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8호 정의식⁄ 2019.02.15 15:14:04
오랜 진통 끝에 광주시와 현대차가 투자협약 체결에 최종 합의하면서 ‘광주형 일자리’라는 새로운 노사상생모델의 실험이 시작됐다. 정부와 지역사회는 광주형 일자리가 한국 제조업이 직면한 일자리 창출과 노동자 간 양극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지만, 성공을 위해서는 풀어야 할 실타래가 너무 많다. 과연 광주형 일자리는 노동계의 반대와 국내 경차 시장의 경쟁 격화를 이겨내고 국내 자동차산업의 일익을 담당할 수 있을까?
광주시‧현대차, 손 잡고 상생 실험 ‘도전’
지난 1월 31일 광주시와 현대자동차가 ‘지역경제 활성화 및 일자리 지속 창출을 위한 완성차 사업 투자협약’을 체결하면서 ‘광주형 일자리’라 불리는 유례없는 노사상생‧사회대통합 실험의 막이 올랐다.
이날 오후 광주시청 1층 로비에서는 광주시, 현대자동차, 중앙부처 관계자, 지역 인사 등 400여 명이 모여 투자 협약식 ‘행복한 동행’이 진행됐다. 문재인 대통령도 협약식에 참석해 광주형 일자리의 성공과 전국 확산을 위해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투자협약의 골자는 광주시와 현대차가 1, 2대 주주로서 2021년 하반기 차량 양산을 목표로 지역사회와 공공기관, 산업계와 재무적 투자자 등이 참여하는 자동차 합작법인 설립을 추진하는 것이다.
신설법인은 현대차가 개발한 1000cc 미만의 경형 스포츠유틸리티(SUV) 차종(가솔린)을 위탁생산하게 된다. 완성차 생산공장은 빛그린산단 내 약 62만 8000㎡(19만 평) 부지에 연간 생산능력 10만 대 규모로 건설된다.
현대차는 신설법인에 투자자의 일원으로 참여하며, 신규 차종의 위탁 생산·판매, 신설법인 공장 건설과 생산 운영, 품질관리 등을 위한 기술 지원 등을 맡는다.
광주시도 신설법인의 투자자로 참여하는 한편, 사업이 조기에 안정화하고 지속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보조금과 세금감면 혜택을 지원한다.
신설법인의 전체 근로자 평균 초임 연봉은 주 44시간 기준 3500만 원 수준의 ‘적정임금’이다. 이후 기본급 비중을 높이는 것을 골자로 하는 선진임금체계가 외부 전문가 연계 연구용역 후 결정·도입될 예정이다. 노조는 없지만, 노사가 참여하는 상생협의회를 구성해 제반 근무조건 등을 회사 측과 협의하게 된다.
광주시와 현대차는 신설법인의 조기 경영안정과 지속 가능성 확보를 위해 노사상생협의회 결정사항 유효기간을 누적생산 35만 대 달성 시까지 유지하기로 했다. 연간 7만 대의 생산이 이뤄질 경우를 감안하면 이 기간은 약 5년으로 예상된다. 다만, 가시적 경영성과 창출과 같은 중대한 사정변경이 있는 경우 유효기간 도래 이전이라도 노사민정협의회 협의를 통해 조정할 수 있도록 부속 결의를 협정서에 추가했다.
이날 협약식에서 문 대통령은 “무려 23년 만에 완성차 공장이 국내에 새로 지어졌다. 성공하면 비용 절감을 위해 해외로 나갔던 다른 제조업 공장들이 국내로 되돌아오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정부는 어느 지역이든 지역 노사민정 합의로 광주형 일자리 모델을 받아들인다면 그 성공을 위해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차 지분 너무 작고, 정‧지자체 지분 너무 크다
협약서만 놓고 보면, 광주시와 현대차가 서로 한 발 양보해 최적의 상생협력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낸 것처럼 보인다. 광주시는 최대 1만 2000여 명에 달하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확보해 지역경제의 회복을 기대할 수 있고, 현대차는 적은 투자금과 인건비로 국내 점유율이 높지 않은 경차 시장을 효과적으로 공략할 수 있게 됐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건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려나갔을 경우에만 만날 수 있는 미래다. ‘가지 않은 길’에는 아직 풀어야 할 과제가 너무 많다.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자본금 확보’다.
합작법인의 총 자본금은 7000억 원으로 예정됐다. 이 중 2800억 원이 광주시와 현대차 등이 출자한 자기자본으로 충당된다. 광주시가 590억 원(21%), 현대차가 530억 원(19%)을 부담하고 나머지 1680억 원은 지역상공인과 지역기업, 현대차 관련 기업, 공공기관, 시민, 노동계 등의 투자로 채워진다. 자기자본금을 제외한 나머지 4200억 원은 산업은행과 기타 금융권 등 재무적 투자자들에게서 조달할 예정이다.
광주시는 합작법인 주식의 일부를 시민 주주 공모방식으로 채우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시민과 노동계가 주주로 참여하면 조기 자기자본금 모집은 물론 이사회도 노사민정으로 적절히 구성할 수 있다는 복안이다.
