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3호 이문정(미술평론가, 리포에틱 대표)⁄ 2019.04.08 09:13:02
(CNB저널 = 이문정(미술평론가, 리포에틱 대표)) 약 16세기경부터 18세기까지 다양하게 발전했던 ‘캐비닛(cabinet of curiosities)’은 예술 작품, 골동품, 장식품, 희귀하거나 이국적인 수집품처럼 주목할 만한 오브제들을 소장해 전시하는 공간을 뜻한다. ‘캐비닛’의 모습이 담긴 그림들을 보면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오브제들이 전시되어 있어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말 그대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을 만족시키는 장소다.
인터뷰를 위해 작가의 작업실을 방문하다 보면 그들의 작업실이 현재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캐비닛’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작업실에는 작가의 취향이 담뿍 묻어나는 일상의 혹은 일상에서 보기 힘든 물건들, 작가의 작품, 작업과 관련된 자료와 수집품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작업실은 궁금하기도 하고 신비롭기도 한, 누군가에게는 막연한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이기도 하다. 작업실에 놓인 오브제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다 보면 하루가 훌쩍 지난다.
작가 이수인의 작업실 역시 그랬다. 작업실의 문을 열자 또 하나의 세계가 열렸다. 천장에 매달린 작품, 벽을 채운 물방울무늬, 사이사이 놓인 가구와 오브제, 책들이 놓인 공간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작품처럼 보였다.
작년 9월 ‘상상 수납 - Cabinet of Curiosities’에 전시되었던 이수인의 작품들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직각의 형태가 강조된 나무 캐비닛(cabinet) 안에는 기계의 부품 같기도 하고 유기적 세포(생물) 같기도 한 오브제들이 채워졌다. 무심한 척하지만 치밀하게 열리고 닫혀 있는 서랍들은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나무의 결이 두드러지는 수납장을 둘러싼 그래픽(graphic)적 이미지는 예민한 불협화음을 일으키며 감각을 자극했다. 닫힌 서랍 안에는 과연 무엇이 들어있었을까? 작가는 자신의 캐비닛 안에 얼마나 많은 상상을, 얼마나 복잡미묘한 감정들을 보관하고 있을까?
이수인은 자신의 일상 공간과 시간에 기반해 상상력을 발휘한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서 시작한 상상이지만 그 과정에서 작가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존재하는 무언가가 작품을 매개로 하여 밖으로 분출된다.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형태를 가진 오브제들은 정제된 결과물이 숨기고 있는 작가 내면의 상태를 전한다. 상상은 현실을 벗어난 것이지만 현실에 기반한다. 상상이 재현되면 그것은 현실이 된다. 그리고 현실은 상상을 통해 더 풍부한 내러티브를 얻는다.
누구나 자기만의 캐비닛을 갖고 있다. 캐비닛 안에는 여러 의미에서 소중한 물건들이 보관되어 있다. 물건을 보관하는 캐비닛만 있는 것은 아니다. 소중했던 순간들, 그 순간의 인상과 감정들이 기억 한편에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기도 하다. 때로는 서랍이 너무 깊어 무엇이 담겨 있는지 잊어버릴 때도 있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예상치 못했던 것을 찾아내기도 한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이수인의 캐비닛을 경험했던 순간은 어떻게 보관되어 있을지 궁금해진다.
이수인 작가와의 대화
“언어는 미술보다 단조롭다. 말로 불가능한 느낌을 전달”
Q. 작업에 원, 물방울무늬(polka dot), 정원, 빛, 물, 유기체 같은 키워드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제목에서 사용되기도 하고, 이미지로 전달되기도 한다. 각각의 키워드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와 그 의미가 궁금하다.
