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7호 도기천 기자⁄ 2019.02.18 10:16:13
(CNB저널 = 도기천 기자) 대형건설사들의 아파트 브랜드 경쟁이 점입가경에 이르면서 부작용 또한 커지고 있다. 지명과 아파트 명칭이 달라 혼란을 겪는 경우, 새브랜드 출시에 따른 기존 아파트 주민들의 반발, 네이밍 변경에 따른 공공성 훼손 등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 논란을 피하고자 아예 신규 브랜드를 내놓지 않겠다는 건설사까지 등장하고 있다. CNB가 주요지역 현장취재를 통해 실상을 들여다봤다.
강력한 대출규제 등을 담은 9.13부동산 정책의 여파로 아파트 매매시장이 거래절벽 상황에 처하면서 분양시장 또한 양극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
‘강남불패’ ‘서울불패’ ‘로또분양’ 같은 단어들이 주를 이뤘던 작년과 달리 실수요자 중심으로 시장이 재편되면서 올해는 ‘되는 곳만 된다’는 전통적인 부동산 철칙이 새삼 빛을 보는 분위기다. 실제로 최근 대림산업의 ‘e편한세상 광진 그랜드파크’ 일부 평형이 1순위에서 미달하면서 2년 만에 ‘서울 불패’ 공식이 깨졌다. 건설사 입장에서 보면 브랜드는 기본이고, 적정한 분양가에 노른자위 입지가 추가돼야만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다.
이러다보니 마케팅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실제 아파트가 지어지는 곳의 동네 명칭은 숨기고, 인근 집값 높은 지역의 지명을 단지명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잇따르고 있다. ‘후광효과’로 덕을 보겠다는 것.
대표적인 경우가 서울 마포구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시티(DMC)’를 활용한 아파트 단지들이다.
DMC는 서울시가 20여년 전부터 국내 IT·미디어산업의 메카로 조성해온 곳이다. MBC글로벌미디어센터, YTN, SBS프리즘타워, KBS미디어센터, 한국경제신문·TV, 중앙·조선·동아일보의 종합편성채널 방송국 등이 들어서 있으며, CJ E&M, LG CNS, LG유플러스, 한샘 등 대기업 수십여 곳이 여기에 둥지를 틀었다. 영업면적 23만1611m²(약7만200평)에 이르는 강북 최대규모인 롯데쇼핑의 ‘상암 롯데몰’ 건립도 예정돼 있다.
DMC에는 DMC아파트가 없다?
이에 DMC를 활용한 분양 마케팅과 집값 끌어올리기가 한창이다. 네이버 검색어에서 ‘DMC 아파트’를 검색하면 노출되는 아파트와 빌라, 오피스텔 등이 수백개 단지에 이른다.
하지만 이중 대부분은 DMC 지역 내에 있지 않다. DMC가 위치한 상암동의 거주 시설은 분양·공공임대 아파트(월드컵파크1~12단지) 12개 단지와 상암휴먼시아 2개 단지, 주상복합 ‘상암카이저팰리스 클래식’ 등 15개가 전부며, 정작 이들은 DMC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DMC를 아파트명칭에 넣은 대부분 단지는 해당 지역 밖에 자리잡고 있다. 주로 상암동 인근의 다른 동네들이다.
최근 SK건설이 수색9구역을 재개발해 공급한 ‘DMC SK뷰’의 경우, 은평구 수색동에 위치해 있다. 상암동과 직선거리로 1Km이내 임을 강조하고 있지만 직선으로 가는 길은 경의선 철길에 막혀있어 한참 돌아가야 한다.
서대문구 가재울 뉴타운 내 ‘DMC래미안e편한세상’(북가좌동)과 ‘DMC파크뷰자이’(남가좌동), 수색 재개발 구역에서 공사가 한창인 롯데건설의 ‘DMC롯데캐슬더퍼스트’(수색동)도 비슷한 경우다.
