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도기천 기자) 국내 주요대기업들이 신년사를 통해 던진 화두는 ‘혁신과 도전’이었다. 미중 무역 분쟁과 신흥국 금융불안, 환율·금리·국제유가의 불확실성, 내수침체 등 나라 안팎으로 위기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만큼, 변화를 통해 위기를 정면 돌파하자는 것. 특히 올해는 세계경제의 중심축인 미국과 중국의 경제마저 악화될 것으로 전망되면서 재계는 ‘생존 전략’을 새로 짜고 있다.
국내 4대 그룹이 신년사를 통해 제시한 공통된 화두는 ‘위기 속 기회 발굴’이었다. ‘새로운 성장동력 육성’을 통해 돌파구를 찾자는 의미다.
특히 작년 신년사와 달라진 점은 위기를 강조하는데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성장전략을 언급했다는 점이다. 지난해에는 ‘생존’, ‘경쟁’, ‘변화’ 등이 주로 강조됐으나, 올해는 여기에 더해 글로벌 경쟁력 확보를 통한 장기적 성장과 지속가능 경영을 주문했다.
기업 경영평가사이트 CEO스코어에 따르면, 10대 그룹 신년사에서 언급된 단어는 ‘고객’이 모두 58회로 가장 많았으며, ‘성장’과 ‘글로벌’이 각각 41회와 35회로 뒤를 이었다. 이는 재계 전반에 3·4세 경영으로 세대교체가 이뤄지면서 위기돌파에 그치지 않고 과감한 변신과 도약, 새로운 기업역사를 만들자는 도전 의식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삼성 “기업역사 새로 쓰자”
와병 중인 이건희 삼성 회장을 대신해 신년사를 발표한 김기남 삼성전자 부회장은 “2019년은 삼성전자가 창립 50주년을 맞이하는 뜻깊은 해”라면서 “10년 전 글로벌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세계적인 IT 기업으로 도약한 것처럼 올해는 ‘초일류·초격차 100년 기업’으로 도약하는 계기를 마련하자”고 강조했다.
특히 그는 올해 반도체 수출이 대폭 감소할 것이라는 전망과 관련, “차세대 제품과 혁신 기술로 신성장 사업을 적극 육성하고, 건설적인 실패를 격려하는 기업문화와 신기술에 대한 과감한 도전과 투자로 미래 지속성장의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는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성장 둔화, 스마트폰·가전 시장의 경쟁 격화 등 전례 없는 악조건이 예상되는 현실을 지적하면서 임직원들의 분발을 당부한 것으로 해석된다. 끊임없는 혁신과 기술고도화 노력을 통해 근본적인 사업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얘기다.
삼성은 이건희 회장의 장남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작년 5월 공정거래위원회의 대기업집단 동일인 지정에 따라 ‘그룹 총수’가 됐지만 내년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있는데다 미래전략실의 해체로 계열사들이 각자도생(各自圖生)하고 있는 상황이라 그룹차원의 신년사는 내놓지 않았다.
현대차 정의선 “수소차로 정면 돌파”
본격적인 3세 경영 체제에 접어든 현대차그룹은 정몽구 회장 대신 올해 처음으로 정의선 수석부회장이 신년사를 발표해 눈길을 끌었다. 정 수석부회장은 정몽구 회장의 장남이자 고 정주영 창업주의 손자다.
그는 작년 9월 수석부회장 취임직후 한국산 자동차 관세 문제를 풀기 위해 미국 현지에서 유력 정치·경제인들을 접촉했으며, 이어 유럽 출장길에 오르는 등 발로 뛰고 있다.
수석부회장 자리가 현대차는 물론 기아차와 현대제철, 현대건설, 현대엔지니어링, 현대모비스, 현대위아, 현대캐피탈, 현대카드, 현대차증권, 현대라이프, 현대글로비스, 현대로템, 이노션 등 계열사 전체를 통솔하는 위치라는 점에서, 재계에서는 사실상 정 수석부회장으로의 경영승계가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정 수석부회장은 신년사에서 “기존과는 확연하게 다른 새로운 게임의 룰이 형성되고 있다”며 “지금까지의 성장방식에서 벗어나 우리의 역량을 한데 모으고 미래를 향한 행보를 가속화해 새로운 성장을 도모해야 할 때”라고 밝혔다.
