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김금영 기자) 오덕후 동지를 만났나 싶었다. 전시 공간을 가득 채운 피규어들을 보는 전율이란! 어디서 이 피규어들을 구입했고, 좋아하는 아이템은 무엇이고, 피규어를 구할 수 있는 대표적인 행사는 무엇인지 대화가 술술 풀렸다. 그런데 대화를 나눌수록 결이 다른 오덕후라 느꼈다. 돈선필 작가는 단지 캐릭터적인 측면에서 피규어에 관심을 갖고 접근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각 예술로서의 가능성, 그리고 문화적인 측면에서 피규어를 탐구하고 있었다.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가 돈선필 작가의 개인전 ‘끽태점(喫態店)’을 6월 13일까지 연다. 마치 상점 이름과도 같이 느껴지는 끽태점은 ‘형태를 음미할 수 있는 상점’을 뜻한다. 이는 일본에 갔을 때 봤던 다방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란다. 작가는 “일본식 다방을 키샤라 하는데, 굉장히 앤티크한 느낌을 지닌 독특한 공간이었다. 그 공간의 느낌이 좋았다. 이 한자를 득음하면 끽차가 되는데 여기서 ‘차’ 글자를 형태를 의미하는 ‘태’로 바꿔서 차가 아닌 형태를 음미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재해석했다”고 말했다.
형태를 음미하는 공간, 그렇다. 끽태점은 피규어의 형태를 음미하는 공간이다. 만화나 애니메이션, 게임 등의 캐릭터를 조형물로 축소 재현한 것이 피규어다. 정밀한 조형 기술이 필요하고, 고액의 자본이 투입되지만 그 가치가 예술적인 측면에서 이야기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래서 전시 공간에 피규어가 등장했을 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친구를 갑자기 만난 것처럼 괜히 반갑게 느껴진 걸지도 모르겠다. 어릴 적부터 장난감을 좋아해 자연스럽게 피규어에도 입덕한 작가 또한 처음엔 가벼운 마음으로 피규어를 대했지만 점점 궁금증이 생겼다 한다.
작가는 “생각해보면 피규어는 플라스틱을 주조한 결과물로, 직설적으로 말하면 관상용 외에 쓸데없다. 그럼에도 이 피규어에 가치를 부여하며 애정을 갖는 사람들이 많고, 수요도 꾸준히 늘어나 굉장한 산업을 이루고 있다”며 “그렇다면 이 피규어가 예술 조각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관상 목적 차원에서는 조각과 크게 다른 점이 없지 않나? 피규어는 대체 뭘까? 이런 궁금증이 자연스럽게 생겼다”고 말했다.
2001년부터 본격적으로 직접 피규어가 사고 팔리고 만들어지는 현장을 돌아보기 시작한 작가는 ‘피규어 텍스트: 원더 페스티벌 리포트’라는 책을 발간하기도 했다. 이번 전시도 피규어 탐구의 한 일종이기도 하다. 작가가 피규어를 탐구하며 느낀 것은 여러 욕망이 혼재된 결과물이라는 것.
작가는 “일반적으로 조각은 작가 1명이 자신의 생각을 구현하기 위해 만든다. 반면 피규어에는 여러 가지가 뒤섞인다. 피규어를 살 소비자가 필요하고, 소비자의 수요를 파악하는 회사, 그리고 피규어를 만들 원형사, 설계사, 대량으로 제품을 생산할 회사도 있어야 한다. 즉 여러 사람의 합의가 혼재된 결과물의 형태가 바로 피규어”라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작가의 흥미를 끈 존재가 원형사다. 피규어의 원형, 즉 근원을 만든다고 할 수 있는 원형사는 작가에게 ‘훌륭한 동시대의 조각가’로 느껴졌다고 한다. 그는 “일본에 타케야 타카유리라는 유명한 원형사가 있다. 수많은 피규어 중 이 사람의 손길이 느껴져 원형사를 찾아보면 그의 이름이 보였다. 소비자의 수요에 의해 피규어의 원형을 만들지만 거기에 타케야만의 스타일도 자연스럽게 들어가 있는 것이다. ‘신 고질라’의 유명한 피규어도 그가 만들었다”고 말했다.
타케야의 피규어를 살펴보며 그 세밀한 조형 기술에 다시 한 번 놀랐다 한다. 실제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아주 정교한 피규어도 있었다고. 작가는 “이 형태를 구현하는 원형사 또한 나는 조각가이고, 피규어라는 장르 또한 넓게 봤을 때 조각의 범위 안에 들어간다고 생각한다”며 “하지만 원형사는 자신이 예술가라 인지하지 않고, 전면에 나서지 않으며, 클라이언트의 요구 뒤에서 묵묵히 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대해선 사회적으로 더 활발한 이야기가 이뤄져야 하지 않을까. 모든 장르에 담론이 활발히 일어나야 재미있지 않겠느냐”고 생각을 밝혔다.
