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9호 윤지원⁄ 2019.05.22 14:04:23
공정위가 지난 15일 발표한 2019 대기업집단 지정과 관련, 각 대기업집단의 동일인 현황에 일부 변화가 나타났다. 80대 고령의 총수들이 여전히 굳건한 그룹 지배력을 인정받는 가운데 4세대 총수의 등장, 40대 총수의 증가 등 재계 세대교체의 징후도 뚜렷해졌음을 알 수 있었다. 한편, 동일인 사망으로 인한 새 동일인 지정 과정이 매끄럽지 못해 논란이 일어난 그룹도 있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 15일 '2019 대기업집단'을 발표하고 자산 5조 원 이상 59개 기업집단을 공시 대상 대기업집단으로, 자산 10조원 이상 34개 기업집단을 상호출자 제한 대기업집단으로 각각 지정했다.
공시 대상 대기업집단으로는 자산 총액 5.2조 원의 애경과 5조 원의 다우키움이 신규 지정됐고, 메리츠금융, 한솔, 한진중공업 등이 지정 제외됐다. 상호출자제한 대기업집단에는 자산총액 10.6조 원의 카카오와 에이치디씨(HDC, 舊 현대산업개발)가 신규 지정됐다.
이와 함께 공정위는 각 대기업집단의 동일인(총수)도 지정했다. 특히 지난 1년 사이 기존 총수가 타계한 LG그룹, 한진그룹, 두산그룹에 대해서 "기존 동일인의 사망으로 동일인을 변경해야 할 중대·명백한 사유가 발생"했다고 밝히며 동일인을 변경하여 지정했다.
동일인은 각 대기업집단에 대해 실질적 지배력이 가장 큰 자연인 혹은 법인을 말하며, 동일인이 자연인일 때는 '총수'라고 표현된다. 동일인이 누구인지가 중요한 것은 그(혹은 법인)가 개별 기업들을 하나의 기업집단 안에 포함시키는 기준점이 되기 때문이다. 공정거래법에서는 지정된 동일인의 혈족 6촌, 인척 4촌까지의 지분보유 현황을 바탕으로 기업집단의 범위를 정한다. 동일인이 부모 세대에서 자식 세대로 바뀌면 그에 따라 혈족 6촌과 인척 4촌도 달라지고, 기업집단의 범위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올해 대기업집단 발표는 대개 5월 1일에 발표하던 예년보다 2주 가량 늦어졌다. 발표가 늦어지면서 재계에서는 이들 3개 그룹 외에도 몇몇 대기업집단의 총수들의 거취 변화와 관련한 여러 가능성이 거론됐었지만, 공정위는 최소한의 불가피한 변화만을 인정하고 기존 동일인을 대부분 그대로 유지시켰다. 그리고 그 경향은 아래와 같다.
4세대 총수, 40대 총수 본격 등장
LG그룹의 구광모 회장과 두산그룹의 박정원 회장은 4세대 총수 시대를 열었다.
구광모 회장은 지난해 5월 타계한 고(故) 구본무 회장에 이어 새로운 LG그룹의 동일인으로 지정됐다. 창업주 구인회 전 회장과 구자경 명예회장, 구본무 회장에 이어 4세대로 이어진 그룹 총수다. 구본무 회장 타계 1달 후인 지난해 6월 그룹 지주회사인 (주)LG의 대표이사 회장으로 취임했다.
두산그룹의 새로운 동일인으로 지정된 박정원 회장은 지난 3월 타계한 고 박용곤 명예회장의 장남이자 박두병 창업 회장의 장손이다. 박두병 회장의 아버지인 박승직 창업주부터 따지면 4세다. 국내 최장수 그룹이기에 가능한 역사다.
두 사람은 공정위가 1987년 총수 지정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지정한 4세대 총수다. 김성삼 공정위 기업집단국장은 "동일인 변경이 대거 이뤄짐으로써 대기업집단의 지배구조상 세대변화가 본격화하기 시작했다"고 평가했다.
한편, 구광모 회장은 1978년생으로 한국 나이로 올해 42세다. 이번에 상호출자제한 대기업집단 34곳의 동일인으로 지정된 총수들 가운데 가장 젊다.