특히 그는 “2021년 자율주행 로보택시를 시범운영 하고, 특히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 경쟁력을 갖춘 수소전기차는 2030년까지 약 8조원을 투자해 수소전기차의 대중화를 선도하겠다”며 미래먹거리로 ‘수소차’를 콕 집어 강조했다.
이는 올해 반드시 돌파구를 찾아야 하다는 절박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전세계 자동차 수요는 중국의 판매 감소와 미국, 유럽, 일본의 저성장으로 인해 감소세로 돌아선 상태다. 업계에서는 올해 글로벌 완성차 시장이 지난해 보다 0.1% 성장에 그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수소차 플랜은 이런 위기 상황에서 내놓은 생존카드다.
SK 최태원 “‘사회적 가치’로 행복 추구”
최태원 SK 회장은 신년사에서 평소 지론인 ‘공유 경제’를 강조했다.
최 회장은 “SK가 건강한 공동체로 기능하면서, 동시에 행복을 더 키워나갈 수 있는 방법은 사회적 가치(SV)를 창출하는 것“이라며 ”회사의 제도 기준을 관리에서 행복으로 바꾸고 핵심성과지표에서 SV 비중을 50%까지 늘리는 한편, 구성원의 개념을 고객, 주주, 사회 등으로 넓혀야 한다”고 주문했다.
최 회장은 작년 신년사에서 “미래 생존이 불확실한 서든 데스(Sudden Death) 시대에서 지속 성장하기 위해서는 ‘딥 체인지(근본적 변화)’가 반드시 필요하다”며 “사회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를 함께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이날 ‘행복’ 발언은 그 연장선으로 풀이된다.
또 올해 글로벌 경기 전망으로 미뤄 주력 계열사들의 실적을 낙관할 수만은 없다는 인식에 따라 대응책을 주문하면서 동시에 지속적인 투자 확대와 일자리 창출 등 기업 본연의 책무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최 회장은 우리나라 사회적기업 시장 규모를 국내총생산(GDP)의 3% 수준으로 키우겠다는 이른바 ‘10만 사회적기업 양성’의 비전을 갖고 있다. 그는 빈부격차와 실업 등 우리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공유 경제’라 믿고 있다.
LG 구광모 “고객이 버팀목”
LG그룹은 신년사를 통해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메시지를 전했다.
구광모 회장은 작년 6월 그룹 총수가 된 이후 처음 주재한 이번 시무식에서 “우리에게는 고객과 함께 70여 년의 역사를 만들어 온 저력과 역량이 있다. 진정한 고객 가치를 변화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며 “지금이 바로 ‘고객을 위한 가치 창조’라는 기본 정신을 다시 깨우고 더욱 발전시킬 때”라고 강조했다.
이날 그는 10분 분량의 신년사에서 ‘고객’이라는 단어를 무려 30차례나 언급했는데, 어려울 때일수록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의미로 해석된다.
구 회장은 만41세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과감한 투자와 파격적인 행보로 주목받고 있다. 최근 단행된 임원인사를 통해 역대 최대규모인 134명을 상무자리에 앉혔는데 평균 나이가 48세밖에 안 된다. 취임 후 첫 현장 행보로 LG사이언스파크를 방문해 ‘미래준비 전략’을 주문한 바 있는 만큼, 올해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5G 분야에서 과감한 사업확장이 예상되고 있다.
그룹 차원에서 밀어붙이고 있는 전장(電裝)부품 사업도 주목된다. LG전자는 지난해 4월 오스트리아의 차량용 헤드램프 업체 ZKW를 1조4440억원에 인수했으며, 네덜란드의 히어, 미국의 헬라 등 글로벌 업체들과의 협업을 강화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CNB에 “올해는 작년보다 경제상황이 더 나쁠 것으로 예상됨에도 총수들은 투자와 성장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대응하지 못하면 도태된다는 위기의식과 함께 재계가 한층 젊어진데 따른 도전의식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결국 대내외 악재가 겹친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현명하게 위기를 극복하고, 동시에 혁신과 변화를 도모할 수 있느냐가 신년사 메시지의 핵심”이라고 해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