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도기천 기자) 재계 전반에 젊은 바람이 불면서 식품·제약업계의 세대교체가 속도를 내고 있다. 다른 업종에 비해 오너 일가의 지배력이 높은 편인데다 2~3세들의 연령이 30~40대에 이르러 경영승계가 표면화 되고 있는 것. 하지만 계속돼온 재벌의 갑질과 탈세, 부(富)의 세습 등으로 따가운 시선도 여전하다.
우선 식음료업계에서는 부자(父子) 경영에 나선 기업들이 눈에 띈다.
대표적인 식품기업인 농심은 창업주 신춘호 농심그룹 회장의 손자이자 신동원 부회장의 외아들인 상열씨(1993년생)가 다음 달부터 본사로 출근한다. 그는 지난해 미국 컬럼비아대를 졸업했으며, 앞으로 경영수업을 거쳐 지주회사인 농심홀딩스와 농심의 경영을 맡게 될 것으로 보인다. 신 부회장의 유일한 아들이라는 점에서 향후 농심을 이끌 인물로 점쳐진다.
사조그룹에서는 3세인 주지홍 사조해표 상무(1977년생)가 경영승계 과정을 밟고 있다. 그는 창업주 고 주인용 회장의 손자이며 주진우 사조그룹 회장의 장남이다. 2006년 사조인터내셔날에 입사해 사조해표 기획실장과 경영본부장을 거쳤다.
하이트진로는 1세대 경영인인 고 박경복 회장(하이트의 전신인 조선맥주 회장)의 손자이자 박문덕 하이트진로그룹 회장의 장남인 박태영 부사장(1978년생)과 차남 박재홍 전무가 경영 전면에 나서고 있다.
식품업계 1위기업인 CJ에서는 이재현 CJ그룹 회장의 장녀인 경후씨(1985년생)가 작년부터 CJ ENM의 브랜드전략 상무를 맡고 있으며, 이 회장의 장남인 선호씨도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금융경제학을 전공한 뒤 2013년 CJ제일제당에 입사해 부장으로 근무 중이다.
이미 승계를 마무리하고 그룹의 사령탑으로 자리잡은 3세들도 여럿이다.
대상그룹은 고 임대홍 창업주와 임창욱 회장의 뒤를 이어 두 딸인 임세령 전무(1977년생)와 임상민 전무(1980년생)가 회사를 이끌고 있다. 두 사람 모두 나란히 기획관리본부 부본부장(상무)을 거쳐 지금은 식품BU·소재BU 전략 부문을 총괄하고 있다.
크라운해태는 윤영달 크라운해태제과그룹 회장의 장남이자 창업주 고 윤태현 회장의 손자인 윤석빈 대표(1971년생)가 회사를 이끌고 있다. 그는 2000년 크라운베이커리 디자인 실장으로 시작해 디자인부문 상무, 크라운제과 대표이사를 거쳐 현재 크라운해태홀딩스 대표이사와 크라운제과 사장을 겸직하고 있다.
3040오너들 대거 등장
식품업계와 사촌격인 제약업계에서도 3세 경영이 본격화되고 있다. 대부분 30대들이다.
셀트리온은 지난 1일 창업주 서정진 회장의 차남인 30대 초반의 서준석 과장을 운영지원담당 이사로 승진시켰다. 서 신임 이사는 2017년 과장으로 입사해 업무 경험을 쌓아왔는데 약 2년 만에 임원으로 올라선 것. 앞으로 셀트리온의 바이오의약품 생산공장 운영 등을 이끌 예정이다. 앞서 서 회장의 장남인 진석씨(1984년생)는 2017년부터 셀트리온의 화장품 계열사 셀트리온스킨큐어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일성신약은 올해 초 공시를 통해 윤석근 대표이사와 함께 차남 윤종욱 씨를 공동 대표이사(1986년생)로 선임했다고 밝혔다. 윤석근 대표의 장남인 윤종호 씨도 이미 일성신약에서 이사를 맡아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대원제약에서는 백승호 회장의 장남이자 오너 3세인 백인환(1984년생) 씨가 올해부터 마케팅본부 전무를 맡고 있다. 백 전무는 2011년 마케팅팀 사원으로 입사한 후 상무를 거쳐 올해 승진했다. 현재 대원제약은 창업주인 백부현 전 회장의 장남 백승호 회장과 차남 백승열 부회장이 공동 경영하고 있다.
이처럼 제약업계에서 오너가(家)의 젊은 자녀들이 경영전면에 나서는 일은 낯선 풍경이 아니다.
가장 오랜 역사(1897년 창업)를 가진 동화약품의 경우, 윤도준 회장의 딸과 아들인 윤현경 상무(1980년생)·윤인호 상무(1984년생)가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일양약품은 지난해 창업주 고 정형식 명예회장의 손자이자 정도언 회장의 아들인 정유석(1976년생) 일양약품 전무이사가 부사장으로 승진해 3세 경영 체제를 본격화 하고 있다.
보령제약에서는 오너 3세인 김정균 보령홀딩스 상무(1985년생)가 2017년부터 기획전략실을 이끌고 있다. 작년 12월 김은선 보령제약 회장이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나면서 승계에 속도를 내고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삼일제약과 국제약품은 오너 3세인 허승범 대표(1981년생)와 남태훈 대표(1980년생)가 각각 회사를 이끌고 있다.