A. 나는 작업을 시작할 당시 내가 머무르는 시공간의 상황과 조건에 근거해 상상하고, 그것을 작품에 담아낸다. 질문에 언급된 요소들을 처음 생각한 것은 2011년 겨울 즈음이다. 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작업을 할 때에는 계속 새로운 무언가를 추구해왔다. 그러다 오늘 보고 내일 다시 봐도 항상 새롭지만 동시에 변하지 않는 핵심적인 것(core)은 무엇일지 고민하게 되었고, 원의 형태를 찾아냈다. 본질적이면서도 변형의 가능성이 무궁한 이미지를 찾아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 끊임없이 원형(circle)을 탐구했다. 이후 컴퓨터에서 원을 드로잉 하던 중 그것을 반복적으로 그려 움직임을 만들기도 하고 정렬시키기도 할 수 있는 도구(tool)를 발견했다. 우연의 반복생산이었다. 여기에서 작업이 발전되었다.
물이나 정원은 작업실 공간에서 원의 형상을 바탕으로 새롭게 생성되는 것들이 무엇일지 상상하다 나온 것이다. 빛이 있고, 물이 있고, 무언가가 생장하고, 움직이고, 번식하는 유기적 관계를 제시하고자 했다. ‘여기에 빛이 있다면 식물이 자라고, 정원이 만들어질 텐데, 그러면 어떻게 채워질까?’처럼. 물론 물질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정원이다. 현실 공간에는 물방울무늬만 가득하지만 상상에서는 모든 게 가능하다. 현실과 상상이 교차되는 공간이라는 표현이 적합할 것 같다.
Q. 많은 이야기가 담긴 작업이다. 그런데 기하학적 형상이 나열되니 형식적이고 시각적인 부분이 강조되어 보인다. 자연히 이야기나 상상이 펼쳐지는 작업 과정보다 결과물인 이미지 자체에 집중하게 된다. 제목을 통해 연상을 해나갈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는 시각적인 부분에만 집중한다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단순하면서도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등장해서 더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듯하다.
A. 군더더기를 모두 빼고 가장 나다운 것을 정제해서 보여주다 보니 단순한 형태가 만들어졌다. 나의 내면 끝에 닿고자 하는 노력인데 정리 정돈하여 보기 좋은 깔끔한 이미지를 만들려는 시도라 오해받을 때가 있다. 조금 안타까운 부분이다. 단순해 보이는 이미지 뒤에는 여러 단계의 숨겨진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앞선 질문에서 답했듯 나는 작업 과정에서 수많은 상상을 한다. 그것을 구현하는 과정도 매우 길다. 컴퓨터 드로잉에서 시작되는 작업이라 하여 단시간에 간단히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반복적으로 드로잉을 한 뒤 나오는 이미지들을 바탕으로 작업한 결과물이다. 많은 오차를 겪은 뒤 나온 가장 단순하고 정제된, 가장 효과적인 이미지를 사용한다. 또한 색을 선택하고 칠하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 마치 한 번에 칠해진 컬러 칩(color chip)의 색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많은 심리적, 물리적 층(layer)이 쌓여 있다. 유사한 색들을 여러 번 중첩시켜 하나의 색을 만드는 것과 하나의 색을 한 번에 칠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나는 단순함 속에 스며 있는 감성적 부분들을 전달하고 싶다.
Q. ‘단순함 속의 감성적인 부분’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면 좋겠다. 또한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특정한 감성이나 이야기와는 별개로 관객들이 자유롭게 상상하고 해석해 나가는 부분도 있을 텐데 자신이 생각(의도)한 것을 관객이 어느 정도 느끼길 원하는가? 관객에게 그것이 전달되지 않아도 괜찮은가? 아니면 일정 부분이라도 전달되길 원하는가?
A. 이야기를 품고 있는 작품이기에 그와 관련된 단어를 조합해 제목을 짓는다. 이미지와 색채도 내가 담아내는 감수성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한다. 그러나 작가로서 나의 의도를 반드시 전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의 작업은 생각하는 것보다 느끼는 것에 가깝다. 말로 서술할 수 없는 느낌, 감성이 전달되길 바란다. 작품에 품어낸 감수성이 어떤 식으로든 전달되었으면 좋겠다. 물론 관객마다 나름의 상상을 할 수도 있을 거다.