단지명을 개명한 사례도 여럿이다. GS건설의 수색자이 1~2단지는 ‘DMC자이’로 이름을 바꿨고, 수색동 청구아파트는 ‘DMC청구’로 탈바꿈했다.
이런 흐름은 인접한 경기도 고양시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고양시 덕양구 향동동 일대 121만3255㎡ 부지에 조성되고 있는 ‘향동택지지구’다. 이곳에서는 다음달부터 순차적으로 민간분양과 공공임대 아파트 8700여 가구가 집들이를 할 예정인데, 단지 대부분이 DMC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3월 입주예정인 계룡건설의 DMC리슈빌더포레스트, 7월 입주예정인 호반건설의 DMC호반베르디움더포레과 효성건설의 DMC해링턴플레이스, 9월 입주예정인 DMC하우스디 등이다.
향동지구는 서울 상암동과 1Km 남짓한 거리라 후광효과를 노리고 네이밍에 DMC를 사용하고 있지만 행정구역은 엄연히 경기도라는 점에서 혼란을 주고 있다.
다음달부터 분양이 시작되는 경기 고양 덕은지구 또한 상암동 월드컵파크 9단지와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DMC 명칭의 사용이 유력하게 점쳐지는 곳이다. 64만㎡ 부지에 4천여세대가 2021년부터 순차적으로 들어선다.
이처럼 정작 상암동에 위치한 아파트들은 DMC 명칭이 없는데, 인근 지역의 대부분 아파트들은 DMC를 사용하고 있어 위치 찾기, 버스정류장 이용 등에 있어 상당한 혼란을 주고 있다.
이런 사례는 상암동 뿐이 아니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에서는 ‘DMC’처럼 지역 랜드마크가 된 ‘판교’를 활용한 분양 마케팅이 펼쳐지고 있다. 현대건설과 포스코건설, 대우건설이 최근 분당구 대장지구에서 공급한 ‘힐스테이트 판교 엘포레’, ‘판교 더샵 포레스트’, ‘판교 퍼스트힐 푸르지오’ 등에는 전부 ‘판교’라는 네이밍이 사용됐다. 하지만 대장지구(대장동)는 판교 중심부(판교동, 삼평동, 운중동)와는 5~6킬로 정도 떨어진 곳이다.
강남권에서는 신사동 대원칸타빌이 ‘압구정 대원칸타빌’로 개명해 ‘압구정 효과’를 누리고 있으며, 현대건설이 작년말 분양한 ‘힐스테이트 녹번역’의 건립 위치는 서울 은평구 응암동이지만. 역세권임을 강조하기 위해 지명 대신 역명이 사용됐다.
브랜드 전쟁 진화? 잣대는 오직 ‘시세’
반대로 단지 네이밍에 지역명이나 인근 랜드마크, 지하철역사명 등을 아예 빼버린 경우도 등장하고 있다. 브랜드 가치만으로 승부를 걸겠다는 것.
신세계건설은 대구 달서구에서 지난달 분양한 주상복합아파트의 이름을 애초 ‘대구 죽전역 빌리브 스카이’로 정했지만 막판에 ‘대구 죽전역’을 뺐다. 빌리브는 신세계건설이 계열사 물량 위주로 진행해온 사업방식에서 벗어나 외부 수주를 확대하기 위해 작년 9월 론칭한 브랜드다.
현대건설은 작년 12월 서울 반포동 삼호가든3차를 재건축해 분양하면서 단지명을 ‘디에이치 라클라스’로 확정했다. 반포동이 서울 강남의 노른자위에 위치해 있지만 굳이 강남·반포 같은 지역명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디에이치가 고급주택 브랜드로 인식되어 분양 대박을 내고 있기 때문. 디에이치는 힐스테이트보다 한 단계 상위 개념의 주택 브랜드로, 강남 재건축 단지 중에서도 평균 분양가가 3500만원 이상인 고급단지에만 적용되고 있다.
