대표발의)이 올라와 있다.
또한, 지난 8월 최운열 의원(더불어민주당)이 대표발의한 ‘벤처기업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 일부개정법률안’은 비상장 벤처기업이 주주 동의가 있는 경우 행사할 수 있는 의결권의 수가 1주마다 2개 이상 10개 이하인 차등의결권 주식을 발행할 수 있도록 해 벤처기업의 경영권 안정을 도모토록 했다.
이 같은 움직임과 맞물려 지난달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은 “차등의결권은 창업벤처기업에게 원활한 자금조달을 통한 성장의 사다리를 제공해서 혁신창업을 활성화하는 제도”라며 “우리나라도 이제 기술력이 있는 창업벤처기업에 한해서라도 이 제도 도입을 적극적으로 검토할 때가 됐다”고 밝히기도 했다.
여당과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혁신성장 전략의 핵심 중 하나가 기술창업·혁신창업인데, 이를 활성화하기 위한 전제로 경영권 안정이 보장돼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국회법사위 검토보고에 나온 반대 견해를 보면, 주주들의 감시와 견제로부터 경영진들을 자유롭게 해 지배주주의 사익추구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고, 비효율적인 경영진의 교체를 위한 효과적 수단인 적대적 M&A의 작동을 방해할 공산이 있다. 대주주 일가가 방어권을 남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같은 이유로 경제개혁연대·참여연대·경실련 등 시민사회단체들도 반대하고 있다. 이들은 경영권이 보장되면 기업이 더 성장할 수 있고 고용이 증가한다는 주장은 입증된 바 없고, 벤처기업이라 해서 지배구조 정책의 예외로 인정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다.
또 재벌가의 3·4세와 친인척들은 벤처기업 관련 법률에 따라 일정한 요건만 갖추면 얼마든지 벤처사업가로 변신할 수가 있다는 점에서, 차등의결권이 이들의 경영권 세습에 악용될 수 있다며 적극 반대하고 있다.
참여연대 관계자는 CNB에 “여당 측에서 일단 비상장 벤처기업에 한해서만 하자는 것인데 이는 인터넷전문은행에게 은산분리 원칙을 훼손해가며 완화해준 것과 같은 맥락으로 문제점이 분명히 있고 제기되는 부작용도 해소되지 않았다”며 “진행과정을 지켜보고 대응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차등의결권을 둘러싼 찬·반 논란이 이어지는 가운데, 정치권이 어떻게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낼 것인가가 가장 큰 과제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