문제는 현대차의 비중이 지나치게 낮아 자칫 투자자로서의 책임도 적게 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 민주노총 측이 “현대차라는 대기업이 불과 500여 억원만 투자하고 사실상 국민의 세금으로 지어진 하청공장을 하나 더 갖게 되는 것에 불과하다”며 광주형 일자리 합의를 폄하하는 이유다.
산업은행이 국책은행인 것을 감안하면, 정부와 지자체의 투자 지분이 너무 커서 결과적으로 ‘공기업’처럼 운영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최대 주주가 광주시이므로 ‘현대차 공장’이 아닌 ‘광주시 공장’인 셈인데, 이렇게 되면 제대로 된 책임경영이 이뤄지지 않아 시장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다.
경차 시장 포화…‘경SUV’ 해법 통할까?
두 번째로 풀어야 할 과제는 경쟁이 격화되고 있는 국내 경차 시장의 상황이다. 이번 합의로 현대차는 19년 만에 다시 경차 시장에 진입하게 됐는데, 안 그래도 시장 상황이 포화국면이어서 경차 시장에서 이익을 거두기가 쉽지 않다는 지적이다.
국내 경차 시장 규모는 약 16만 대 내외로, 전체 자동차산업 수요의 9%를 차지한다. 2012년에는 연간 20만 대 판매를 넘어서며 내수시장의 13%까지 차지한 바 있다.
그러나 현대차는 지난 2002년 경차 아토스가 단종된 이후 경차 가격 대비 생산비용이 비싸다는 이유로 중대형차‧SUV 등에 집중하며 경차 시장에서 발을 뺐다.
이 과정에서 현대차의 내수 점유율이 낮아졌다. 2000년대 초반 50%에 육박하던 현대차 점유율은 2015년 39%를 기록하며 30%대로 내려선 이후 2016년 37.6%, 2017년 38.4%, 2018년 39.8% 등을 기록하며 40%대로 올라서지 못하고 있다.
이에 따라 현대차 내부에서 점유율 회복을 위해 경차 시장에 재진출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됐지만, 국내공장 생산으로는 경쟁력을 확보할 수 없어 번번이 무산됐고, 결국 국내 경차시장은 기아차와 한국GM이 양분하는 구조가 고착화됐다.
게다가 경차 시장의 규모가 줄어들고 있다. 2017년 기아차는 모닝, 레이 등 9만 959대를 팔았고, 한국GM은 스파크 4만 7245대를 팔아 총 13만 8895대의 경차가 판매됐다. 하지만 지난해에는 기아차 8만 6063대, 한국GM 3만 9868대, 합계 12만 7429대로 판매량이 크게 줄었다.
현대차는 기존의 승용차형 경차가 아닌 SUV형 경차 이른바 ‘경SUV’라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 외연을 넓힌다는 계획이지만, 성공 가능성은 미지수다.
노조 측 “사업성 낮다”, “총파업 강행” 반발
세 번째 난제는 노동계의 반발이다. 현대차노조, 금속노조, 민주노총 등은 광주형 일자리의 사업성이 의심스럽다며 반대 주장을 쏟아내고 있다.
우선 현대차노조는 협상이 타결된 다음날인 2월 1일 하부영 지부장 명의로 긴급성명서를 내고 “광주형 일자리는 자동차 산업 몰락의 신호탄”이라며 “내수와 수출 모두 사업성이 없는 광주형 일자리를 즉각 철회하라”고 주장했다.
현대차노조는 “이미 국내 자동차 생산시설이 남아도는 상황에서 광주에 추가 생산공장을 짓는 것은 망하는 길로 가자는 것”이라며 “광주형 일자리 협약의 단체교섭권 5년 봉쇄는 한미FTA 19.2조 위반이어서 미국 수출이 제한될 것이며, WTO(세계무역기구) 협정 역시 정부나 지자체 보조금 지급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수출이 어렵다”고 지적했다.
금속노조도 이와 관련 “설 직후 광주형 일자리 관련 특별고용안정위원회 소집을 사측에 요구하고 이 위원회를 통해 정부 정책으로 발생할 피해와 문제를 예측하고 원하청을 아울러 대책을 요구할 것”이라며 “사측이 응하지 않으면 총파업을 포함한 투쟁을 벌이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노동계가 이처럼 광주형 일자리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건 기존 정규직 임금의 절반도 안되는 연봉 구조 때문이라는 것이 업계의 분석이다. 평균 3500만 원 내외의 임금을 받는 광주형 일자리가 성공적으로 안착할 경우, 평균 9400만 원 수준인 기존 현대차노조 소속 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임금 하락 압박이 이어질 건 불 보듯 뻔한 일이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광주형 일자리가 고용 창출 및 양극화 해소라는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는 묘수가 될 지, 여러 이익집단의 이전투구 과정에서 표류하는 악수가 될 지 현 시점에서는 예상하기 어렵다”며 “모델이 된 독일 슈투트가르트의 경험처럼 노조‧기업‧지자체 등 여러 구성원들이 적절히 합의를 도출해가며 한 발 한 발 나아가기를 기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