40대 총수는 지난해 1명에서 올해 구광모 회장을 포함 3명으로 늘었다. 나머지는 기존 동일인 자격을 유지한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48)과 이번에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뒤를 이어 새롭게 동일인으로 지정된 조원태 한진칼 공동대표이사(46) 등이다. 정지선 회장과 조원태 대표이사는 각각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와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의 손자다.
은퇴한 아버지가 여전히 1인자
한편, 동일인 변경이 예상됐지만 기존 동일인이 그대로 유지된 기업들도 주목받았다.
현대자동차그룹, 대림, 효성, 한국타이어, 태영 등은 기존 총수들이 80대의 고령이다. 특히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과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등은 병환으로 건강이 예전 같지 않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것으로 여겨졌고, 이에 이번 공정위의 결정에도 귀추가 주목됐다.
현대차그룹의 경우 그동안 재계에서는 고령의 정 회장 대신 정의선 총괄수석부회장이 그룹의 동일인으로 새롭게 지정될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다. 정 회장이 대외 활동에서 모습을 감춘 지 오래됐고, 아들 정 총괄수석부회장이 지난해 핵심 계열사인 현대차와 현대모비스의 대표이사를 맡고 올해 그룹 시무식을 주재하는 등 본격적으로 경영 전면에 나서서 활동해 왔기 때문이다.
또한 지난해 공정위는 삼성그룹과 롯데그룹에 대해 각각 이재용 부회장과 신동빈 회장을 이건희 회장과 신격호 명예회장 대신 새로운 동일인으로 직권 지정한 바 있다. 김 국장은 "삼성은 기존 동일인이 의식불명 상태였기 때문에 의사결정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해 동일인을 변경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격호 명예회장은 97세의 고령이었다.
그런데 올해 현대차그룹은 정몽구 회장이 총수 지위를 유지했다. 김성삼 국장은 "정몽구 회장의 건강 상태에 대한 의사 소견서를 받았다"며 "자필 서명과 건강 소명서를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정상적인 경영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라고 동일인 유지의 이유를 밝혔다.
또한 "정몽구 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는 말이 있었지만 동일인이나 동일인 관계자를 통해 지배력을 행사하면 동일인"이라는 기준에 따른 판단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9월 정 수석부회장의 총괄수석부회장 승진 당시 현대차그룹 측은 정 부회장의 역할이 커지기는 하겠지만 정 회장의 경영권이 여전히 공고하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힌 바 있는데, 공정위 또한 그룹과 동일한 판단을 내린 것이다.
대림은 82세의 이준용 명예회장에서 장남인 이해욱 회장으로의 동일인 변경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효성 역시 조현준 회장이 아닌 85세의 조석래 명예회장이 동일인 자격을 유지했다. 마찬가지로 한국타이어와 태영그룹이 각각 83세의 조양래 회장과 87세의 윤세영 명예회장의 지위가 유지되는 등 많은 그룹의 세대교체가 후일로 미뤄졌다. 올해 공시대상으로 신규 지정된 애경그룹도 80대의 장영신 회장이 동일인으로 지정됐다.
한편, 금호아시아나그룹의 박삼구 전 회장, 코오롱의 이웅렬 전 회장 등 경영 퇴진을 선언한 기존 동일인들도 지위가 유지됐다.
한진그룹 동일인 변경 둘러싼 논란
올해 가장 큰 논란은 조원태 한진칼 공동대표이사의 동일인 지정을 둘러싼 한진그룹의 내부 갈등이다.
한진그룹은 이번 대기업집단지정이 예년보다 늦게 이루어진 원인이기도 했다. 대기업집단 지정과 관련해 한진그룹이 공정위에 제출해야 하는 서류가 늦어진 것이다. 본래 제출 기한은 지난달 12일까지였으나 고 조양호 회장이 지난달 8일 갑작스레 타계하면서 수정이 불가피해진 것이다.
그룹의 대처는 빨라보였다. 조원태 대한항공 사장이 선친 영결식 후 1주일도 되지 않아 한진칼 공동대표이사로 선임됐다. 당시 그룹은 조 대표이사가 한진칼 회장도 맡게 됐다고 밝혔다. 이는 장남이 아버지의 총수 자리를 물려받는 수순으로 보였다.