대림산업이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에서 올초 분양한 e편한세상 청계 센트럴포레에서도 지역명을 찾아볼 수 없다. 지역명보다는 ‘청계천’이라는 친환경적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공공분양아파트의 경우 명칭 변경으로 공공성이 모호해진 경우도 많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는 ‘그린빌’ ‘뜨란채’ ‘휴먼시아’ ‘천년나무’ 등 4개의 공공분양 브랜드를 내놨지만 청약 당사자들은 이를 꺼리는 분위기다.
지난해 수원 ‘호매실 능실마을 LH’와 영통 이의동 ‘LH해모로’ 주민들은 아파트 명칭 변경을 통해 ‘LH’를 제외했으며, LH가 고양향동지구에 짓고 있는 10년공공임대주택 단지들은 입주민들의 개명작업으로 최근 이름이 ‘DMC해링턴플레이스’와 ‘DMC하우스디’로 바뀌었다.
이는 서민들에게 시세보다 낮은 가격으로 주택을 공급해 주거안정을 꾀하겠다는 공공주택의 공급취지와도 어긋난다. 공공성 마크(LH)를 떼어내 가치를 올리겠다는 의도로 읽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단지명이 지명과 상관없는 경우, 남의 동네 랜드마크 명칭을 가져다 쓴 경우, 아예 지명이나 원래 명칭을 감춘 경우 등 제각각이다보니 주민들 간의 갈등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또 실제와 다른 아파트 네이밍은 과장 분양광고 논란 등 소비자 분쟁의 불씨가 되고 있다.
도 넘은 ‘名’ 쟁탈전…기준 마련돼야
이 같은 혼란은 법적 규정이 미비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단지명에 지역명을 넣는데 대한 별다른 제재 기준이 없으며, 명칭 변경도 그다지 까다롭지 않기 때문.
현행법에 따르면 아파트 명칭을 바꾸려면 입주자 4분의 3이상의 동의를 받아 건설사(시공사)와 해당 자치구의 승인을 받으면 된다. 공동주택 특성상 아파트관리사무실과 경비실, 부녀회 등이 조직돼 있어 진행이 용이한 편이다. 주로 해당동 경비원들이 직접 호별 방문해 연명(찬성서명)을 받는 형태로 추진된다.
건설사는 단지조경, 시설 등 일정요건에 맞아야 이름을 바꿔줄 수 있다고는 하지만 반려한 사례는 찾기 힘들다. 주민들의 표를 의식해야 하는 지자체 또한 거부하기가 쉽지 않다.
반면 주소명 변경은 이보다 몇배 까다롭다. 도로명주소법에 따라 지역주민과 지방자치단체장의 의견을 모은 후 도로명주소위원회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 해당 도로명을 사용하는 토지주와 건물주, 세입자 등 지역주민의 5분의 1 이상 동의를 받아야 변경 신청이 가능하며, 이후 2분의 1 이상 찬성해야 바꿀 수 있다.
실례로 최근 제주 서귀포시가 5·16군사쿠데타 등 부정적 이미지를 의식해 ‘5·16도로’ 이름 변경을 추진하고 있는데 도로변 주택과 시설 실태조사, 시민 의견 수렴에만 최소 1년 이상의 기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상암동 아파트에 거주하는 한 주민은 CNB에 “주택도 상품이라면 상품인데 인근 동네는 물론 심지어 경기도 주민들까지 DMC 명칭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건 상품명 도용과 비슷한 이치”라며 “아파트 가치에 영향을 줄 뿐 아니라 단지의 위치를 찾아가는데 혼란을 주기 때문에 관할 지자체가 (명칭 사용에 관한) 규정을 강화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 대형건설사 관계자는 CNB에 “아파트 이름의 원래 의미는 단지 특성을 효과적으로 알리려는 취지에서 비롯됐지만, 시세에 영향을 미치면서 단지들 간의 갈등, 무리한 네이밍 사용 등 부작용을 유발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며 “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명칭 선정에 신중을 기하고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