나는 디자인 상품을 개발할 때도 사용할 수 있는 작품을 생각한다. 어떤 느낌이 전달되고, 그 느낌 때문에 소유하고 싶은 물건을 만들려 한다. 무엇을 만들어도 감정적 교감을 이끌어내는 게 중요하다. 나에게 언어는 미술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단조롭다. 그래서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감성적인 부분을 말로 설명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형언할 수 없는 묘한 감수성은 말로 전달하거나 서술하지 않더라도 느낄 수 있다.
Q. 오늘날의 많은 작가들이 재료와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이수인의 작업 역시 그렇다. 회화와 입체, 벽화, 설치, 디자인과 패션을 아우른다. ‘어떤 작가로 불리길 원하는가?’와 같은 질문을 많이 받았을 것 같다.
A. 사람들은 어떤 새로움과 마주하게 되면, 구분하고 분류하여 규정짓고 싶어 한다. 정의 내리는 것은 나의 몫이 아니다.
Q. 회화뿐 아니라 설치 작업도 평면적으로 보인다. 작품이 설치된 전시 공간은 하나의 큰 캔버스처럼 느껴진다. 남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다.
A. 아마도 작업의 시작이 평면적 이미지였기 때문일 거다. 기하학적인 패턴들이 반복되어 그렇게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평면인데도 입체로 보이는 착시와도 같은 느낌을 좋아한다. 그 자체가 재미있다.
Q. 전시 ‘The Polka-dot Garden’(2014), ‘Organic Unity’(2015)에 발표되었던 작품들을 보면 서로 상반되는 속성들이 충돌하듯 공존한다. 그 형상과 제목은 유기적인 무언가를 연상시키는데 보이는 이미지는 기계적이다. 미래적이기도 하다. 유기체인 동시에 기계인 것 같다. 튜비즘(Tubism)이 떠오르기도 했다.
A. 일정 부분 의도한 것이다. 자연적인 생장을 생각하면서 작업을 시작하지만 그것을 실현할 때에는 그래픽적인 것을 생각한다. 원형은 그 자체로 자연과 인공 모두를 다 이어주는 이미지이다. 또한 좁게는 나의 작업실, 넓게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도시환경에서는 햇빛보다 인공조명이 자연스럽다. 현대적인 건축물 안에서는 인공조명이 자연 빛보다 더 유기적이고 조화롭다. 그런 상상 속에서 ‘A Mechanical Waterfall’(2015) 같은 라이트 아트(light art)를 제작했다. 인간이 만들어낸 인공적인 요소들이 현재 우리의 자연적인 생장 환경임을 빗대 표현한 거다. 그렇다고 이런 이야기들을 작품 속에 자세히 서술하거나 특정한 메시지를 전달하려 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저 나의 생각이다.
Q. 전시 ‘Cabinet of Curiosities’(2018)에서는 나무로 된 캐비닛과 기하학적 오브제들이 함께 했다. 특정한 물건들을 보관하는 가구인 캐비닛은 선택된 사물을 일상의 시공간으로부터 분리시켜 보존한다. 동시에 오브제들을 전시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A. 캐비닛 작업 역시 당시 나의 상황(상태)과 연결된 상상력에 근거한다. 내가 생산하는 것들을 사회와 연결시켜 보았다. 어떤 공간(사회)이든 개체가 많아지면 규칙이 생기고 조직화된다. 집단이 만들어지고 그 안에서 분류 작업이 일어난다. 집단의 안과 밖도 나뉜다. 그래서 나 역시 늘어난 작품들의 구분 짓기 시도를 해보았다. 앞으로의 방향을 설정하기 위해서도 필요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만든 것들을 조직화하는 세트 장치로 캐비닛과 같은 가구를 디자인했다. 그러나 확정적으로 완결시킨 것은 아니다. 언제든 섞이고 재편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