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김금영 기자) 화려한 샹들리에와 고풍스러운 벽지, 아름다운 그림이 가득 찬 공간. 그런데 뭔가 어수선하다. 벽에 걸리지 않은 그림은 방바닥에 덩그러니 놓여 있고, 비닐 포장지에 싸인 가구는 뒤집혀 있기도 하다. 사진작가 로버트 폴리도리가 포착한 베르사유 궁전 풍경이다.
박여숙화랑이 3월 5~19일 로버트 폴리도리의 개인전 ‘베르사유: 고요한 공간의 시학’을 연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아름다움의 상징인 베르사유를 촬영한 ‘베르사유’ 시리즈를 선보인다. 그런데 그가 카메라에 담은 건 완벽하게 정리되지 않은, 복원 과정에 있는 다소 어수선하고 텅 빈 베르사유다.
캐나다계 미국인인 작가는 1960년대 후반 뉴욕으로 이주하면서 영화 제작자 요나스 메카스의 조수가 돼 앤솔러지 필름 아카이브에서 일했다. 이 시기의 경험에 영향을 받아 필름을 프레임별로 편집하며 스틸 사진에 관심을 가졌고, 1983년 파리로 이주하면서 베르사유와 인연이 닿았다.
작가는 1980년대 초반부터 3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베르사유의 복원 과정을 찍으며 변화의 역사를 기록해 왔다. 그는 장 마리 페루즈가 작성한 궁전의 종합 건축 역사를 보여주기 위해 베르사유를 촬영했고, 베르사유의 복원을 문서화 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작가에 의해 기록된 ‘베르사유’는 약 30년 동안 변화의 과정을 거친 역사와 소통하는 건축물로 새롭게 제시됐고, 2009년에 발간된 베르사유의 복원 과정을 담은 사진집 3권은 미술계뿐 아니라 건축계도 주목했다.
사진 하나하나를 설명하는 작가는 베르사유의 역사를 마치 전문가처럼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사진 속 한 방에 설치된 자개장을 손으로 짚으며 “과거 베르사유에서 중국적 요소를 지닌 가구가 유행할 때가 있었는데, 프랑스인은 자부심이 높아 자국 내에서 만들어진 것을 선호했다. 그래서 프랑스에서 가구를 만든 뒤 이를 해외에 보내 중국적 요소가 담긴 그림을 칠해와 완성하는 데만 6~7년이 걸렸다고도 한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이처럼 작가는 단지 건축의 외관만 찍는 게 아니라 해당 건축물 주변 환경의 역사를 지속적으로 탐구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 왔다. 바로크 풍의 부조 방식, 신고전주의 이미지와 바로크의 잔재들 등 그의 사진으로 제시된 베르사유는 그 공간을 살았던 사람들의 역사를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꼭 베르사유뿐만이 아니다. 이건수 미술평론가는 작가의 사진에 대해 “공사 중인 어수선하고 텅 빈 공간의 생경함을 포착하는 것은 물론이고, 재난의 여파에 살아남은 건물들의 상처가 새겨진 인테리어들, 특히 체르노빌 학교의 정적 가득한 공간들, 후기 식민주의 색채로 아련한 하바나의 현실, 빽빽하고 치밀한, 그래서 ‘수지상형 도시’라고 불리는 뭄바이, 리오 데 자네이루, 암만 등의 빈민가, 판자촌, 달동네 전경은 건축과 도시 구조 속에 담긴 역사적 서사의 울림을 들려준다”고 평했다.
“현재의 우리가 선택한 과거의 미감”
작가는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그 사진은 작가가 포착한 바로 그 순간을 저장한다. 그렇게 작가가 찍은 현재는 시간이 흐른 뒤 과거가 되고, 이는 다시 미래에서 재조명된다. 900개가 넘는 베르사유의 방들이 어떻게 바뀌어 왔는지도 그의 사진이 기억하고 있고, 이번엔 한국 관람객들을 만났다. 작가가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순간순간이 다 기록이자 복원 과정인 셈.