하지만 조 대표이사를 새로운 동일인으로 결정하는 데는 가족 간 협의가 좀처럼 이뤄지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외부에서 보기에 이는 조 대표이사와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 등 3남매가 갈등을 빚고 있는 것으로 비춰졌다.
아울러 한진그룹이 앞서 한진칼 이사회에서 조원태 대표이사가 공동대표이사 회장으로 선임됐다고 발표했지만, 사실은 공동대표이사로 선임됐을 뿐이고 이사회 회장을 맡게 된 것은 아니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는 조 대표이사에게 줄을 선 일부 그룹 임원들이 정관을 위반하고 거짓보도를 통해 그를 새 회장으로 둔갑시키고자 한 것이라는 주장이 이어지며 논란이 커졌다.
지난 3일 한진칼은 공정위에 공문을 보내 "기존 동일인의 작고 후 차기 동일인을 누구로 할지에 대한 내부적인 의사 합치가 이뤄지지 않아 동일인 변경 신청을 못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이에 공정위는 직권으로 조원태 대표이사를 한진그룹의 새 동일인으로 지정했다.
김성삼 공정위 기업집단국장은 “한진이 차기 동일인을 누구로 할지 내부적인 의사 합치를 이루지 못했다고 알려와서 직권으로 지정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자료를 제출 시한 하루 전인 14일 오전 조원태 대표이사로부터 제출 받았으며 동일인 변경에 필요한 절차상 하자는 없었다고 밝혔다.
김 국장은 조 대표이사 동일인 지정 근거에 관해 "한진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에는 한진칼이 있고, 조원태 씨는 공동대표이긴 하지만 대표이사 직책을 맡고 있다. 조직 변경, 투자 결정 등 주요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따지자면 조원태 대표이사가 가장 가능성이 높아서 지정했다"고 밝혔다.
동일인 지정, 현실에 맞게 개선해야
한편,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20일 라디오 프로그램에서의 인터뷰를 통해 동일인 지정 제도 개선 의지가 있음을 드러냈다. 이는 최근 기업 형태와 지배구조가 다양해지고 있음에도 여전히 모든 대기업집단의 실질적 지배 권력을 특정해 일관된 규제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지적이 계속되고 있어서다.
지난해에는 네이버가 공시대상 대기업집단으로 처음 지정되면서 창업자인 이해진 GIO(글로벌 투자책임자)가 동일인으로 지정되어 논란이 일었다. 구글, 페이스북 같은 글로벌 IT 공룡들과 경쟁해야 하는 네이버, 카카오 같은 IT기업에도 기존 국내 재벌 규제를 위해 적용한 것과 동일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 것.
김 위원장은 올해에도 한진그룹 동일인 지정과 관련한 논란 등과 관련해 “올해 여러 가지 이슈가 있었지만 과감한 변화는 없었다”면서 “내년쯤에는 공정위의 동일인 지정 절차를 현실과 부합하는 방향으로 개선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공정위가 각 그룹의 총수를 지정하는 것은 오해다. 최고 의사결정자가 누군지는 그룹이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라고 강조하고는 “최고 결정자는 공정거래법이 아닌 상법이 판단하도록 규정돼야 한다. 아쉽게도 상법에는 지배개념이나 기업집단 개념 자체가 없다보니 행정법인 공정거래법으로 넘어온 것”이라며 현행 제도의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는 공정위가 재벌 시책의 적용 범위를 정하기 위해 절차 규정을 두고 계열사의 친족 범위를 신고하게 하고 책임질 사람을 지정하는 것이 동일인 지정 제도라고 설명하고는 “(공정위가) 동일인으로 지정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총수고 결정자는 아니다. 괴리를 축소시킬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한 재벌개혁은 재벌을 해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국경제의 소중한 자산으로 거듭나게 하기 위함이라면서 “공정거래법만으로 하는 게 아니라 여러 경제법, 제도, 관행을 다 함께 개선할 때 한국경제가 선진경제를 갖출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한국 발전 과정에서 재벌이 해왔던 밝은 면은 유지·발전해야 하겠지만 지금 시대 상황에 맞지 않는 부분은 개선하고 나아가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재벌개혁의 참뜻"이라며 "21세기 4차 산업혁명기에 맞게 방법도 개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