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3호 정의식⁄ 2019.03.29 16:32:21
박근혜 정부 시절 국정농단 사태의 한 당사자로 논란이 되며 주요 회원사가 탈퇴하고 활동 폭이 크게 줄어든 전경련이 최근 서서히 활동을 재개하고 있다. 올 초 허창수 GS그룹 회장의 전경련 회장 5연임이 결정된 이후 전경련은 미국과 일본에 대한 민간 외교에 나서더니 급기야 지난 26일에는 청와대에서 열린 국빈 만찬에 공식 참석하는 등 활동의 수위를 높이고 있다. 과연 전경련은 과거의 위세를 회복할 수 있을까?
문 정부 첫 공식행사 참석… 배경은?
지난 26일 문재인 대통령은 방한한 필리프 벨기에 국왕 내외를 청와대로 초청, 정상회담을 가졌다. 특기할만 한 건 이날 청와대에서 열린 환영 만찬에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대표 자격으로 허창수 GS그룹 회장이 참석한 것.
그간 허 회장은 GS그룹 회장 직으로는 현 정부의 행사에 여러 번 참석했지만, 전경련 회장 자격으로 참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국정농단 사태 이후 출범한 새 정부에서 전경련은 공식 행사나 정책논의 과정에서 배제되는 이른바 ‘전경련 패싱’이 이어져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올해 1월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대한상공회의소에서 개최한 주요 경제단체장 간담회에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김영주 한국무역협회 회장, 박성태 중소기업중앙회 회장 등 4대 경제단체장은 참석했지만, 허창수 전경련 회장은 초대받지 못했다. 당시 기획재정부는 전경련을 제외한 것을 두고 “최근의 행사 관례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올 1월 문재인 대통령이 중소기업중앙회에서 개최한 신년회에도 전경련은 경제단체장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으며, 청와대 영빈관에 열린 ‘2019 기업인과의 대화’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뤄진 이번 국빈 만찬 참석을 두고 일각에서는 “전경련 패싱이 종료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국정논란 후 회원사 대거 탈퇴 ‘후유증’
전경련의 위상이 급전직하한 건 지난 2016년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 사태가 불거진 때문이다. 당시 박근혜·최순실 등이 저지른 여러 비리의 핵심 축이었던 미르재단, K스포츠재단 등의 설립과 기금 마련 등에 전경련이 주도적으로 나선 사실이 드러난 것. 이외에 전경련 산하단체인 자유경제원이 박근혜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앞장서고, 어버이연합 등 극우단체를 후원한 사실 등도 논란이 됐다.
추문이 이어지면서 삼성과 현대차, SK, LG, CJ, KT 등 전경련의 주축을 이루던 주요 그룹이 잇따라 탈퇴를 선언했고, 2017년 3월 전경련은 △명칭을 ‘한국기업연합회’로 변경 △회장단이 아닌 기업이 중심이 되는 조직으로 변경 △재벌 오너 모임인 ‘회장단 회의’ 폐지 △정경유착 고리가 된 사회협력회계 폐지 △조직과 예산 40% 이상 감축 등의 혁신안을 공개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전경련은 올 2월 열린 정기총회에서 명칭 변경 안건을 상정하지 않아, ‘한기련’ 변경은 없었던 일로 치부되는 분위기다.
한편, 재계의 대변자 역할을 하던 전경련이 위축되자 대신 두각을 드러낸 건 대한상공회의소(대한상의)였다. 경제단체 중 가장 연혁이 오래되고, 유일한 법정 민간 경제단체라는 점 등으로 인해 이전에도 정부와 경제계 간의 가교 역할을 해왔던 이 단체는 2013년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이 수장으로 취임한 후 줄곧 ‘재계의 맏형’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반면, 전경련은 회원사 대거 탈퇴의 여파로 차기 회장직을 맡을 후보가 나타나지 않아 2011년부터 회장을 맡아온 허창수 GS 회장이 올 초 5연임을 기록할 정도로 인재난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 2월 27일 전경련 정기총회에서 유임이 결정되면서 허 회장의 임기는 2021년 2월까지로 연장됐다. 당시 허 회장은 취임사를 통해 “전경련이 혁신안을 발표하고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 왔지만, 아직 국민들이 보시기에 부족한 점이 있다”면서 “앞으로 국민들과 회원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미·일 통상외교로 공식활동 재개 ‘시동’
이후 전경련과 허 회장은 이전보다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허 회장의 임기 첫 공식 활동은 대미 통상외교였다.