특히 작가는 베르사유의 복원 과정이 인상 깊었다 한다. 초록색 벽지가 덮인 방 사진을 가리키며 그는 “궁전 1층 중간쯤에 있는 방으로, 2000년 동안 이 방을 4명의 왕이 거쳐 갔다. 2차 세계대전 때 폭격을 당해 모습을 잃어버렸던 이 방은 루이 16세가 꾸몄던 방 모습을 그대로 복원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복원 과정에서 더 화려하게 꾸밀 수도 있었겠지만 최대한 과거를 온전히 기록하려 한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작가는 복원이 단지 과거의 시간에 묻혀 있는 건 아니라고 강조했다. 이를 작가는 “현재의 우리가 선택한 과거의 미감”이라 설명했다. 예컨대 베르사유를 복원하기 위해 과거의 자료를 참조하지만 100% 똑같은 벽지와 장식물을 다시 되살리긴 힘들다. 그리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당시대가 선호하는 미감 또한 변하기 마련인데, 이 또한 복원 과정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된다.
작가는 모스크바 크렘린 궁전 이야기를 꺼냈다. 최근 이곳을 방문한 작가는 베르사유와는 다른 복원 과정에 흥미를 느꼈다 한다. 작가는 “베르사유는 최대한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복원하는 데 중점을 두는 반면, 크렘린 궁전은 ‘과거에 이랬으면 더 좋았을텐데’라는 현재의 판타지를 접목해 복원 과정이 이뤄지고 있었다. 즉 과거를 복원할 때 현재 우리의 미감이 더해지면서 하나의 역사를 더 씌우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현재와 과거는 단절된 것이 아니라 복원 과정을 통해 모두 연결돼 있다는 것.
그리고 작가는 이것이 바로 현재의 우리를 인식하는 방식이라고도 강조했다. 그는 “19세기부터 본격적으로 과학적 방식의 복원 기술이 시작됐다. 벽에서 작은 샘플을 떼어 내 이를 토대로 이뤄지는 복원 작업은 오늘날 매우 보편화됐다. 인간은 먼 과거부터 복원 작업을 통해 역사를 기록해 왔다. 이집트 피라미드 또한 과거를 보존하고, 기리며, 재조명하는 상징”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는 현재의 우리가 무엇인지 깨닫고 기록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나는 내 작업도 복원의 일환이라고 생각한다”며 “이는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고 미래에 초점을 맞추는 일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기록으로서의 가치도 있지만 그의 작품은 시각적으로도 인상 깊게 다가온다. 전시를 직접 보기 전 컴퓨터 파일로 이미지를 먼저 접했을 땐 사진이라는 게 인식됐지만, 직접 마주한 그림은 사진이라기보다는 유화처럼 느껴져 특이했다. 이에 대해 작가는 “대형 뷰 카메라로 느린 셔터 속도를 사용해 사진을 찍는다. 필름 자체도 커서 화질이 높다. 찍은 이미지는 컴퓨터로 옮겨 내가 기억하고 있는 색을 바탕으로 작업한다”며 “이 또한 내 미감이 들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겠다”고 답했다.
또한 정면에서 본 전체적 풍경뿐 아니라 베르사유에 걸린 그림 중 하나의 일부를 클로즈업해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래서 왕의 신발로 추측되는 부분과 화려한 의자의 일부가 사진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기도 하다. 작가는 “그림 하나를 걸 때 정면에서 보기도 하지만 보고 싶은 부분 가까이에 가서 보기도 한다. 그 행위를 강조하고, 중요 포인트를 강조하고 싶은 측면도 있어 가까이에서 사진을 찍기도 한다”고 말했다.
베르사유의 복원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작가는 “베르사유는 매년 방문할 때마다 새로 만나는 느낌이다. 어떻게 바뀌고 복원되는지 과거부터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레이어를 쌓는 것이 내 작업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