일동제약은 오너 3세 윤웅섭 사장이 2014년부터 대표이사를 맡고 있으며, JW중외제약은 3세 이경하 회장이 2015년부터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이처럼 제약·식품업계에서 유독 3세들의 비중이 큰 데는 특유의 보수성, 단순한 지분구조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우선,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거나 글로벌 사업 위주인 IT·금융·중공업 등에 비해 제약·식음료는 국내사업이 주를 이룬다. 특히 한 개의 장수 브랜드로 수십년 간 사업을 영위하는 경우가 잦다보니 전문가 보다 자식에게 맡겨도 사업에 큰 차질이 없다는 점이 3세경영의 배경이 되고 있다.
실탄·지분 넉넉…순풍에 돛단듯
제약업계의 경우, 안티푸라민(유한양행), 후시딘(동화약품), 마데카솔(동국제약), 우루사(대웅제약), 박카스(동아제약), 아로나민(일동제약) 등이 대표적이다. 식품업계도 신라면(농심), 초코파이(오리온), 참이슬(하이트진로) 등 대표상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기업지배구조가 다른 업종에 비해 비교적 단순하다는 점도 승계에 속도를 붙이고 있다.
대표적인 제약·식품기업 대부분은 1950~60년대 산업화 초기에 ‘자수성가’ 형태로 탄생했다. 당시는 형제·자식에게 회사를 대물림 하는 게 자연스러운 시절이다 보니 회사 지분의 대부분을 오너일가가 소유했고 이는 오늘날 주요 제약·식품사들이 취하고 있는 ‘대주주-지주사-자회사’ 형태인 수직계열화의 뿌리가 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런 경우는 제약업계가 두드러진다. 주요 제약사 중에 지분(지배력) 문제가 경영승계의 걸림돌이 된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임성기 한미약품 회장의 손자·손녀들은 수천억대 주식보유로 미성년 주식부호 1위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이경하 JW중외그룹 회장은 JW중외제약의 최대주주인 JW홀딩스의 지분 27.78%를 갖고 있다. 강정석 동아쏘시오그룹 회장, 허은철 녹십자 사장, 윤웅섭 일동제약 사장 등 최근 몇 년 새 등극한 3세 경영인 대부분이 최고경영자와 최대주주 지위를 동시에 갖고 있다.
젊은 총수 ‘동전의 양면’
최근 문재인 정부가 ‘재벌개혁’에서 ‘혁신성장’으로 기업정책 방향을 전환하면서 재벌에 대한 사회적 시각이 변화된 점도 승계에 있어 우호적인 배경이 되고 있다.
문재인 정부 초기 재벌개혁을 주도했던 장하성 전 청와대 정책실장을 비롯한 1기 멤버들이 물러나고 기업친화적인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경제사령탑에 취임하면서 이런 기류는 두드러지고 있다. 홍 부총리는 재계 인사들을 만날 때 마다 기업투자를 독려하며 제도적 지원을 약속하고 있는데, 이런 기류가 제약·식품업계의 3세들이 경영전면에 등장하는데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여기에다 주요 대기업의 총수들이 최근 3·4세로 바뀐 점도 긍정적이다.
LG그룹은 작년에 구본무 회장이 타계하면서 40세의 구광모 회장이 총수 자리에 올랐고, 현대차그룹은 정몽구 회장의 장남인 정의선 총괄수석부회장이 그룹을 이끌고 있다. 효성은 작년부터 조석래 회장의 장남인 조현준 회장 체제로 전환했으며, GS그룹은 지난해 연말인사에서 오너가 4세인 허세홍 사장을 GS칼텍스 대표이사로, 3세인 허용수 사장을 GS에너지 대표이사로 선임했다.
한화그룹은 김승연 회장의 장남인 김동관 한화큐셀 전무와 차남 김동원 한화생명 상무가 그룹의 핵심으로 부상했으며, 코오롱그룹은 23년 동안 그룹 경영을 이끌어온 이웅렬 회장이 최근 퇴임하고 이 회장의 장남인 이규호 상무가 전무로 승진하며 그룹 핵심으로 부상했다.
이들의 나이는 대부분 30~40대로 제약·식품업계의 세대교체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이처럼 재계 전반에 젊은 물결이 넘치면서 권위적인 기업문화가 개선되는 등 긍정적인 효과가 크지만 한편으로는 갑질 등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여전하다.
<한국재벌사>의 저자 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는 CNB에 “제약·식품업계의 세대교체는 회사가 활력을 띠고 소통 문화가 활성화 된다는 점에서 분명 플러스 요인이 있지만, 기업(企業)을 가업(家業)으로 여겼던 아버지 세대의 사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측면도 있다”며 “특히 총수 일가의 지배력이 막대하다는 점에서 오너 리스크를 최소화 할 수 있는 다양한 예방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국민연금을 비롯한 연기금의 주주행동 강화, 근로자가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노동이사제의 민간기업으로의 확대, 감사 선임의 독립성 강화 등 최소한의 견제 수단을 마련해야 한다”며 제도 개선을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