3월 5일 허 회장은 롭 포트만 미국 상원의원(공화·오하이오)에게 그가 발의한 ‘무역안보법(안) 2019’를 지지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내고 입법화를 위해 최선을 다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서한은 법안 공동발의자로 참여한 상원의원 8명(공화 5명·민주 3명)과 하원 발의자인 론 카인드 의원, 공동발의한 하원의원 6명(공화 3명·민주 3명)에게도 동시에 발송됐다.
이 법안은 지난 1월 팻 투미 상원의원이 발의한 ‘양원 합동 의회통상권한법(안) 2019’와 같이 미 의회가 대통령에 위임한 통상권한을 제한하는 내용이다. 수입품에 대한 국가안보 침해 여부 조사 권한을 상무부가 아닌 국방부에 주고, 행정부가 무역확장법 232조 발동 시 모든 품목에 대해 의회가 불승인할 수 있도록 의회 권한을 확대하는 등의 내용이 담겼다.
당시 트럼프 행정부가 준비하던 무역안보법안이 통과될 경우 철강, 알루미늄, 수입자동차 등에 고율 관세가 부과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한 민간 외교활동이었다.
이어 3월 14일에는 악화된 한일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일본에 경제사절단을 파견했다. 일본 게이단렌(經團連)이 주최하는 글로벌 경제계 협의체 ‘B20 도쿄 서밋’에 허창수 전경련 회장을 비롯한 대표단 8명이 참석한 것. 대표단에는 신동빈 롯데 회장과 김윤 삼양홀딩스 회장, 류진 풍산 회장, 조현준 효성 회장, 황창규 KT 회장, 박근희 CJ 부회장, 류두형 한화에너지 대표 등이 참여했다.
대표단은 이날 ‘일본의 밤’ 행사에서 나카니시 히로아키(中西宏明) 게이단렌 회장(B20 의장)을 만나 오는 11월 14일부터 15일까지 ‘한일 재계회의’를 열기로 합의했다. 한일 재계회의는 전경련과 게이단렌이 참여하는 민간 회의로 2014년 개최된 이래 7년 만에 재개됐다.
허 회장은 이날 일본 측 대표단에 “최근 한일관계가 경색돼 있지만, 민간차원의 협력은 계속해 나가자”고 당부했다.
경실련 “대통령 사과부터” vs 청와대 “전경련 필요성 無”
이렇듯 전경련의 공식 활동이 확대되던 와중에 그간 배제됐던 청와대 행사에 허창수 회장이 전경련 회장 자격으로 참석한 사실이 알려지자, 다양한 반응이 쏟아지고 있다.
특히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은 27일 성명을 내고 “대통령마저 지난 국정농단 사태 주범이자 각종 불법 정치자금·로비 사건의 핵심인 전경련과 협력을 도모하려는 것으로 판단돼 분노를 금할 수 없다”며 “이번 만남으로 정부가 재벌개혁 의지가 전혀 없음이 드러났다”고 지적했다.
이어 “문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경실련의 공개질의에 ‘전경련은 스스로 해체를 결정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며 “이런 약속이 사라진 데 대해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사과부터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청와대 측은 “여전히 전경련과 거리를 두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청와대 관계자는 ‘전경련 패싱’ 논란에 대해 “특별히 전경련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며 “기업과 관계에서 대한상의나 경총 등의 단체를 통해 모자람 없이 서로 협조를 구하고 의사소통이 이뤄지고 있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청와대 측의 해명을 감안하면, 이번 허창수 전경련 회장의 청와대 만찬 참석은 벨기에 국왕 방한 일정과 관련한 1회성 초청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전경련은 27일 벨기에경제인연합회와 공동으로 ‘한-벨기에 비즈니스 포럼’ 행사를 진행했는데, 이날 행사에는 필리프 국왕도 참석했다. 26일 청와대 공식 만찬에도 벨기에경제인연합회의 베르나르 질리오 회장이 참석했기 때문에 공동 행사를 준비한 카운터파트인 허창수 전경련 회장도 초청됐다는 것.
하지만 단순히 1회성 행사로 치부하기엔 최근 전경련의 ‘제 목소리 내기’가 너무 두드러진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경실련 관계자는 “최근 전경련은 국민연금의 대한항공 조양호 회장 사내이사 재선임안 반대를 두고 ‘연금사회주의’ 운운할 정도로 목소리가 커졌다”며 “여전히 대기업 오너의 안위만 걱정하는 전경련의 최근 행보를 우려하는 시선이 많다는 것을 유념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