수많은 이들의 욕망이 혼재된 피규어의 ‘형태’
이번 전시는 숨은그림찾기처럼 골라보는 재미도 있다. 그냥 봐서는 여러 개의 진열장에 피규어들이 전시돼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 안에는 작가가 2001년부터 모은 피규어 뿐 아니라 작가가 이 피규어를 따라 만들거나 재해석한 조형물 또한 같이 설치돼 있다. 어떤 게 작가가 만든 것인지 알아차리기 힘들다.
이에 대해 작가는 “내가 만든 게 뭔지 결과부터 알려주면 재미없지 않느냐”고 반문한 뒤 “또 이번 전시에서는 내가 직접 만든 오브제가 핵심이 아니다. 나보다 훨씬 조형물을 잘 만드는 사람들은 많다. 나는 미술가로서 이야기를 끌어내고자 한다. 보통 피규어에 대해서 이뤄지는 이야기를 살펴보면 피규어의 캐릭터 또는 피규어를 직구매하는 요령, 불량품 등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이것 말고 다른 이야기도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이어 “단지 피규어의 장식성뿐 아니라 이 형태에 어떤 유행의 정황이 들어가 있고, 어떤 욕망과 문화들이 뒤섞여 있는지 더 많은 이야기를 우리는 나눌 수 있다. 그 이야기의 물꼬를 트는 작업”이라며 “그 의미에서 재생산, 재소비적인 차원에서 내가 만든 오브제를 뒤섞어 놓았다”고 덧붙였다.
작가의 초기작 및 신작도 볼 수 있다. ‘마이 비고(My Vigor)’는 작가의 초기 작업으로 해리포터 피규어가 바닥의 스마일 이모티콘 이미지를 바라보는 형태를 취했다. 작가는 “텍스트의 형태, 레디메이드 사물, 스케일, 피규어에 대한 관심이 시작됐을 때의 작업”이라고 밝혔다. 신작 ‘디코이(Decoy)’는 본래 사냥에서 들새나 들짐승을 사정거리 안으로 유인하기 위해 만든 도구를 뜻한다. 앞서 진열장에 본래의 피규어와 이를 재생산한 오브제를 뒤섞은 작가는 ‘디코이’에서는 다른 작가들의 전시에서 남은 부산물들을 뒤섞었고, 이를 통해 자신의 작업과 가짜 장치의 유사성에 주목한다.
전시장 출구 쪽에는 ‘디버깅 스테이션 6/1 스케일(Debugging Station 6/1 Scale)’과 ‘넥스트 백 도어(NEXT back door)’가 설치됐다. ‘디버깅 스테이션’은 어린 시절 게임을 즐기던 작가의 기억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콘솔 게임 개발자들을 위해 소니(Sony) 사가 제공했던 장치인 디버깅 스테이션은 작가의 작업에서 소비자이기보다는 개발자의 시선으로 게임, 애니메이션, 피규어를 다루는 일면을 보여준다. 이 조각은 별도의 채색 없이 적갈색 모형용 프라이머를 그대로 노출한다. 그래서 형태가 더욱 두드러진다.
‘넥스트 백 도어’는 다음 전시의 예고편으로, 형태 중 특히 ‘얼굴’에 대한 이야기를 이끈다. 피규어 두상과 캐스팅에 사용한 겉틀이 한 세트 형태인데, 이 작품에서 피규어 두상은 일종의 좌대로 기능한다. 안면 부분엔 다양한 사물이 부착돼 얼굴의 역할을 대신하는데, 이번 전시에서는 눈, 코, 입이 그려진 구겨진 종이 형태의 조형물을 설치했다.
작가는 “사람이 자신과 상대방을 구별하는 중요한 기준은 얼굴이다. 여기에 상당한 흥미가 있다. 일본에서 버추얼 유튜버가 상당히 인기다. 만화나 애니메이션에 가까운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우고 활동하는 유튜버로, 이를 보는 사람들은 도상에 가까운 캐릭터를 유튜버의 얼굴이라고 믿고 바라보게 된다. 하지만 그 실체는 실제가 아닌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 캐릭터들의 얼굴은 실제 이목구비를 갖추고 있지만 텅 비어 있는, 부유하는 기호와도 같다. 그리고 이 비어 있는 얼굴에 익숙해진 관찰자는 보고 싶은 얼굴을 자유롭게 투영하게 된다”며 “물질로만 다루면 단순해질 수 있는 형태의 얼굴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추후 작업엔 형태 중 특히 얼굴에 집중한 이야기를 풀어보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